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문제는 시장 자유에 맡겨야 해결된다'는 신자유주의 신화가 무너진 지금, 과잉 유동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선진국과 신흥국의 갈등은 정치적 무대로 넘어오게 됐다. 당장은 다음달 서울에서 열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첫 격전지다. 2008년 금융위기의 두 번째 장은 아직 열리지 않았다.
제3의 불황
금융위기 사태가 터진 후, 세계 석학들의 전망은 일관됐다. '당장은 대량의 유동성 공급이 필요하며, 경기 회복기를 지나 인플레이션이 문제 되기 전에 유동성을 환수해야 한다'는 것. 나눠보면 유동성 공급이 위기 극복의 첫째 단계고, 환수는 다음 단계인 셈이다.
최근 일본은행(BOJ)의 조치는 '위기 1막'이 여전히 진행 중임을 상징한다. 지난 5일 일본은행은 4년 3개월 만에 제로금리를 부활시키고(기준금리 0.1%에서 0~0.1%로 인하) 5조 엔에 달하는 대규모 자산매입기금을 설립키로 했다. 이에 따라 금융위기 이후 일본이 시장에 퍼부은 유동성 총액은 35조 엔, 우리 돈으로 473조 원(100엔당 1350원 기준)에 달하는 막대한 규모가 됐다.
미국도 조만간 유동성 공급을 위한 추가 조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금융권은 이미 지난해만 1조7250억 달러(1897조 원)를 시장에 쏟아낸 미국이 조만간 최대 1조 달러에 달하는 유동성을 추가로 시장에 풀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실제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 의장은 지난 4일(현지시간) 로드아일랜드에서 열린 대학생 포럼에서 "효과를 정확히 가늠하지는 못한다"고 전제하면서도 "미 국채를 추가 매입할 경우 금융 여건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을 가질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 역시 마찬가지다. 유로화를 사용하는 16개국의 유로존은 내년 1월까지로 돼 있던 '무제한 유동성 공급 시한'을 11개월 늘려 내년 말까지 연장키로 했다.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주 국채 13억8400만 유로를 매입했다.
그럼에도 경제회복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과 일본의 성장률 전망치를 크게 하향조정하고, 이에 따라 내년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도 4.3%에서 4.2%로 내렸다.
2년이 넘게 이어지는 현 국면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미 '제3의 불황이 코 앞'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이번의 전 지구적인 유동성 증가정책도 위기 극복에 별다른 실마리를 제공하지 못하리라는 얘기다.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가 이미 이와 같은 입장에 섰다. 크루그먼 교수에 따르면 미국의 기록적인 실업률은 이제 막 바닥에 도달했을 뿐이다. 장차 미국과 유럽은 일본식 디플레이션 함정에 걸릴 위험마저 안고 있다. (☞관련 기사 : 크루그먼 "제3의 불황은 이미 시작됐다")
페달 밟지 않으면 쓰러진다
이와 같은 시각은 늘어난 유동성에 따라 급락하고 있는 미국 국채금리 또한 새로운 시선으로 지켜보게 한다. 단순히 미국 경제에 대한 신뢰가 커져서가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국채 가격을 밀어올렸다는 의미다.
지난달 30일 방한해 '체제적 공포, 현대 금융,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제목의 논문을 요약발제한 조나단 닛잔 캐나다 요크대학 정치학 교수가 이와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그는 자산의 미래가치를 현재가치로 할인하는 자산가격 결정방식을 두고, 특히 지난 금융위기 이후 자산시장 가격 방정식 자체가 회의의 대상이 돼 버렸다고 주장한다.
근거로 그는 최근 미국 주식시장의 흐름이 과거 기업실적을 바탕으로 나오는 배당금을 따라 주가가 움직이던 1930년대 대공황기의 모습과 흡사하다는 점을 든다. 즉, 미래 수익이 '영원하다'는 전제에 기반을 두고 기업의 미래가치에 투자하던 기존의 투자행태가 과거회귀적으로 변했으며, 이 원인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얘기다. (☞관련 기사 : "금융자본주의는 소련 붕괴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선진국들이 몰두하는 유동성 공급은 현재까지 나온 유일한 대안이다. 이러다 물가가 폭등하면 어쩌나? 계속해서 돈을 퍼붓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쓰러진다. 한 나라가 쓰러지면 전 세계가 연쇄부도 현상을 맞을수도 있다. 지금은 디플레이션을 두려워해야 할 시대다. 경제주체들의 도덕적 해이는 어쩌나? 방법이 없다. 빌린 돈을 못 갚으면 또 돈을 찍어내면 된다. 미국 연준이 마음먹고 돈을 찍으면 통화공급량은 무제한이다.
이처럼 막대한 양의 유동성이 시장에 공급되면 결국 돈은 갈 곳을 찾아 흐른다. 물그릇에 계속 물을 부어담으면 언젠가는 물이 흘러넘칠 수밖에 없다. 이는 실물경제를 되살려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린다. 유동성 강화에 나서는 선진국들의 바람이다.
1930년대 미국 대공황의 선례가 반면교사다. 1920년대 말의 버블기 이후 주식시장이 무너지면서 사상 유례없는 대공황이 일어났다. 미국 연준은 이 상황에서 유동성 공급을 중단하고 기준금리 인하를 중지하는 초유의 결정을 내렸다. 1930년 9월, 연준은 기준금리를 2.5%에서 더 이상 내리지 않고 동결했고, 이듬해 10월에는 뱅크런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3.5%까지 끌어올렸다. 유동성 긴축을 불황 탈출 해법으로 삼은 것이다.
