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담화'가 점잖지 못한 짓이라는 건 누구나 안다. 그러나 어쩌랴. 본능인 걸. 뒷담화가 전혀 없는, 무균질 대화로만 채워진 언어 생활이 과연 가능할까.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뒷담화 본능에 유독 충실한 인간으로는, 기자들을 빼놓을 수 없다. 기자들이 낀 술자리에 가보라. 뒷담화 빼면 이야기가 안 된다. "이번에 ○○가 된 김△△ 있잖아. 걔가 알고 보면…" 늘 이런 식이다. 이런 뒷담화는, 영양은 빈약하지만 맛은 좋은 싸구려 과자와 닮았다.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도 괜히 손이 가는 과자처럼, 별 내용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자꾸 듣고 싶다. 그리고 듣고 나면, 남한테 알려주고 싶다.
세계를 뒤흔든 8개월, 생생한 다큐멘터리
▲ <대마불사 : 금융 위기의 순간 그들은 무엇을 선택했나>(앤드루 로스 스킨 지음, 노다니엘 옮김, 한울 펴냄). ⓒ한울 |
이 책은 학자가 아닌 '기자'가 썼다. 그것도 '뒷담화' 본능에 충실한, 새파랗게 젊은 기자가 말이다. 그래서 재미있다. 미국 월스트리트를 대표하는 투자 은행인 리먼브러더스가 법원에 파산 신청을 한 2008년 9월을 앞뒤로 한 몇 개월을 다큐멘터리처럼 생생하게 묘사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월스트리트 5대 투자 은행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으면서 동시에 가장 공격적인 투자를 했던 베어스턴스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영향으로 무너진 2008년 3월부터 같은 해 10월, 즉 미국 정부의 금융구제안이 의회를 통과했을 때까지를 다뤘다.
그 시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미국 재무성, 월스트리트의 대형 로펌과 투자 은행, 예컨대 리먼브러더스, 골드만삭스, JP모건체이스 등을 움직이는 거물은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저자는 이런 질문에 답을 찾아 나선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 저자는 월스트리트의 심장부에 도청 장치라도 설치해 뒀던 걸까. 보통사람은 만나기도 힘든 금융계 거물들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어쩌면 그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지. 그건 알 수 없다. 저자는 광범위한 인터뷰와 자료 조사를 통해 '세계를 뒤흔든 8개월'을 복원해 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책에 실린 생생한 대화는, 대부분 누군가의 기억을 저자가 다시 다듬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약간의 '구라'가 섞여 있으리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
예컨대 리먼브러더스 CEO인 리처드 펄드(딕 펄드)의 어리버리한 모습, 재무성 관리들의 우유부단한 모습 등은 조금 과장됐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뒷담화'의 매력이다. 그리고 이 책의 미덕 역시 거기 있다.
현대의 연금술사들, 마법은 없다
저자의 금융계 거물들에 대한 '뒷담화'를 따라가노라면, 금융 위기를 낳은 다이너마이트인 파생금융상품들이 만만하게 여겨진다.
잘 알려져 있듯이, 파생금융상품 가운데 상당수는 이른바 '로켓 과학자'들이 만들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NASA(미국 항공우주국) 등 우주·군사 과학 분야에서 일하던 과학기술자들이 대거 일자리를 잃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금융공학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만든 금융 상품은 평범한 이들에겐 암호나 다를 바 없었다.
고도의 수학적 훈련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금융 상품을 만들어내는 금융공학자들은 '현대의 연금술사'였다. 고대 연금술사들이 돌을 금으로 바꿨다면, '현대의 연금술사'들은 '리스크 없는 이익'을 만들어 냈다. '증권'이 될 수 없었던 부동산, 채권, 지적 재산, 사업 기획안 등을 '증권'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리스크' 요소를 분리해서 정교한 수학적 기법으로 처리하는 게 비결이었다.
하지만 돌이 금으로 바뀌는 일은 자연계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눈속임만이 가능할 따름이다. 누구나 이걸 알게 된 것은 근대과학이 생긴 뒤였다. 마찬가지다. '리스크 없는 이익' 역시 환상이다. 리스크를 이리저리 떠넘길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렇게 떠넘겨진 리스크가 한곳에서 폭발하면 재앙이 된다. 2008년을 지나며, 누구나 알게 된 사실이다.
