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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비오는 날이면…"

[몽골 이주노동자, 한국을 말하다 <8>] "한국 취업, 걱정이 앞선다"

지난 6월 4일, 산업안전공단은 2007년부터 3년 동안 산업재해 피해를 입은 이주노동자가 2007년 3967명, 2008년 5221명, 2009년 5231명이라고 발표했다. 그 중 사망자는 2007년 87명, 2008년 117명, 2009년 101명이었다.

물론 이 숫자가 다는 아니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이주노동자들은 비자가 없거나 있더라도 모르거나 계속채용 혹은 재계약 약속 때문에 산재 피해를 입어도 산재로 처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한국 상황에 서툴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산업안전에 유독 취약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이들은 '이 땅에서 떠나갈 사람들'이다. 떠나갈 사람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쉽게 잊게 된다. 떠나간 사람들이기에 치료가 부족하거나 법적으로 보장된 여러 혜택을 받지 못해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치료해주고(!) 법적으로 규정된 모든 혜택을 받고 돌아가면 우리가 할 일은 다했다고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여기고 말아도 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을 가지고 산재피해 후 귀환한 그들의 삶을 잠깐 살펴보고자 공익변호사그룹 공감과 외노협,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에서 작은 조사를 기획했다.

이렇게 해서 지난 6월, 노동인권회관 박석운 소장, 외국인이주노동자인권을위한모임 소장인 필자, 외노협의 이경숙 간사 이렇게 세 사람이 몽골로 갔다. 그곳에서 23명의 산재피해자들을 만났다. 모두 2000년 이후 한국에서 취업하다가 산재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이다.

한국에서도 늘 하는 상담이었지만, 그들의 땅에서 그들을 만나보니, 그 감도가 달랐다. 그들은 거의 다 잔잔하게 자신의 사례를 설명해주었다. 나직한 목소리로 잔잔한 표정으로, 그 잔잔함이 듣는 한국인들에게 민망함과 미안함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들었던 그들의 사연을 그들의 목소리로 공개한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들춰 괜히 미안함을 더하기 위함이 아니고,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비판하기 위함도 아니다. 다만, 지금도 또 앞으로도 생겨날 또 다른 그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게 뭔가 변화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사실관계에서는 그들이 이해했던 그대로 서술했다. 확인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 이해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이 그렇게밖에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의 일이라거나 제도가 바뀌었다는 등의 이유로 애써 위안을 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고용허가제 노동자, 산업연수생, 미등록체류자, 10대 소년, 형제 산재피해자 등 고루고루 사례를 취합하였으니 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은 말이 있다. 어떤 피해자가 한 말이기도 하고, 한국으로 몽골인을 송출하는 업무를 맡은 몽골인이 한 말이기도 하다.

"한국에 갈 때, 몽골인들은 모두 건강검진을 받고 간다. 우리는 건강한 젊은이들을 보내준다. 그러니 돌려보낼 때도 건강하게 돌려보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

다음은 산재로 손가락이 잘린 몽골 노동자가 자신의 사연을 구술한 것이다. <필자 주>

나는 2000년 3월에 한국에 입국했었다. 입국할 당시 600만 원 정도의 많은 빚을 지고 한국에 입국했다. 당시에는 고용허가제가 되기 전이어서 다른 비자로 입국해서 미등록으로 일을 했다. 그러다가 2002년에 일시적으로 비자(월드컵이 있기 몇 달 전, 한국정부에서 대대적으로 미등록노동자들에게 한시적으로 체류를 허용해주는 비자를 발급했었다:필자)를 받았었고, 그 즈음 몽골에 계신 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잠깐 귀국했다. 2004년 봄에 다시 한국에 입국해서 가구공장에 취업했다. 그러니까 이때에는 비자있는 상태였다. 그 회사에는 노동자가 25명 정도 있는 회사였다. 외국인은 나, 베트남 여자 2명, 남자 1명이 있었다.

나는 산업안전이라든가 산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내가 하는 일에 어떤 위험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다. 그 동안 다른 사람의 사고가 난 것을 목격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사고를 당할 때까지 사고가 날 우려가 있다는 생각은 못했다.

가구공장에서 나는 가구 표면에 반들반들한 것을 붙이는 일을 하였다. 사고가 난 때는 2004년 10월이었다. 사고 날 당시 의자다리에 나사구멍을 뚫는 일을 했다. 의자다리가 성인 허리 정도까지 올 정도로 매우 큰 데, 의자다리를 고정시키는 나사구멍을 뚫으려면 전기드릴을 사용해야 한다. 한손으로 의자다리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 다리를 밀어주면서 드릴을 작동시켜 구멍을 뚫는다.

그날, 다른 때와 같이 왼손으로는 의자다리를 잡고 오른손에 장갑을 끼고 드릴을 작동했는데, 장갑이 드릴에 끼어서 끌려들어가면서 내 손도 끌려들어갔다. 드릴을 작동시키는 스위치는 손 가까운 곳에 있지 않고 발치께에 있었는데, 스위치를 끄려면 반대쪽 손을 내려야만 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내가 반대쪽 손을 내리면 머리가 드릴에 부딪혀서 말려들어갈 것 같았다. 드릴 때문에 내 몸이 전체적으로 딸려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 손이 드릴에 딸려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스위치를 끄지 못했다. 그 대신 딸려 들어가는 손을 나름대로 힘껏 잡아당겼다. 드릴을 멈추게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손만 잡아당겼더니 손가락이 뭉개져버렸다. 사고 날 당시에는 뼈는 있었는데 나중에 피부가 떨어졌다. 이 사고로 오른손 넷째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입원기간은 2달이었는데 손가락을 배에 붙여서 지냈다. 약 먹는 기간내내 많이 아팠다. 병원에 혼자 있었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다. 외국인이고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혼자 아픈 것을 참고 지내려니 심리적으로 많이 힘들었다. 그때 사장님, 사모님이 많이 도와줬다.

산재보험제도는 사고 후에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산재보험도 잘 몰랐고, 내용은 지금도 정확하게는 잘 모른다. 처음 신청서류를 작성할 때에는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이 도와주었다. 산재신청에 필요한 서류들은 병원에서 주었고 공단에 제출했다. 병원에서는 '어디어디 가서 하라'고 하는데, 가보면 모두들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이후부터는 회사에서 서류들을 해주었다.

보상금으로 600만 원을 수령했고,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입원기간 중에도 휴업급여로 70%정도의 월급을 받은 것 같다. 치료비는 내가 부담했다.(산재보험이 적용되었음에도 치료비를 부담했다는 것을 보건대 치료비 중 비급여부분을 본인이 지급한 것 같다. 간혹 이런 경우가 있는데, 상식대로라면 사업주가 부담해야 할 부분이다 : 필자) 치료가 다 끝나고 다른 회사에서 일했다. 계약기간이 끝나고 나서는 비자 없는 상태에서 철공장에서 일했다. 귀국한 때는 2005년 10월이었다.

산재보상금을 처음 받았을 때는 아파트를 구입하려고 했는데, 귀국한 후 사려고 했더니 아파트 가격이 급등하는 바람에 사지도 못했다. 그냥 생활비로 썼다. 지금은 옷 만드는 회사에서 사무실 업무를 본다. 업무를 보는 데 큰 지장은 없지만 아직도 비 오는 날 같은 때는 상처부위가 아프다.

나는 산재라든가 산업안전이라는 걸 잘 몰랐었다. 지금 내 여동생이 한국에서 취업하고 있는데, 사고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공장에서 일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였다. 내 동생만이 아니라 한국에 취업하려는 몽골사람들에게는 조심하라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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