결과는 재앙이었다. 1931년 한 해 동안만 미국 물가는 7% 하락했다. 그로부터 2년 안에 유럽과 남미, 아시아까지 온 세계가 공황을 맞았다. 2차 세계대전이 도래하고서야 경제가 회복됐다. 전쟁이든, 정부 주도의 국책사업이든 누군가 돈을 풀어야만 경제가 회복된다는 선례를 남겼다.
조복현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자율이 이미 바닥(제로금리)에 다다른 상태라 미국과 일본이 쓸 수 있는 카드는 양적완화밖에 없다. 지금의 팽창적 통화정책은 지극히 적절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정용택 KTB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도 "피치 못할 선택이다. 선진 시장은 아직 회복을 논할 때가 아니다. 정부 부채가 많아지는만큼 시장금리도 낮은 수준을 유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미국은 중국에 위안화 가치 평가절상을 강하게 주문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3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만나 취재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있다. ⓒEPA=연합 |
G20, 새 브레튼우즈 체제 출범인가
문제는 선진국의 이와 같은 대응이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 이른바 '환율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엉뚱한 불똥을 튀긴다는 점이다.
양적완화정책으로 늘어난 유동성은 새 투자처를 찾아야 한다. 개발도상국이 타깃이다. 당장 한국만 봐도 알 수 있다. 선진국에 비해서 높은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고, 비교적 빠른 속도로 침체를 벗어나고 있다. 신흥시장으로 들어오는 선진국의 돈이 환율하락을 이끈다.
이에 신흥시장은 반발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수출경쟁력은 떨어지기 때문이다. 중국과 미국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한국 내에서도 기준금리 인상여부를 둔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다. 심지어 브라질은 일종의 토빈세(외환거래세)인 금융거래세(IOF) 세율을 2%에서 4%로 끌어올려 헤알화 가치 상승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나섰다. 자국으로 유입되는 외화의 기대수익률을 낮춰 유입규모를 줄이겠다는 의도다.
다음달 G20 정상회의가 환율 전쟁터로 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환율방어 필요성을 느끼는 한국 정부에는 부담이다. 당초 기획재정부는 이번 회의에서 IMF 쿼터 조정 등을 의제로 부각시킨다는 계획이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이번 갈등은 그러나 개별국가 사이에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선진국의 압박이 성공한들 그들에 이익으로 돌아오는 것도 아니다.
정 이코노미스트는 "이미 선진국 기업들의 생산기지는 지구적으로 흩어져 있다. 힘으로 개발도상국을 압박한다고 자국 산업에 이익이 되는 상황은 지났다. 정치적 고려에 그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번 정상회의가 특별한 합의문을 이끌 밑받침으로 활용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만들어진 브레튼우즈 체제와 같은 새 금융질서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1944년 44개 연합국 대표들이 모여 합의한 국제적 체제로, IMF와 세계은행의 창설, 금본위제 도입 등을 이끌어내 1970년대까지 세계 경제질서의 신호등 역할을 했다.
실제 프랑스가 주축이 된 일부 국가는 금융위기 이후 새 브레튼우즈 체제 도입을 강조하고 있다. 달러본위 체제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축통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게 근간이다. 최근 수년간 쏟아진 많은 경제관련 서적들이 역설하는 미래상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현재 세계 모든 나라가 환율을 통제하려 한다. 그러나 이를 놔두면 국제적 분쟁으로 번진다. 이 때문에 환율 갈등을 어떻게 안정시킬 수 있느냐를 두고 세계 정상들이 합의에 나서야 한다. 언제까지나 피할 수는 없는 과제다. 이미 경제 차원을 넘어선 문제"라고 설명했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도 "선진국은 아스피린(유동성 공급)을 투여해 자신들의 손실을 신흥시장에 떠넘기려 하고 있고, 신흥시장은 이를 거부하는 대치상황이다. 유동성을 걷는 게 지금 불가능하다면, 이 유동성을 관리하기 위한 컨센서스가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유동성 논란, 한국은 다르다? 온 세계에 돈이 흘러넘치고 있다. 극약을 써서라도 당장은 죽어가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일념 때문이다. 한국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기준금리는 여전히 극도로 낮은 수준이고, 정부는 각종 재정정책으로 실물경제 띄우기를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대응 방법은 선진국과는 달라야 한다는 주장이 만만치 않다. 선진국과 달리 기업부문의 실적이 좋고, 경상수지도 안정돼 오히려 적정수준의 유동성 관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제 한국에서 디플레이션 우려는 먼 나라 이야기다. 오히려 인플레 위험이 크다. 지난달 생활물가는 전년동월대비 평균 4.1% 급등했다. 지난 2008년 10월 4.8% 이후 최고치다. 생활물가는 정부가 체감물가를 쉽게 설명하기 위해 소비자들의 구입 빈도가 높고 지출비중이 높아 가격변동 수준이 민감한 품목 152개의 가격변동을 따로 산정한 수치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끌어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일부 학계를 넘어 시장참여자들 사이에서도 쏟아지는 이유다. 금융투자협회가 채권시장 종사자 23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61.1%가 이번 금통위에서 기준금리가 오를 것으로 전망한 게 기대감을 보여준다. 전성인 교수는 "지금이라도 정부가 시중의 과잉유동성 걷기에 나서야 한다"며 "환율 문제를 핑계로 물가를 방치하는 건 곤란하다. 어느 정도의 원화가치 상승은 용인해야 한다. 정부가 나선다고 잡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고유선 대우증권 경제금융팀장은 "한국뿐만 아니라 수출경쟁국들의 통화가치도 같이 올라가고 있다. 단순히 원-달러 환율이 내린다고 수출경쟁력이 타격받는 시기는 아니다. 정부가 어느 정도 속도조절을 해주는 선에서 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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