돌을 금으로 바꾼다던 연금술사들을 의심한 이들이 고대에는 없었을까. 아마 있었을 게다. 하지만 이들의 의심이 상식이 될 수 없었던 것은 연금술사들의 권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신비의 장막 때문이었다. 역시 마찬가지다. '리스크 없는 이익'이 가능하다는 현대의 연금술사들을 의심했던 이들은 2008년 이전에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의 의심은 인류의 상식이 될 수 없었다. 난해한 수학 기호의 권위를 들춰낼 수 없었던 탓이다.
"핵무기는 천재가 만들었지만, 발사 버튼은 바보가 누른다"
'뒷담화'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이 대목이다. 우리 시대 가장 총명한 이들이 만든 것, 그래서 보통 사람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파생금융상품이 실은 바로 옆 자리 동료나 이웃집 아저씨와 다름없는, 지극히 평범한 이들에 의해서 운용됐다. 예컨대 천재 과학자들이 만들어 낸 핵무기가 보통 지능을 갖춘 정치인과 군인들에 의해 운용됐듯 말이다. 저자의 '뒷담화'는 파생금융상품을 운용했던 금융계 수장들이 이들 정치인, 군인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파생금융상품 역시 평범한 시민들에 의해 통제돼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독자의 눈을 끄는 흥미로운 '뒷담화' 몇 가지. 잘 알려져 있듯이, 한국산업은행은 리먼브러더스 인수를 추진했다. 리먼브러더스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 산업은행 행장 민유성의 야심찬 계획이었다. 리먼브러더스는 협상 과정에서 산업은행 측에 부실을 떠넘기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민유성은 결국 뜻을 접었다. 이미 언론에 소개된 이런 과정 역시 '뒷담화'가 듬뿍 섞인 채 자세히 묘사돼 있다. 예컨대 이런 대목이다.
"하지만 민유성과 함께 일했던 리먼의 동료들은 그가 한국산업은행 행장이 될 만한 자질을 갖췄는지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한국산업은행의 직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그의 임명을 반대했다. 그런데도 그가 행장으로 임명되자 리먼 본사의 몇몇 동료들은 놀라움을 표했다. 서울에서 민유성의 전도를 막는 것은 없었다. (215쪽)"
월스트리트를 이끄는 백인 엘리트들이 동양인에 대해 가진 편견이 드러났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선진국에서 쌓은 경력을 국내에서 너무 높게 평가하는 것 역시 위험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미국 유명 투자 은행에서 일한 경력을 내세우는 한국인들 가운데 일부는 어쩌면, 미국 현지에서의 평판이 썩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이런 깨달음은 2008년 금융 위기를 다룬 '정사(正史)'에선 얻기 힘들 게다. 공개적인 '뒷담화'가 가진 긍정적인 힘이다.
"1997년 외환 위기 주범들에 대한 '뒷담화'를 기다린다"
여기서 다시 궁금증이 생긴다. 한국에서 기자들은 흔하디흔한 직업인데, 그리고 이들 역시 술자리에선 흥미로운 '뒷담화'를 끝없이 쏟아내는데, 왜 이런 책이 안 나올까.
우리 사회에선 2008년 금융 위기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없어서? 그건 아니다. 예컨대 우리에겐 1997년 외환 위기의 끔찍한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 당시 경제 부처를 출입했던 기자들만큼 '뒷담화' 소재가 많은 이들도 드물다. 그들은 왜 당시 한국 경제를 움직였던 거물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책을 쓸 수 없을까. 긴 호흡의 글을 쓰기 힘든 언론사 근무 여건, 협소한 출판 시장 등 여러 이유가 있을 게다. 하지만 어떤 이유를 들어도 석연치 않은 느낌은 남는다. 그래도 '뒷담화' 본능을 도무지 누를 수 없는 기자들이 몇 명쯤은 있을 텐데….
마침 서점에 가니,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경제부총리였던 강경식이 낸 회고록이 눈에 띈다. <국가가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김영사 펴냄)이라는 제목이다. 외환 위기 당시의 경험을 정면으로 다뤘다.
당시 경제 부처를 출입했던 기자들이라면, 이 소식만으로도 '뒷담화' 본능이 불끈 치솟지 않을까. <대마불사>를 능가하는 '뒷담화'가 곧 쏟아지리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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