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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삼성생명? 무섭지 않다. 진짜 두려운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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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삼성전자? 삼성생명? 무섭지 않다. 진짜 두려운 건…"

[대담] 삼성비리 양심고백 3주년…김용철과 김상조의 만남

본래의 뜻을 잃어버린 말이 넘치는 때다. 예컨대 이명박 대통령은 '공정사회'를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쓰인 '공정'이 본래의 뜻 그대로라고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인의 말이 곧이곧대로 통하지 않는 이유는 누구나 안다. 말과 실천의 불일치. 누가 봐도 불공정한 결정을 내린 대통령이 공정을 이야기한다. 이래서는 말과 글의 권위가 설 수 없다. 뜻을 잃어버린 말은 힘도 없다.

대기업 수사가 한창이다. 한화, 태광, C& 등 대기업 관계자들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재계는, 본보기로 회초리를 맞는 친구를 지켜보는 아이들처럼 움츠린 분위기다. 물론 이런 수사로 고질적인 기업 비리가 뿌리 뽑힌다면 반길 일이다. 그러나 대기업 수사를 말 그대로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드물다.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 때문이다. 지금 수사를 받는 기업들이 저지른 비리를 똑같이, 다만 규모만 더 크게 저지른 기업이 있다. 그런데 그 기업은 노골적인 봐주기 수사를 받았고, 일부 기소된 내용도 면죄부 판결을 받았으며, 그나마 확정된 유죄마저 사면 받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삼성 비리 이야기다. 이런 기억이 생생한데, 지금 진행되는 수사가 권위를 지니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저런 수사(搜査) 명분은, 그저 수사(修辭)일 뿐, 아무런 힘이 없다.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지낸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한 게 2007년 10월 29일이다. 삼성 특검의 수사와 재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 날 나온 대법원 판결, 이건희 회장 사면과 경영 복귀, <삼성을 생각한다> 출간 등으로 이어진 이후 과정은 국민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비자금 조성 및 탈세, 정·관·법조·언론계에 대한 불법 로비, 경영권 불법 세습, 노동자 탄압 등 삼성 비리의 내용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됐지만, 비리 주범들은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그런데 똑같은 비리를 저지른 다른 기업만 수사한다면, 수사를 받는 쪽 역시 승복할 리 없다. '우리가 힘이 없어서', '삼성처럼 했어야 했는데, 우린 권력층에 뿌린 뇌물이 부족했나보다'라는 식의 생각만 번질 수밖에. 3년 전 김용철 변호사가 던진 숙제를 우리 사회가 제대로 풀지 못한 대가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이 김용철 변호사를 다시 만났다. 김 변호사의 양심고백 이후, 김 소장은 삼성 비리를 치밀한 논리로 분석하고 비판해 왔다. 삼성은 면죄부를 받고, 대기업 비리는 여전한 현실에 대해 누구보다 답답해할 사람이다. 하지만 김 소장이 꼭 절망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 소장은 돌이키기 힘든 제도적 변화가 조금씩이나마 쌓이고 있다고 했다. 10년 전보다는 분명히 나아졌고, 앞으로 30년 뒤에는 훨씬 건강한 경제 질서가 만들어지리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물론, 거기에는 대가가 있다. 김 소장은 이날 "이 일(재벌 개혁 운동) 시작하고나서, 인간관계가 많이 드라이(건조)해졌다"고 말했다. 삼성과 이런저런 인연으로 묶인 이들이 워낙 많은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에 대해 법치가 공정하게 적용돼야 한다는 목소리는 아무래도 고립되기 쉽다. 김 변호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심고백 이후, 그동안 쌓아 왔던 인간관계가 다 끊어졌다고 했다. "진보적인 사람들도 자식을 삼성에 취직시키고 싶어한다"는 말도 했다. 우리 사회에서 '삼성 바로세우기'를 하려는 이들에게 필수적인 덕목은 '정당한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 게다. 지난달 29일,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김 소장과 김 변호사가 나눈 대화를 간추렸다. <편집자>

"양심고백 고백 3년, '삼성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점만 확인했다"

김상조 : 오늘(10월 29일)은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리를 고발하며 양심 고백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김 변호사의 용기 있는 행동이 우리 사회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되묻게 된다. 요즘 여러 그룹에서 비자금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지고 있다. 하지만 수사는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 역사가 한 걸음 나가기가 이렇게 어려운가 싶어 안타깝다.

