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숙제인 공공기관 개혁
과연 국민들도 공공기관 개혁의 성과를 인정하고 있을까? 올해 1월에 기획재정부가 실시한 "공공기관 선진화 정책에 대한 국민인식도 조사"를 보면, 응답자들은 '공공기관 선진화정책의 효과성'을 묻는 질문에 25.5%만 긍정적으로 답했다. 국민들은 여전히 공공기관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진보세력에게도 공공기관은 풀어야할 시대적 과제다. 근래 보편복지, 공공성을 논하는 민심이 늘고 있다. 그런데 정작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생산기지인 공공기관은 탐탁치 않게 여긴다. 이러면 시장서비스가 성장할 여지가 생긴다. 실제 보육, 의료, 장기요양 등 사회서비스 대부분이 민간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촛불 저항에 주춤했던 의료, 가스, 전기 민영화도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다.
시민사회나 노동조합은 정부의 공공기관 개혁이 민영화, 외주화, 인력감축 등 시장주의 논리를 따르고 있다고 비판한다. 반대로 보수언론들은 아직도 시장주의 개혁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공공기관 개혁의 방향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시장화냐, 공공성이냐' 논란은 우리나라 공공기관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사안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국민들이 느끼는 문제의 뿌리는 공공기관의 운영과정에 있다. 기존 공공기관 개혁이 수량적 성과를 제시함에도 국민들은 여전히 공공기관 운영에서 정부의 '권위주의적' 행태를 재확인하고 있고 반대로 공공기관 내부의 의미있는 변화는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 지난 28일, 이명박 대통령과 장차관, 80개 공공기관 기관장들이 참여한 대규모 '공공기관 선진화 워크숍'이 열렸다. ⓒ뉴시스 |
정부가 오히려 공공기관 불신 조장해
먼저 정부의 책임 몫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공공기관에서 일부 비용절감이 진행된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들은 공공기관 운영에서 '정부가 행사하는 과도한 권력성'을 오히려 주목한다. 공공기관이 모두의 이익을 구현하기 보다는 정권의 특수 이익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권력형 낙하산 인사이다. 지난 11일 방영된 <PD수첩>에 따르면, 공공기관 284개중에서 무려 185개 기관 306명의 인사(기관장 89명 포함)가 정권과 관련 있는 낙하산이었다. 정연주 한국방송공사 사장,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의 경우처럼 정권 측근을 앉히기 위해 임기가 보장된 기관장을 내쫓는 일도 행해졌다(두 건 모두 불법 해임으로 판결).
공공기관을 정부정책의 하수인으로 편법 활용하는 것도 문제다. 국회 예산 심의를 피하고 공식 국가채무 수치를 줄이기 위해 한국수자원공사가 4대강사업에 동원되었다. LH공사가 진 100조 원이 넘는 부채는 고유사업인 임대사업 보다는 세종혁신도시, 미군기지사업, 산업단지개발 등 정부 정책사업을 무리하게 수행한 결과이다. 정부 스스로 애초 설립 취지를 훼손하고 있는데, 국민들이 한국수자원공사, LH공사를 보면서 공공기관에 대해 얼마나 신뢰를 가질 수 있을까?
'공공기관 개혁' 정치의 역효과도 존재한다. 정부가 자신을 개혁의 사도로 포장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공공기관을 문제덩어리로 몰아가는 경우이다.
정부 공공기관 워크숍이 열린 28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는 중요한 판결이 있었다. 철도노조가 벌인 2009년 파업에 대해 "목적과 절차에서 모두 정당해 업무방해죄를 적용할 수 없다"며 무죄가 선고되었다. 당시 파업 첫날부터 정부는 철도파업을 불법이라 몰아 붙였고 파업 종료 다음날에 정종환 국토해양부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우리나라 철도는 인건비가 버는 돈의 57~58%를 차지하고 있어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철도공사의 비효율성을 부각시켰다.
하지만 엊그제 판결이 확인하듯이, 철도파업은 합법적 과정을 밟은 것이었다. 철도에서 인건비 비중은 정부의 요금정책에 의해 영향받는 매출액이 아니라 비용 항목인 영업비용을 기준으로 평가하는게 옳다. 2008년 기준 한국철도의 인건비는 영업비용 대비 43.4%이다. 세계철도협회 자료를 보아도, 한국철도의 노동생산성은 일본을 제외하곤 서구 어느 나라보다 높다. 정부가 철도노조를 공격하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공기관을 비효율적 조직으로 몰아가는 우를 범하고 있다.
요약하면, 개혁을 추진하는 정부 스스로가 공공기관에 대한 불신을 만들고 있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공기관 지배구조를 정부 '독점'에서 이해관계자 '참여형'으로 바꾸어야 한다. 서구 공공기관에선 정부, 시민사회, 노동조합 등이 함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공공이사회' 제도를 가진 경우가 많다.
