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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 없는 그날까지, 계란에 쓰인 그 글씨보니 차마…"

[현장] 비정규직 싸움 '메카' 된 현대차 울산1공장

24일 오후 2시 울산 현대자동차 정문 앞은 금속노조 간부 결의대회를 위한 무대설치 작업이 한창이었다. 파업 초기만 해도 한산한 편이었던 이곳은 일주일새 전국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파업을 지지하는 단체들의 현수막들이 빽빽하게 들어섰다. 15일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점거한 공장이 임금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싸움의 '메카'로 떠오른 탓이다.

늦은 점심을 해결하려 인근 식당에 들르니 주인이 대뜸 "기자죠?"라며 "현대차 어떻게 잘 풀릴 것 같으냐"고 묻는다. 옆에 있던 이가 "연평도 터져서 정치인들도 거기로 다 달려갔을 텐데 여기는 희석 안 되겠나"라고 말한다. 식당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연평도 상황을 전하는 뉴스 특보가 식사 내내 이어지고 있었다.

당장의 여론은 연평도 포격 사태에 쏠려 있지만, 현대차 파업은 이미 큰 화제가 됐다. 현대차 정규직 노동자가 4만5000여 명에 비정규직은 1만 명에 가깝다. 배우자와 자식을 현대차에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보낸 이들이 한 둘이 아니기에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울산혁신네트워크가 울산사회조사연구소에 의뢰해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응답자 70% 이상이 현대차가 교섭에 나와야 한다고 했다. 절반이 넘는 이들이 현대차가 대법 판결에 따라 비정규직을 정규직화 해야 한다는데 동의했다.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소식은 해외에서도 화제다. 100여 개 국가의 금속노조 연합인 국제노련(Internaltional Metalworkers' Federation, IMF)는 24일 "울산의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파업을 이어가고 있다"며 국제노련 홈페이지 상단에 파업 경과를 상세히 전했다.

파업 10일차, 칠흑의 공장

파업의 핵심은 550여 명의 사내하청지회 노동자들이 점거한 현대차 울산 1공장이다. 농성장에 접근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파업 이후 정문을 컨테이너로 봉쇄한 현대차는 다른 문들도 버스를 이어 붙여 막아놓았다. 한 정규직지부 대의원의 도움을 받아 야간조 근무자들이 출입하는 쪽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오후 8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1공장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사람 하나 드나들 철문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사측이 이미 폐쇄했다. 지난주부터 멈춰선 라인을 따라 계단 쪽으로 향했다. 정규직지부 대의원들이 계단에 촘촘히 앉아 있었고, 맞은편엔 마스크를 쓴 관리자들이 열을 지어 앉았다. 농성장을 지켜주는 정규직지부와 관리직들의 긴장은 지난 15일부터 한시도 쉬지 않고 진행 중이다.

이날 농성장엔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졌다. 사측이 오전부터 전기를 끊은 것. 정규직 대의원과 관리자들이 있는 1층과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중간까지는 불이 들어왔지만 농성장에 들어서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펼쳐놓은 노트북과 휴대전화 조명으로도 사물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한 대의원이 랜턴을 켠 후에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전기가 다시 들어온 시각은 자정에 가까워졌을 즈음이었다.

이날 사측은 음식물 반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정규직 대의원들이 하루에 두세 시간씩 몸싸움을 벌여 음식물을 농성장에 넣었지만 이날만큼은 관리자들도 완강했다. 결국 이날 공장 밖에 있는 조합원과 가족들이 준비한 김밥은 들어오지 못했다. 침낭 반입 역시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아 조합원들은 비닐봉지 안에 들어가거나 몇 명씩 모여 몸에 비닐을 두르고 잠을 청해야 했다.

▲ ⓒ프레시안(김봉규)

하루에 두 끼로 연명하는 탓에 오전 늦게 아침을 먹고, 밤늦게 저녁을 먹는다. 조합원들은 어둠 속에서 컵라면에 물을 받았다. 기자에게도 컵라면 하나가 돌아왔다. 농성하는 조합원들은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자정을 조금 넘길 즈음 "비상!"이라는 외침과 함께 몇몇 조합원들이 계단 입구 쪽으로 뛰어나갔다. 음식 반입을 놓고 하루 종일 신경전을 벌리던 정규직 대의원과 관리자 사이에 기어이 시비가 붙은 것. 한 대의원이 관리자들을 향해 이름이 적힌 표찰을 달라고 지적했는데 욕설로 대꾸하면서 몸싸움이 날 뻔했지만 서로 곧 물러났다. 지난 20일 황인하 조합원이 정문 앞 집회에서 분신한 후 사측은 큰 충돌을 일으키지 않았다.