김 변호사는 내부고발자로서 많은 개인적 고통을 치렀다. 한국 사회가 김 변호사에게 빚이 있다고 본다. 김 변호사가 우리에게 주었던 그 소중한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김용철 : 벌써 3년이나 됐나. 나는 모르고 있었다. 다 끝난 줄 알고 까맣게 잊었다. 삼성, 모두가 잊고 싶어 하는 주제 아닌가. 삼성과 인연을 맺은 지도 13년째다. 1997년 삼성에 입사해 2004년에 회사를 그만뒀고 2007년에 이 문제(삼성 비리)를 얘기했다.

인간 사회에서 범죄는 언제나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했다는 선진국에서도 비자금이나 뇌물 문제는 똑같이 터진다. 다만 사후 처리가 다르다. 선진국은 제대로 된 징벌을 내린다. 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했다. 삼성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권력 체계가 생겼다. 이 점이 안타깝다. 특검 수사까지 했지만 '특검은 삼성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만 검증하고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 가끔 우울해진다. 하지만 돌아보면, 내가 그동안 과분한 대접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나는 한때 너무 잘 살고 잘난 척했다. 이랬던 내가 지금도 좋은 대접을 받는다. 주차장에서 주차비 안 받겠다는 경우도 있다. 어떤 해장국집에선 사장님이 나를 알아보고 선지를 더 넣어줬다.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받는 지지와는 다른, 기분 좋은 대접을 개인적으로 받는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내게 빚진 게 있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다만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는 점에서 좌절을 느낀다. 내 싸움은 삼성 비리 문제가 얼마나 중대하고 해결하기 힘든 문제인지를 검증하는 절차였다.

"진짜 두려운 것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력"

▲ 김용철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김상조 :
앞으로는 모든 기업들이 자신들의 비리 사건에 대해 '우리도 삼성처럼 대우해달라. 왜 우리한테만 까다롭게 구느냐'고 할 게다. 삼성 비자금 수사는 삼성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법체계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신뢰에 관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게 무너졌다.

김용철 : 사법부와 행정부, 언론, 금융감독기구 모두가 삼성 앞에서 무력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에 맞서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불매 운동'이다. 강연에서도 소비자나 주주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방법들이다.

외신기자들 앞에서 '삼성 문제는 한국에서 근본적인 거악(巨惡)의 문제'라고 했다. 북유럽 연기금 투자기관이 삼성에 투자한다면, 이는 한국에 피해를 주는 기업에 투자해서 수익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심하게 말하면 범죄에 공모해서 이익을 얻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도 했다. 그래서 유럽 투자자에게 삼성 투자를 재고해달라고 했다. 이런 말은 사실 '매국노' 취급당할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조차 별 반향은 없었다.

김상조 : '삼성 이익에 훼손되면 매국노'라는 인식이 '이건희 왕국'을 존속하게 하는 가장 큰 힘이다. 삼성이 계열사 주식에 과다 투자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 법안을 입법청원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한 언론이 그 법안은 국내 자산운용사에 대한 역차별이라며 반박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자산운용사는 삼성자산운용밖에 없다는 말인가. 삼성과 한국을 동일시하는 생각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삼성에 좋은 것이 한국에도 좋은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극복하는 것이다. 흔히 삼성전자의 생산성과 삼성생명의 자금력이 대단하다고들 하는데, 사실 그건 두렵지 않다. 진짜 두려운 것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이데올로기적 지배력이다.

1997년 외환위기 전에는 삼성 그룹도 5대 재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에는 국가 권력도 견제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어느새 한국의 역동성과 민주적 질서를 위협하는 요소가 됐다.