'참여형 공공이사회'를 도입하자. 현행 공공기관운영법을 개정하면 가능한 일이다. 중앙과 지방의 정치적 여건을 감안하면, 지방에서 '공공이사회'가 먼저 선보일 수 있다.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이 집권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방공공기관 조례를 개정하면 된다.
진보세력이 공공기관 '내부운영 혁신' 주도해야
공공기관 혁신을 추진하는 주체도 바뀌어야 한다. 공공기관이 지금처럼 비판 대상으로 계속 몰리면 보편복지나 사회공공성 구현에 어려움이 따른다는 점에서 누구보다 진보세력이 주체로 나서야 한다. 어차피 이명박 정부는 기존 방식으로 공공기관 개혁을 강행할 것이므로, 이에 맞서 공공서비스 이용자인 시민단체, 생산자인 노동조합, 야당들의 공동 활동이 요청된다. 이 때 풀어야할 핵심 과제가 공공기관의 내부운영 혁신이다. '공공기관 운영 백서' 운동을 벌이자.
상당수 국민들은 공공기관이 '시장경쟁'에서 거리를 두고 있어 '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여긴다. 국민들이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면 이를 해소하는 답을 내놓아야 한다. 공공기관 운영에 문제가 있다면 과감히 조치를 취하여야 하고, '공공기관 때리기'로 인한 부당한 폄하가 있다면 실체를 알리고 바로 잡아야 한다.
'공공기관 운영 백서'를 통해 불필요한 군살이 있다면 빼고 거래담합이 있으면 도려내며, 반대로 공공서비스 질을 저하시킬 인력 감축, 재무건전성을 이유로 국민에게 전가하는 부담(요금 인상) 등은 막아내야 한다.
우리나라 공공서비스의 현실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다. 전기세, 수도세 등 불신과 저항을 담은 용어가 존재하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공공기관이 생산하는 서비스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외국을 다녀온 사람마다 이야기를 하듯이, 우리나라 공공요금 수준은 낮은 편이고, 전기, 가스, 철도, 버스, 수도 등 공공서비스 질도 불평이 생길 정도는 아니다.
'공공기관 운영 백서'는 공공서비스의 질도 평가할 것이다. 지금의 재정조건에서 괜찮은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면 그 성과를 공유하고,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을 밝히며(재정 부족 혹은 민간위탁) 혁신방안을 찾아나가야 한다. 사회서비스별로 존재하는 시민사회 조직과 해당 노동조합이 나서면 대대적인 공공서비스 백서가 선보일 수 있다.
동시에 공공기관 경영평가제도도 전면 개편돼야 한다. 현행 평가제도는 기업경영을 근간으로 삼은 경영효율화 모델을 공공기관에 적용해 수익적 경영을 강요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 경영평가가 공공기관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될 정도이다.
공공기관이 공공기관답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공성을 중시하는 대안평가제도가 필요하다. 작년에 사회공공연구소가 공공기관 대안평가틀 모델을 시론 수준에서 처음 선보였지만, 실제 대안평가가 수행되기 위해서는 공공성 평가지표를 구성하는 기본 자료 인프라가 구축돼야 한다. 시민사회, 노동조합, 야당들이 구체적인 대안평가틀을 합의하고 이를 작동시키기 위한 기본 자료 생산에 나서야 한다.
대한민국의 진보화 길에 놓인 숙제, 공공기관 혁신
지금까지 공공기관 개혁은 보수세력이 자신의 개혁성을 과시하는 주요한 의제였다. 한나라당과 보수세력은 내년 대선에서도 '공공기관 개혁' 카드를 들고 나올 것이다. 당장 오는 3월이면 상당수 공공기관 기관장들이 임기를 마치므로 또 권력형 낙하산이 내려올 것이다.
이제 진보세력이 적극적으로 공공기관 혁신을 이야기하자. 다행히 최근 공공기관의 민주적 혁신을 논의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고 있다. 지난 12월 민주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등 4개 야당 12개 의원실이 공동으로 "공공기관 혁신" 방안을 모색하는 공동토론회를 개최했고, 오는 3월에는 '공공기관 혁신을 위한 의정포럼'을 결성할 예정이다. 공공기관 산별노조인 공공운수노동조합과 시민단체 씽크탱크들도 공동활동을 위한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진보세력의 연대 움직임이 활발하다. 공공기관 의제를 계속 보수세력의 전유물로 놔둘 수는 없다. 어느 사회든 진보적 체제로 발전하기 위해선 공공서비스 생산기지인 공공기관이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대한민국의 진보화로 가는 길에 반세기 동안 권위주의적 속박에 묶여 있던 공공기관을 서민의 벗으로 재편해야 하는 숙제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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