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의 정동영 의원이 담대한 진보를 표방하며 '역동적 복지국가'를 외치고 있다. 그러나 '역동적 복지국가'의 기초가 되는 철학적ㆍ이론적 바탕과 '역동적 복지국가'를 실현하기 위한 체계적이고도 구체적인 정책 패키지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지금까지 정 의원이 '역동적 복지국가'의 내용으로 소개한 것은 고작 '보편적 복지'와 '적극적 복지'정도다.
정 의원이 '역동적 복지국가'의 가치를 발견한 것이 최근일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게 꼭 비난받을 일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유력 정치인 가운데 '역동적 복지국가'의 진가를 알아보고 복지국가 담론을 선점(?)한 것은 칭찬할 대목이다. 설혹 그가 민주당의 대권후보, 더 나아가 차기 대통령이 되기 위한 전략적 방편 혹은 정치적 셈법으로 '역동적 복지국가'를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국가모델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도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치인의 행보 가운데 정략 아닌 것이 드물다는 것은 모두가 아닌 사실이다. 관건은 정치인의 정략이 공익에 부합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 의원이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을 들고 나온 행위는 그 동기가 무엇이건 공익에 부합한다.
엄청난 잠재적 복지수요를 간과하지 말아야
문제는 정 의원이 '역동적 복지국가'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정 의원이 '역동적 복지국가'모델을 설계하는데 간과하지 말아야 할 요소들을 몇 가지만 거칠게 지적하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역동적 복지국가'모델은 서구의 복지국가 모델이 지닌 한계들-구매력 이전정책으로 인한 생산 및 투자의 위축, 만성적인 재정적자, 도덕적 해이 등-을 발전적으로 지양함과 동시에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점이다. 특히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한국사회의 광범위한 복지수요이다. 실업수당을 예로 들어보자.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공식실업자는 121만 명이고 실업률은 5.0%에 불과하다. 그러나 18시간 미만 취업자 108만 2000명, 비경제활동인구중 "쉬었다"고 응답한 자 153만 5000명과 취업준비생 59만 명, 구직 단념자 19만 6000명을 고려하면 실업자는 461만 9000명인데, 이를 고려한 실질 실업률은 무려 19.2%에 이른다.
그뿐이 아니다. 대한민국에는 영세자영업자 500만 명과 비정규직 노동자 850만 명이 존재한다. 만약 실업수당의 지급 기간과 지급요율을 지금보다 훨씬 높인다면 이들 중 상당수는 기꺼이 실업자가 될 것이다. 한 마디로 국가재정으로 감당할 수 없는 복지수요가 발생하는 셈이다. 이런 사실을 간과한 채 기존 실업율을 기준으로 실업수당을 현실화한다면 낭패를 볼 것이 자명하다.
토지의 중요성을 직시해야
한국사회의 특수성을 말할 때 토지의 중요성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건국 직후 실시된 농지개혁으로 인해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평등한 출발을 할 수 있었고, 이는 근로의욕 고취 및 교육투자로 이어져 유례없이 빠른 산업화를 달성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2차 대전이후 독립한 제3세계 국가들 가운데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가 농지개혁에 성공한 대한민국과 대만 뿐이라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지금 제2의 토지개혁이 필요한 상황이다. 건국 직후 평등했던 토지소유분포는 6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악화일로를 걸어 현재는 1%의 국민이 사유지의 57%를 소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대를 토지소유자가 전유하는 현재의 토지사유제는 주기적인 부동산 투기 및 가격 폭등, 토건분양의 비대화, 자산양극화, 근로의욕 저하, 노자 간의 대립 격화, 주거비 상승, 국가경쟁력 약화, 부정부패의 만연 등의 부작용을 발생시킨다. 쉽게 말해 지금의 토지사유제는 만악의 근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안이 '역동적 복지국가'안에 담겨야 할 것이다. 단지 주거불안 해소 내지 주거복지 정도의 차원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토지 문제는 경제, 사회, 조세 등 한국사회 모든 부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며 '역동적 복지국가'모델이 성공하기 위한 열쇠이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획득, 공정성의 복원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은 크게 보아 경제, 사회, 조세 등의 부문으로 구성될 가능성이 크다. 이를 유기적이고도 총체적으로 구성하고 설계하는 것이 긴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여전히 정상사회 건설을 방해하고 있는 특권과 반칙, 비정상과 불공정, 비합리와 몰상식을 폐절하고 지양해 공정성을 복원시키고 근대성을 획득하는 작업이다.
한국사회는 식민통치, 외세에 의한 해방과 분단, 전쟁, 군사독재, 압축적ㆍ폭력적 산업화, 민주화를 1세기 만에 경험한 매우 독특한 사회이다. 이 말은 서구 유럽과 피식민지 경험이 있는지 제3세계 국가들이 겪은 역사적 경험들이 한국사회 안에 온축(蘊蓄)돼 있다는 뜻이다. 한국사회는 여기에 분단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이 더해진다.
워낙 짧은 기간 안에 아시아적 전제군주제 사회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한 데다 그 이행과정이 질곡으로 점철돼 있었기에 한국사회 안에는 식민, 분단, 반민주 등의 적폐가 여전히 가공할 만한 위력을 떨치고 있다. 물론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관찰되는 자본과 노동 간의 문제도 적지 않다. 한 마디로 식민, 분단, 반민주, 자본 같은 요소들이 한국사회 안에 착종(錯綜)돼 한국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비합리성, 비정상, 불공정, 몰상식, 특권, 반칙 등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지 않는 것, 승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고 패자에게는 부활전이 허락되지 않는 것, 불로소득 추구행위가 만연한 것, 패거리주의와 학벌주의, 사익추구행위 등이 기승을 부리는 것 등의 배후에는 비합리성 등의 전근대적 잔재가 강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이를 극복해서 합리성, 정상성, 상식 같은 근대성을 획득하고 공정성을 복원시켜야 한다. 만약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제 아무리 경제, 사회, 조세 등의 제도를 잘 설계한다고 해도 그 효과는 크게 반감될 공산이 크다.
정 의원의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이 안착하길 바란다
정 의원이 더 잘 알겠지만, '역동적 복지국가'모델이 국민들의 주목을 받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기 시작하면 좌, 우 양 진영에서 사나운 협공이 펼쳐질 것이 자명하다. 이 말은 정 의원이 표방하는 '역동적 복지국가'가 지금처럼 레토릭 수준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모쪼록 정 의원이 모두에서 말한 것처럼 서구의 복지국가가 노정한 한계를 극복하면서 한국사회의 특수성도 충실히 반영한 '역동적 복지국가'모델을 주조하기 바란다. 한국사회에 제대로 된 담론을 하나 선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커다란 기여다. 물론 완성도 높은 '역동적 복지국가' 모델을 설계해 낸다면 정 의원의 정치적 명운도 어둡지 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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