'삼성의 경영성과가 좋지 않으냐, 지배 구조의 문제가 있어도 삼성을 존경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삼성의 놀라운 경영성과는 삼성 임직원이 열심히 일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삼성이 환율 정책, 공정거래 정책 등 국가 정책을 왜곡하면서 챙긴 부당한 이익도 많다. 삼성 특유의 하도급 거래 관계 때문에 중소기업들이 입은 피해도 크다. 결국 삼성의 성과는 다른 경제주체의 희생과 피해를 기반으로 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삼성이 잘돼도 그 성과가 다른 국민의 경제적 이익으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삼성전자가 수출을 많이 해서 세금도 많이 낸다. 그게 한국을 먹여 살리지 않느냐'고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삼성이 세금을 얼마나 내는지 따져봤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법인세율이 24% 정도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내는 실효법인세율은 11%에 불과하다. 법인세법상 정해진 세율의 반도 안 낸다. 이에 비해 중소기업은 명목세율은 낮지만 실질세금은 더 많이 낸다. 조세 정책을 비롯한 모든 국가정책이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에 유리하도록 편향돼 있다. 삼성이 세금 많이 내기 때문에 서민이 혜택을 누린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정확한 '팩트(Fact. 사실)'를 바탕으로 재벌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왜 삼성생명에 보험금을 맡기는가?"

▲ 김상조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철 :
삼성이 성장하면서 생산 공장의 70%를 외국으로 이전했다. 이는 삼성이 성장해도 고용창출 효과가 별로 없다는 말이다. 금융 부문에선 삼성의 시장 점유율이 50%가 넘는다. 삼성은 금융사마다 조 단위로 흑자를 낸다. 이는 국부 창출과는 거리가 먼 이익이다.

사람들에게 왜 삼성 카드를 쓰느냐고 물으면, 포인트를 주기 때문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조금 다른 면을 볼 필요가 있다. 삼성은 가맹점 수수료가 다른 데보다 1% 이상 높다. 포인트 가맹점은 다른 회사보다 1.5%나 비싸다. 영세가맹점은 각종 수수료를 떼이고 나면 남는 게 없다. 소비자는 0.5%를 더 받기 위해 삼성 카드를 쓴다. 따지고 보면, 삼성이 영세가맹점을 상대로 '고리 뜯기'하는 데 소비자가 협조하는 셈이다. 삼성 불매 운동은, 소비자들이 각성해서 이런 횡포를 근절하자는 것이다.

<프레시안>에서 삼성생명이 보험금 불지급률을 인위적으로 높이기 위해 온갖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관련 기사: 삼성생명의 비밀…"고객 정보 불법 확보·로비 있었다")사실 나도 놀랐다. 고객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 위해 그토록 조직적인 노력을 한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하긴, 삼성화재는 비자금을 만들기 위해 미지급 보험금, 렌트카 비용까지 떼먹었다. 문제는, 이런 회사에 보험금을 맡기는 사람이 전체 보험 소비자의 절반이 넘는다는 점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김상조 : 금융소비자 보호 문제 때문에 통계자료를 조사한 적이 있다. 지난 5년 동안 금융사 전체 피소사건의 80%가 보험회사 사건일 정도로 보험회사의 부당행위가 흔하다. 피소당할 때마다 금융회사가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하는 통에, 소액 심판 제도는 금융회사 채권추심을 위해 점령된 형국이다. 보험 회사가 사법질서를 오남용 한다.

궁극적으로 소비자, 시민이라 불리는 우리 모두가 이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바꿀 수 있다. 다만 방식에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게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행동이나 인식을 바꾸기 위해서는 의무감을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인센티브 설계'가 중요하다. 그 일이 좋아서 하게 만들거나 경제적 이익이 돼야 한다. 아니면 그 일을 안 하면 불이익을 주거나 말이다.

현재 상태가 지속되면 기업, 사법부, 감독 당국, 언론기관 등이 결국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경제개혁연대가 소송 등 법적 수단을 주로 활용하는 것은 그래서다. 더디지만 성과가 쌓이고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분명히 더 나아졌다. 그리고 30년 뒤에는 많이 나아져 있으리라고 본다.

