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강정원 전 국민은행장을 포함한 국민은행 경영진 88명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계를 내렸다. 단일은행에 행해진 징계로는 역대 최대 규모다. 강 전 행장은 사실상 금융권 복귀가 어려워진 것으로 풀이된다.
금감원은 19일 제재심의위원회를 열어 국민은행에 대한 종합검사 결과를 확정, 강 전 행장을 문책성 경고 상당조치하고 9명의 임직원도 중징계키로 했다. 나머지 78명은 견책이나 주의 등 경징계를 내렸다. 금감원은 지난 1월 14일부터 2월 10일까지 KB금융지주와 국민은행에 대해 종합검사를 실시했다.
금감원 "강 전 행장 은행에 5300억 원 손실 초래"
금감원은 우선 국민은행이 지난 2008년 카자흐스탄 센터크레디트은행(BCC) 지분 41.9%를 9392억 원에 사들일 때, 강 전 행장이 유동성에 문제가 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외부 자문사의 실사보고서를 무시하고 경영전략위원회에 보고해 은행에 4000억 원의 손실을 초래했다고 밝혔다.
강 전 행장은 또 인수 과정에서 BCC의 과도한 부채와 유동성 위기가 불거졌음에도, 이를 이사회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고 금감원은 설명했다.
10억 달러 규모의 커버드본드(은행이 자기 신용을 기반으로 발행한 채권으로 우선 변제권이 보장됨)를 발행할 때도 문제점이 있었다고 금감원은 지적했다. 이와 관련, 국민은행 이사회는 작년 2월 9%의 이표금리로 10억 달러의 커버드본드를 발행해 외화를 조달하기로 의결했다. 이는 통상적인 은행채금리의 두 배에 가깝다. 이로 인해 국민은행은 5년간 추가 이자만 1300억 원을 지불해야 했다고 금감원은 강조했다.
금감원은 또 강 전 행장이 작년 3월 국민은행에서 256억 원 규모의 금융사고가 발생했지만, 이를 1억 원 규모로 축소 보고했다는 점을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강 전 행장이 은행에 입힌 총 손실 규모는 5300억 원에 달한다.
은행 전산시스템 도입 과정에서도 강 전 행장은 부적절한 처신을 했다고 금감원은 지적했다. 강 전 행장은 당시 특정기종과 관계가 있는 사외이사가 이사회에서 영향력을 부적절하게 행사했음에도 그를 의사결정과정에서 배제하지 않았다.
총 손실 규모 1조1000억 원
금감원은 2년 3개월 만에 실시한 국민은행 검사 결과, 국민은행이 본부장 전결보다 경영협의회 등 각종 위원회를 중심으로 의사결정을 해 징계 대상자가 많아졌다고 밝혔다.
당연히 강 전 행장이 직접 관여되지 않은 업무처리도 제재 대상에 다수 올랐다.
금감원에 따르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에서 국민은행은 해외사업을 위주로 8개 업체에 대출을 잘못 해줘 3000억 원 이상 손실을 입었다. 9개 업체에 대한 일반여신도 부당하게 취급해 1000억 원 이상 손실을 봤다.
또 신용파생상품 심사 및 가치평가 조직 구축을 제대로 하지 못해 500억 원의 손실이 발생했고, 조선업체와 과도한 선물환 계약을 맺어 1200억 원의 손해를 입었다. 골프대회 후원과정에서도 경비심사 소홀로 10억 원의 과다지출이 이뤄졌다는 게 금감원의 설명이다.
금감원이 밝혀낸 위규행위로 인한 손실만 단순 합쳐도 손실액은 1조1000억 원대에 달한다.
반발 가능성 대두
그러나 금감원의 이와 같은 징계를 징계 대상자들이 수용할지는 미지수다. 현행 규정상 등기이사인 임원은 문책경고 때 3년간, 업무 정지 때 4년간 금융회사의 임원이 될 수 없다.
따라서 강 전 행장은 앞으로 3년간 금융사 임원이 될 수 없고, 이번에 중징계를 받은 일부 부행장이나 본부장 등도 앞으로 상당 기간 승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선례도 있다. 작년 황영기 전 KB금융지주 회장은 우리은행장 재직 시절 투자 손실을 이유로 직무정지 상당의 중징계를 받자 금융위 징계를 취소해 달라며 소송을 냈다. 강 전 행장을 비롯한 제재 대상자들이 무더기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은행 대규모 징계 이어져…키코 문제도 대두
한편, 금감원은 이번 결정에 앞서 선물환 통화파생상품 키코(KIKO)를 부실판매한 9개 은행(외환, 한국씨티, SC제일은행, 신한, 우리, 하나, 산업, 대구, 부산은행)을 대상으로도 중징계를 내렸다. 임직원 72명이 징계 대상자가 됐고, 이 중 4명은 감봉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키코는 환율이 미리 약정한 구간에서 움직이면 기업이 이득을 보지만, 구간을 벗어나면 기업이 손실을 보는 구조의 환헤지 상품이다. 상당수 중소기업들이 환율 하락(원화 강세)을 예상해 키코에 가입했으나, 국제 금융위기 이후 환율이 큰 폭으로 올라 피해를 입은 기업들이 늘어났다.
중소기업들은 이 과정에서 "은행에서 거래위험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다"며 대상 은행들에 대한 중징계를 요청했다. 특히 지난 2008년 11월에는 약 100개 기업이 은행을 상대로 손해배상 등 소송을 제기해 화제가 됐다. 그러나 올해 2월 8일 본안소송 첫 판결에서 법원은 은행의 손을 들어줬다.
이번 금감원 결정을 두고도 중소기업들은 '제재가 미약하다'며 반발하고 있다.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는 이날 여의도 사무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키코 판매 은행에 대한 당초 조사항목이 8개였는데도 금감원이 '건전성 여부'만 따져 은행을 제재한 것은 사실상 은행의 과실을 대부분 눈감아준 것이나 다름없다"며 "상당수 기업들이 손실이전거래 때문에 피해가 커졌음에도 이번 징계 심의에서는 면죄부를 줬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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