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시큰둥한 반응이 있다. 정치적 효과를 노린 '쇼'에 불과하다는 게다. 이 대통령의 인품이나 정치 행태에 대한 반감이 반영된 반응이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전부는 아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 요구는 정권의 성향과 별 관계없다는 입장도 있다. 마치 '범죄 추방'이나 '전염병 예방'처럼 국가를 정상적으로 운영하려면 필연적으로 챙겨야 할 과제라는 게다. 청년실업, 내수 부진, 사회경제적 역동성 쇠퇴 등 국민이 생활 속에서 느끼는 경제 문제 가운데 대부분이 중소기업 문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에 선 이들은, 그래서 현 정부가 실제로 어떤 정책을 내놓을지를 주목한다. 이달 말 발표 예정인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한 종합대책'을 뜯어본 뒤로, 판단을 미루겠다는 게다. 요컨대 지금으로서는 대통령의 발언에 담긴 진정성을 가늠할 근거가 없다는 입장이다.
얼핏 보면, 이런 두 입장은 이달 말까지 계속 평행선을 그릴 듯하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전에라도 입장을 정리할 방법은 있다.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해 실제로 필요한 과제를 정리해서, 이에 대한 입장을 정부에 물어보면 된다. 그 반응을 보면, 대통령의 최근 발언이 그저 '쇼'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꽤 기대를 걸 만한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프레시안>은 중소기업이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을 하는 것을 막는 장치를 몇 가지 골라냈다.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가늠하는 지표로 삼기 위해서다. 이들 지표에 대해 정부 안팎에서 이뤄지는 논의를 살펴보면, 이 대통령의 최근 발언에서 비롯된 혼란은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지표는 어음 관행이다. 두 번째 지표는 하도급업체 공동행동이다. <편집자>
[대·중소기업 상생, '말잔치' 아니려면·①] "언제까지 '문방구 어음' 믿고 장사하라고"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이유가 뭘까? 일단 그들이 고도의 기술과 지식을 갖춘 전문가라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온전한 설명이 되기 힘들다. 다른 분야에서 비슷한 수준의 지식과 기술을 갖춘 이들이 꼭 의사만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시장에서 공급이 제한돼 있다는 점을 빠뜨릴 수 없다. 그럼 전부 설명이 될까. 아직도 조금 부족하다.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이 좋은 대우를 받는 배경에는, 그들이 독자적으로 병원을 차릴 수 있다는 사실이 있다. 예컨대 병원장 또는 선배 의사에게 밉보여도, 심지어 전체 의료계에서 따돌림을 당해도 그들은 생계유지가 가능하다. 직장을 떠나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이 직장 안에서의 '교섭력'을 높여주는 것이다. 반대로, 신규 병원의 성공률이 낮아지면 대형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들의 처우 역시 장기적으로는 나빠지리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존엄한 대우는 '교섭력'에서 나오고, '교섭력'은 '기댈 언덕'에서 나온다. 대형병원 의사의 경우, 병원 개원이 '기댈 언덕'이다.
중소기업이 살아야, 대기업 직원도 숨통 트고 지낸다
이런 분석은 다른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회사원이 존엄한 대우를 원할 때 '기댈 언덕'은 이직 및 창업 가능성이다. 여차하면 회사를 나와서 창업하는 게 가능할 때, 직장 안에서 교섭력이 높아진다. 이런 가능성이 없으면, 직장에서 아무리 모욕적인 대우를 받아도 그저 참는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세력의 힘이 미미한, 그래서 실직자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없다시피 한 한국에서는 특히 그렇다.
요컨대 창업 성공률이 높은 사회일수록 직장인의 삶도 여유로워진다. 그리고 창업 성공률이 높다는 말은, 중소기업의 성공률이 높다는 말과 같다. 처음부터 대기업인 회사는 없으니까 말이다. 대기업 직원들이 중소기업 문제를 '남의 일'로만 여길 수 없는 이유다.