이처럼 되돌리기 힘든 법적·제도적 변화가 쌓이면, 삼성과 같은 기형적인 지배구조는 유지될 수 없다. 삼성의 지배체제가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흔히 북한의 3대 세습 체제가 지속될 수 없다고들 하는데, 삼성 역시 마찬가지라고 본다.

광고로 언론 통제하는 삼성, 자생력 약한 진보언론

김용철 : 삼성 경영권이 이병철, 이건희, 이재용으로 형식상으로는 넘어갔다. 그래서 별 문제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은 결국 변하게 돼 있다. 영원한 권력은 없다. 삼성은 어떤 식으로건 영향력이 축소될 것이다. 승계 과정에서 분할되는 것도 피할 수 없다.

삼성이 국가기구를 능멸하고 제압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삼성도 공권력이나 국민을 무서워한다는 뜻이다. 어디서 문제가 샐지 몰라서 두려운 나머지, 공무원이나 언론을 장악하려 그토록 애쓰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언론과 시민단체만 있다면 희망이 있다. 안타까운 점은 그나마 삼성을 견제할 수 있는 진보언론이 광고를 재벌에게 의존한다는 점이다. 삼성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언론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하는 게 우리 사회의 숙제라고 본다.

김상조 : 얼마 전에 삼성이 언론사에 지급한 광고비를 조사한 적이 있다.(☞관련 기사: '삼성 비자금' 양심선언의 최대 수혜자는 '조·중·동') 먼저 김 변호사가 내부고발하기 이전에 삼성이 언론사에 준 광고비를 따져봤다. 한겨레, 경향신문보다 한국일보가 받는 게 약간 많았고, 조선·중앙·동아일보가 받는 광고비는 한국일보보다 두 배쯤 됐다.

하지만 양심선언 사건 이후 한겨레, 경향신문은 광고비가 뚝 끊겼다. 한국일보, 조·중·동과의 광고비 격차가 확 벌어졌다. 옛날에는 언론사 규모에 따라 대충 광고를 줬는데, 이제는 삼성이 어느 언론사에 광고비를 줄지 선택하고 삼성에 비판적인 언론은 배제하는 전략을 노골화했다.

광고비로 월별 그래프를 그려보면, 유난히 광고비 지출이 늘어난 달이 있다. 이건희 회장의 1, 2, 3심 및 파기 환송심 재판이 열리는 날, 이 회장이 사면되던 날, 이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던 날을 전후해서 삼성이 조·중·동에 지불한 광고비가 급격히 오른다. 언론을 광고비로 통제하는 것이다. 언론만 통제하면, 문제가 없다는 마인드다. 그러나 이런 구조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는 보지 않는다.

이야기를 바꿔보자. 이학수 전 부회장 등 이건희 회장의 가신집단이 지난 광복절에 모두 사면됐다. 주범을 풀어줬으니 종범도 풀어줘야 한다는 게 대통령의 논리였다. 곧 있을 연말 인사에서 옛 전략기획실이 어떤 식으로건 부활할 것이다. 삼성 그룹이 회장-전략기획실-계열사 사장단이라는 삼각편대 방식으로 복귀한다는 이야기다.

▲ 김용철 변호사(사진 왼쪽)와 김상조 소장(사진 오른쪽)ⓒ프레시안(최형락)

"이건희 회장도 어쩌면 허수아비 춤을 춘 게 아닐까"

김용철 : 조직 문제는 말해도 소용이 없다. 회장실, 구조조정본부, 비서실, 전략기획실 등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어차피 법률적으로는 실체가 없는 조직이다. 책임도 없는 조직이다. 삼성 전략기획실에서 일하면서 나도 문서상이든 구두상이든 흔적을 남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만일 실수로 문서에 '비서실의 지시에 의거'라는 흔적을 남기면 계열사 감사가 와서 바로 징계했다. 전략기획실은 내부적으로도 보이지 않는 조직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복귀하기 전이나 후나 가신들의 위상이나 역할은 변동이 없다. 다만, 자신들이 좀 더 당당해도 되겠다는 방자한 태도를 보인 것뿐이다.

