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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공정한 사회'?…MB식 말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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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없는 '공정한 사회'?…MB식 말장난"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공허한 수사만 넘쳐난 8.15 경축사

2004년 국제노동기구(ILO)는 '공정한 세계화(A Fair Globalization)'라는 보고서를 냈다. "모두를 위한 기회 창출"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보고서는 '세계화의 사회적 차원에 관한 세계위원회'(이하 ILO 세계화위원회)의 활동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대표하여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과 음카파 탄자니아 대통령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ILO 세계화위원회는 세계화 때문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더욱 불공정해지는 현실을 개선하는 방안을 찾기 위해 만들어졌다.

'공정한 세계화'의 조건들

보고서는 세계화를 공정하게 만들려면 경제적 측면에만 치우치지 말고 사회적 차원을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권과 개인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모두에게 기회와 혜택을 주며, 부유층만이 아닌 다양한 사회 계급을 통합하고, 민주적으로 규제되는 세계화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한 실천 방향으로 보고서는 △제도나 시장 자체가 아닌 사람에게 초점을 맞출 것 △국가를 민주적이고 효율적으로 운영할 것 △자연과 환경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개발을 지향할 것 △시장을 생산적인 동시에 공평하게 만들 것 △세계경제 질서를 공정하게 만들 것 △경제 불평등을 극복할 것 △세계화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와 기업의 행위자들이 더 많은 책임을 지도록 할 것 △국제기구, 각국 정부, 의회, 기업, 노동, 시민사회가 더 많은 대화와 협력을 가질 것 △국제연합(UN)을 강력하고 효율적인 다자간 기구로 개혁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나아가 보고서는 공정한 세계화를 위해 개별 국가 수준에서 갖추고 실천해야 할 방향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정치 제도는 민주적이고 인권을 존중하며, 법의 지배와 사회적 형평성 위에 서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보장하고 공공재화와 사회보장을 제공하며, 남녀평등을 증진하고 교육과 여러 사회 서비스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통해 국민의 능력을 함양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결사와 표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며 가난한 사람과 소외계층 등 다양한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도록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국민경제의 양대 기둥인 사용자와 노동자 조직의 대표성을 높여 사회적 대화가 알차게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

요약하자면, 정치적 민주주의, 효율적인 국가, 생기발랄한 시민사회, 강력한 대표성을 지닌 노사관계가 공정한 세계화의 토대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정권이 약속했던 '공정한 사회'

그 출처를 어디서 따왔는지 모르겠으나, 집권 하반기를 맞은 이명박 대통령도 8.15 경축사에서 정권의 실천 모토로 '공정한 사회'를 내세웠다.

이 대통령에 따르면 공정한 사회란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며 △개인의 자유와 개성·근면과 창의를 장려하며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져 넘어진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선 사람은 다시 올라설 수 있으며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고 △승자가 독식하지 않으며 △지역과 지역이 함께 발전하고 △노사가 협력하며 발전하고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이 상생하며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좋은 말이고 옳은 노선이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이런 사회를 만들어내느냐다. 1948년 대한민국이 개국한 이래 공화국이 여섯 차례나 바뀌었고 이명박 씨까지 모두 열 명의 대통령을 맞았다. 그때마다 집권자들은 표현만 바꾸었을 뿐이지 이 대통령이 말하는 '공정한 사회'를 약속했었다.

'공정한 사회'의 네 가지 조건

그렇다면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ILO 세계화위원회의 결론을 빌리자면 정치적 민주주의, 효율적인 국가, 생기발랄한 시민사회, 강력한 대표성을 지닌 노사관계 네 가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대통령의 경축사 어디를 보아도 이 네 가지에 대한 언급이 빠져있다.

정치 및 국가와 관련해서는 선거제도 개혁과 행정구역 개편, 개헌이 병렬적으로 나열될 뿐이다. 비효율적인 국가 행정의 극치이자 녹색성장의 자기 부정인 4대강 사업은 반성은커녕 거론조차 안 됐다. "모두 힘을 합치자"는 하나마나 한 소리만 있을 뿐 비(非)국가 부문의 핵심 동력인 시민사회와 노동조합에 대한 제안이나 호소는 없다.

공정한 사회의 핵심은 경제적으로 불평등한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는 기업과 노동조합의 역할, 즉 노사관계가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청와대의 노사관계 담당 비서관이 '민간인 사찰'의 배후자 혐의로 옷을 벗는 정권의 수준대로 국가 차원에서 노사관계를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 현 정부의 민간인 사찰을 다룬 <PD수첩> 방송 캡처. ⓒMBC

수사로 끝날 '공정한 사회'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권 차원의 시도는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활발했었다. 1998년 IMF 위기로 인해 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악화되기는 했지만 세 정권을 거치면서 정치적 자유화가 진전되었고 시민사회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물론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에 "민주주의의 질이 나빠졌다"는 학문적 분석도 있고, 법의 지배의 전제조건인 법 앞의 평등이 기대만큼 구현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크다. 하지만 결사와 표현의 자유는 진일보했고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보장도 개선되었다. 사교육이 공교육을 갉아먹는 폐해를 교정하지는 못했지만 건강보험과 국민연금으로 대표되는 사회보험의 제도적 정비가 큰 틀에서 마무리된 것도 이 시기였고, 노사정 3자의 전략 부재로 실패했지만 사용자 단체와 노동자단체 사이에 사회적 대화 실험이 이뤄지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면, 본인이 대통령으로 통치한 지난 2년 반 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는 위축되지 않았는지, 정부 운영이 효율적이었는지, 시민사회의 활동이 활발해졌는지, 사회적 대화를 위한 노동조합과 사용자단체의 대표성은 강화되었는지에 대한 평가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런 조건들에 대해 문제의식이 없다는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내세운 '공정한 사회'는 그 의지가 아무리 커더라도 공허한 수사(修辭)에 그칠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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