'비상'은 새벽에도 걸렸다. 1공장으로 출근한 대의원이 들고 있는 가방에서 과자 몇 봉지가 나오자 음식물 반입이라고 관리자들이 제지한 것. 큰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24시간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는 대의원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 대의원은 "관리자들이 우리를 자극하기 위해 사소한 것부터 트집을 잡으면서 자는 것까지 방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측은 농성장을 보호하는데 앞장선 몇몇 대의원에게도 손해배상을 청구하며 협박 문자를 보내고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아름다운 연대", 교섭으로 이어질까

▲ ⓒ프레시안(김봉규)
'해프닝'성 돌발 상황을 제외하면 농성장 안은 고요하다. 화장실 앞에 붙여놓은 한 조합원의 편지는 "투쟁 9일째,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장 안"이라고 시작한다. 언제 상황이 급변해 사측과 경찰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긴장은 여전하지만, 파업에 대한 논의와 갈등은 공장 밖에서 더 급격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점거 농성을 이끌고 있는 이상수 지회장은 24일 처음으로 농성장을 떠났다. 금속노조와 정규직지부, 전주‧아산 비정규직 지회와 함께 사측과 협상을 벌일 수 있는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이날 저녁 늦게 열린 회의는 6시간을 끌었고, 이 지회장은 자정을 훌쩍 넘겨서야 돌아왔다.

농성 참가자 고용승계와 징계, 고소‧고발, 손해배상 철회, 불법 파견 교섭을 위한 대책 마련 등 큰 틀은 잡았지만 실제 교섭 창구가 열릴 지는 불확실하다.

실질적으로 교섭 창구를 열 수 있는 힘이 정규직지부에 있기에 상황은 더욱 묘하게 꼬이고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불법 파견' 해결을 파업의 핵심으로 보고 있지만, 정규직지부는 농성 자체의 원만한 해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이경훈 현대차지부장은 25일 오후 2시30분경 먹을거리를 들고 농성장을 찾았다. 관리자들이 막아섰지만 "오늘만큼은 '신사협정' 한번 해보자"는 이 지부장의 말에 5분 만에 물러났다. 이 지부장은 농성 중인 조합원들을 향해 "대의원들도 잠을 못잔 채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물리력으로 농성을 해산시키면 노사를 파국이다"라고 말했다.

파업이 교섭 준비 국면으로 들어서면서 지도부도 조합원들도 말을 아끼고 있다. 가족과 통화하거나 편지를 쓰고, 스마트폰이 있는 이들은 트위터로 시민사회가 연대해 줄 것을 호소한다. 한 조합원은 "처음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자라는 마음에 시작해서 파업장 소식을 전하니 반응도 좋았다"며 "요새는 민감한 사안도 많고 사측이 현장 모습을 모니터링할 수도 있어서 연대해 달라는 글 정도만 쓰고 있다"고 말했다.

▲ ⓒ프레시안(김봉규)
이 때문인지 소소한 일들도 감동을 느끼는 일이 잦다. 25일 자정 즈음에 농성자 가족들이 올려준 삶은 계란 껍질에는 가족들이 적어놓은 메모들이 있었다. "'비'자 없는 그날까지 투쟁", "자기야 사랑해요, 파이팅!"

삶은 계란을 올려준 대의원은 "대의원들도 배가 고파서 한두 개 집어먹으려 했는데 글씨를 보고 차마 먹을 수가 없더라"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에는 쟁의대책위원회가 '3주체(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비정규 3지회) 논의 내용'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반가운 얼굴' 나타났다.

파업의 시발점이 된 시트부 점거 농성을 주도하다 연행됐던 전태곤 시트사업부 대표가 사측의 허락을 받고 공장 안으로 들어온 것.

올라오자마자 시트부 조합원들을 찾아간 그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공장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다른 공장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며 "이번 불법 파견 투쟁은 영원히 기억되는 싸움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가운 만남이 있었다면 아쉽게 동료를 떠나보내는 일도 있었다. 농성장을 지키던 정규직지부의 박성락 대의원이 주말에 결혼을 하게 된 것. 박 대의원은 농성장에 올라와 "(결혼 날짜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었다"며 "잠시 자리를 비우게 돼 편하지 않지만 부디 아프거나 다치지 말고 파업 첫날의 마음 변하지 않도록 하루하루 기도하겠다"고 말했다. 조합원들은 그에게 결혼 선물로 나무를 깎아 만든 솟대를 줬다.

▲ ⓒ프레시안(김봉규)

오후 6시경 공장 밖에서 선무방송이 시작됐다. 현재 파업이 위반하고 있는 법 조항과 형량을 언급하며 일찍 나올 경우 그만큼 선처하겠다는 내용이다. 한번 시작하면 2시간은 지속된다는 방송이 10분도 안 돼 툭 끊겼다. 계속되는 선무방송에 대의원 한 명이 나서 앰프 연결선을 끊어버린 것. 사태 해결의 실마리는 아직도 불분명하지만 파업 11일차는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저물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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