중앙일보가 대국민 계열 분리 선언을 세 번쯤 했다. 그런데 중앙일보와 삼성이 관계없다고 할 수 있나? 마찬가지다. 이 회장의 가신들이 명함을 만들고 조직을 만드는 것은 지엽적인 문제다. 전략기획실 등 가신 조직은 명시적으로 존재한 적도 없고 해체된 적도 없는 조직이다.

회장과 가신들은 공범 관계다. 그래서 배신할 수도, 버릴 수도 없다. 이학수나 김인주는 단순한 봉급쟁이가 아니다. 이 회장과 이들의 관계를 주범과 종범 관계로 보는 논리는 잘못이다.

김상조 : 조정래 작가가 <허수아비 춤>이라는 소설을 썼다. 국민과 관료들이 재벌에 놀아난다는 의미에서 '허수아비 춤'이라는 제목을 달았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삼성을 진짜 움직이는 사람이 누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중심에 있는 사람은 이건희 회장이다. 하지만 모든 일을 기획하고 집행하고 허위로 보고하는 것은 이학수 부회장을 비롯한 가신들이다. 어쩌면 이들에 의해 국민뿐 아니라 이건희 회장도 허수아비 춤을 춘 것은 아닐까.

"삼성식 비자금 야전교범, 너도나도 따라한다"

김용철 :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이 회장 본인이 원한 결과다. 그는 서류에 결재도 하지 않고 책임지지도 않았다. 유사시에 보고를 받은 적도 없다. 공식적으로 이 회장은 비자금 문제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 법률상으론 나중에 보고받은 것은 범죄구성요건이 안 된다. 이건희 자신이 철저한 보호막을 치기 위해 이학수와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 다른 기업에서는 회장이 직접 결재해서 덜미를 잡히는 예가 있다. 비자금을 만들 때 결재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삼성한테서 보고 배워야 한다(웃음).

김상조 : 3년 전, 김 변호사는 자기 명의의 차명계좌를 공개했다. 최근 태광·한화·C&그룹 등에서 동시에 비자금과 차명계좌 문제가 불거졌다. 대기업의 비자금 문제는 왜 사라지지 않을까?

김용철 : 삼성 사건에서도 대형 비자금이 나왔지만 "선친으로부터 남몰래 물려받은 돈"이라는 해명으로 넘어갔다. 상속세 시효는 끝났고, 증여세 포탈, 주식 양도세 포탈만 적용돼서 세금 내고 끝냈다.

이게 비자금을 은폐하는 좋은 선례가 됐다. '세상에 드러나서 문제가 되면 세금 내면 된다. 뺏기는 일은 없다. 선대의 상속 재산이라고 주장하면 문제없다'고들 생각한다. 실제로 비자금 관련 수사를 받는 모든 기업이 다 이렇게 주장한다. 한마디로 비자금 문제의 야전교범이 된 것이다. 선례가 생긴 이상, 기업들은 계속 비자금을 만들 것이다.

2007년 양심고백 당시, 한 언론이 "규제 천국, 비자금은 정당방위다"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정당방위는 현재의 급박한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해야 할 때만 쓰는 논리다. 이 논리를 비자금 문제에 적용하면 현재의 급박성, 계속되는 위험이 기업에 있다는 주장이다. 언론이나 관료가 기업을 망가트리겠다고 협박하는 상태가 있기 때문에, 비자금을 만들어 갖다 줬다는 논리다. 그러나 정치자금으로 쓰인 돈은 전체 비자금의 0.1%도 안 될 거다. 자신의 탐욕을 위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 한국처럼 규제 없는 나라가 어디 있나.

허점 투성이 금융실명제법이 그대로인 이유"국회의원도 비자금이 필요하다"

김상조 : 비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금융실명제를 완해야 한다. 부동산실권리자명의등기에 관한 법률과 비교하면 금융실명제의 문제점이 잘 드러난다. 우선 부동산실명법은 실명으로 등기해야 할 의무를 거래당사자에 부여한다. 금융실명제법은 이 의무를 금융회사에 넘긴다. 법의 출발점부터 다르다.

둘째로 부동산실명법에는 "명의 신탁 약정은 무효"라고 적혀있다. 반면, 차명계좌는 실제 명의자의 것이라는 게 대법원 판례다.

마지막으로 부동산실명법에서는 명의 신탁한 경우에 부동산 가격의 30%를 과태료로 문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법엔 차명계좌를 만들어도 과태료가 없다. 단, 비밀보장 의무를 위반한 경우 징역형이나 벌금형에 처한다고 돼 있다. 금융 실명제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 금융거래 비밀보장을 강제하는 것이다.

불법재산이나 자금세탁과 관련된 금융거래정보를 수집할 수 있도록 한 '특정금융거래정보 보고 및 이용법(FIU법)'도 허점이 많다. 국회가 법을 개정할 수 있는데도 안 한다.

얼마 전 한 국회의원이 의원이 아니던 시절에 사무실 운영비용을 받았던 게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문제가 됐다. 법을 만든 국회의원도 차명계좌가 필요할 것이다. 이들의 필요성 때문에 금융실명제법이 부동산실명제보다 훨씬 허술한 상태로 방치됐다. 금융실명제법 개정안 입법 청원을 했는데 이번 기회에 법도 바꾸고 제대로 집행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시장 질서 안 잡힌 한국, 깨끗한 M&A가 없다"
▲ 김상조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철 : 대검찰청 중수부가 진행하는 C&그룹 수사를 놓고 말이 많다. 범죄가 있으면 규모가 크든 작든 수사 제대로 해야 한다. 센 놈을 봐줬으니 약한 놈도 똑같이 봐달라는 논리는 성립할 수 없다. 혐의 내용은 비슷한데 C&그룹과 삼성그룹 수사가 너무 대조적인 것은 사실이다. 삼성 수사 때와는 다르게 C&사주부터 바로 구속했다. 게다가 C&처럼 작은 기업을 대검중수부가 맡고 한화처럼 덩치 큰 기업은 지검이 맡았다.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보지 않고는 납득하기 어렵다.

김상조 : 한화, 태광, C& 등에 대한 수사가 시작됐을 때, 처음에는 대통령이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 기업 비리도 제대로 조사하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업의 로비대상인 야당인사에 대한 사정 의도가 있는 방향으로 변했다.

며칠 전에 이런 농담을 들었다. "공정한 사회는 공무원이 정하는 사회다." 범죄는 모두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러나 야당에 대한 사정 의도를 가지고 기업 수사를 한다면 결국 이를 바라보는 국민이나 당하는 기업의 시선은 곱지 않을 것이다. '야당탄압이고 당하는 기업만 억울하다'는 식으로 법 집행에 대한 불신을 낳을 수 있다. 이게 진짜 문제다.

최근 수사가 진행되는 세 그룹 사건의 공통점을 찾아봤다. 규모와 업종, 총수의 행태가 다 다르다. 그러나 세 그룹은 최근 M&A로 기업 규모를 키웠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화는 대한생명을 인수했고, 태광은 티브로드를 통해 케이블 산업에서 최대 강자가 됐으며, C&그룹은 워크아웃 기업들을 주워 담아 몸집을 키웠다.

한국에서 기업이 M&A를 통해 빨리 규모를 확장하려 할 때는 여전히 로비가 필요하고, 이를 위해 비자금을 조성할 필요가 생긴다는 뜻이다. 그러다 기업이 어려워지면 이를 무마하려고 또 로비하게 된다. 시장질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게 비자금 수요를 늘리는 요인이다.

외국에선 유죄 판결 받은 사람이 금융기관 대주주가 될 수 없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배임죄에 걸린 사람, 즉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의 대주주가 될 수 없다. 하지만 한국 보험업법에는 대주주가 된 이후에는 자격을 심사하는 제도가 없다. 배임과 조세포탈로 유죄 판결을 받았어도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동태적 적격성 심사'를 하는 업종은 은행과 저축은행밖에 없다. 보험, 증권회사에는 이 심사가 없다.

이호진 태광 회장은 이런 제도적 맹점을 잘 활용했다. 이 회장이 불법 대출로 벌금 500만 원을 선고받았다. 금융기관의 대주주 될 수 없는 조항을 피하려고 태광산업을 내세워 쌍용화재를 대신 인수하고 나중에 다시 돌려받은 거다. 미국의 보험법을 적용하면 태광산업의 대주주인 이호진 회장은 쌍용화재를 인수할 수 없다.

"왜 메시지는 무시하면서, 메신저만 쳐다보나"

김용철 : 최근 대기업 수사는 기왕 시작됐으니, 철저히 했으면 한다. 설령 정치적 의도가 있는 수사라고 해도 말이다. 칼날 방향은 계속 바뀌게 돼 있다. 칼질하는 사람은 나중에 자기 칼에 다친다. 다음에 기회가 올 것이다.

김상조 : 비자금 등 기업 범죄는 내부 고발자 없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김 변호사의 용기있는 결단이 없었다면, 우리는 삼성 비리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수 없었을 게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이 김 변호사를 가리켜 배신자라고 비난한다. 하지만 김 변호사가 삼성에서 100억 원을 받아서 잘 먹고 잘산다는 말은 거짓이다. 오히려 김 변호사는 지금 여러 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있다. 김 변호사를 볼 때마다 부채의식이 드는 이유다.

김용철 : 내가 지금까지 공익 제보한 사람 중에서 유일하게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도 구속이 안 됐으니 이것도 특혜다. 어차피 세상은 수많은 사람의 희생을 통해 발전한다. 선진국에서는 제보자 보호 제도가 있다. 우리 사회는 아직 그 정도의 유가 없다. 각자의 생존은 각자의 책임에 맡겨져 있는 게 한국이다.

몇 달 고민 끝에 배신자, 변절자가 되기로 했다. 욕먹을 각오는 했다. 비밀유지의무라는 변호사 윤리를 어기게 된 문제도 내 나름대로 정리됐다. 그러나 단지 배신자라고만 욕하는 사람은 다른 문제를 덮는 꼴이다. 대형범죄는 입 다물면서 왜 남의 윤리의식에 대해 얘기하는지 모르겠다. "너 사치했잖아. 돈 많이 벌었다며?" 이런 식이다. 비난해도 좋다. 다만 국가를 좀먹는 대형범죄에 대해서도 똑같이 비난해줬으면 한다. 고발자의 도덕성을 비난하는 만큼 기업범죄에 대해서도 비난해 달라.

김상조 : 상식의 최대가 도덕이고 최소가 법률이다. 우리 사회는 상식의 최소인 법률조차 안 지키면서, 남에게는 법률 준수할 뿐 아니라 도덕도 지키라고 요구한다. 내부고발이나 공익제보에 대해 우리는 메시지가 아니라 메신저에만 주목한다. 메시지는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메신저만 비난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는 메시지를 더 봐야 한다.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가 고발 이후에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시급하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를 좀먹는 숨은 범죄가 햇볕 아래 드러난다.
▲ 김용철 변호사. ⓒ프레시안(최형락)

김용철 : 올해 초,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왔을 때 사회적 발언은 끝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더는 없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동안 온갖 강연에 불려 다니느라 피곤하게 지냈다. 이걸로 내 역할도 끝난 줄 알았는데, 살다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하는 게 옳다고 본다. 이렇게 말하면, 정치할 거냐는 말이 나오는데, 그건 절대 아니다. 나는 체질적으로 정치랑 맞지 않는다.

요즘은 전남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배운다. 아직 강의도 몇 번 안 들은 신입생이다. 한편으론 '현실도피'라는 생각도 들지만, 공부하는 게 좋다. 다만 체력과 여건이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철학과에 가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그저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게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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