중소기업이 받는 불공정한 대우를 개선하는 일은 중소기업 직원들의 생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대기업 직원들이 숨통을 트고 지내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라는 이야기다. 중소기업 문제는 결국, 모든 직장인의 문제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역대 정부는 잘 알고 있었다. 재벌개혁과 중소·벤처기업 육성을 동시에 추진한 게 김대중 정부였다. 노무현 정부는 삼성과 가까웠다는 점 때문에 중소기업 문제에 대해서는 인색한 평가를 받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 중소기업 문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을 만들고, 3개월마다 청와대에서 재벌 총수와 중소기업 사장이 만나는 상생협력 대회를 연 게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리고 이들 정부의 업적을 부정하면서 집권한 이명박 정부 역시 중소기업 문제에 팔을 걷어붙였다. 이는 중소기업 문제가 정권의 성향과 관계없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또 정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다는 점도 보여준다. 정권이 바뀌어도 계속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까 말이다.
약자의 무기는 단체 결성…공정거래법에 담합 예외조항 있는 이유
사실 당연한 일이다. 중소기업 문제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은 결국 사기업 사이의 거래에서 비롯된다. 정부가 끼어들 여지가 적다. 중소기업과 거래하는 대기업이 바뀌지 않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래의 규칙을 공정하게 만들고, 이를 어긴 쪽에 대해 법 적용을 엄정하게 하는 것 정도다. 물론 이것만 잘 돼도, 문제의 상당부분은 풀린다. 그러나 나머지 문제도 있다. 그리고 그건 중소기업 스스로 푸는 수밖에 없다.
다시 문제는 '교섭력'이다. 거래 규칙이 공정해도, 중소기업은 대기업과의 거래에서 불이익을 겪는다. 대기업은 소수고, 중소기업은 다수다. 따라서 대기업은 자신과 거래하길 원하는 중소기업들을 경쟁시킬 수 있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래처를 바꾸겠다는 압박으로 원하는 조건을 관철한다. 게다가 협상의 노하우 역시 대기업이 압도적으로 우위다.
약자인 중소기업은 그냥 당하고만 있어야 할까. 그렇지 않다. 인류 역사에서 검증된 방법이 있다. 약자가 '교섭력'을 원할 때 유일하게 '기댈 언덕', 바로 '단결'이다.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이 단체를 결성해서 교섭을 하면 된다. 이런 점은 정부 역시 알고 있다. 기업의 공동행위(담합)를 규제하는 현행 공정거래법에 예외조항이 있는 것은 그래서다.
공정거래법 19조에 따르면, 산업합리화, 연구·기술개발, 불황 극복, 산업구조조정, 거래조건의 합리화, 중소기업경쟁력 강화 등을 위해서라면 기업이 공동행위를 할 수 있다. 같은 법 조항 시행령에 보다 구체적인 조건이 명시돼 있다. △공동행위에 의한 중소기업의 품질·기술 향상 등 생산성 향상이나 거래조건에 관한 교섭력 강화 효과가 명백한 경우, △공동행위 외의 방법으로는 대기업과의 효율적인 경쟁이나 대기업에 대항하기 어려운 경우 등에 대해서는 중소기업의 '담합'이 허용된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공정위가 맡아야
늘 그렇듯, 진짜 문제는 '각론'에 있다. 경제개혁연구소는 지난 3월 발표한 "하도급거래 구조 특성과 법제도적 개선방안" 보고서에서 이런 문제를 꼼꼼하게 지적했다. 중소기업의 담합을 허용하는 요건이 너무 모호하다는 게다.
예컨대 '공동행위에 의한 중소기업의 품질·기술 향상 등 생산성 향상이나 거래조건에 관한 교섭력 강화 효과가 명백한 경우'를 어떻게 입증하느냐는 게다. 교섭력 강화 효과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능력을 갖춘 중소기업은 많지 않다. 탄탄한 관리 조직을 갖춘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생산과 영업에 전념할 뿐 관리 인력은 최소 규모로 두는 게 보통이다.
또 특정 중소기업이 앞장서서 이런 시도를 할 경우, 대기업과 거래가 끊길 위험이 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중소기업의 '담합'을 허용한 공정거래법 조항에 대해 경제개혁연구소가 "사문화 돼 있다"고 판단한 것은 그래서다.
사문화된 법 조항을 살려내는 게 관건이다. 경제개혁연구소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문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역할을 공정위가 맡아야 한다는 게다. 중소기업의 공동행위가 가능한 업종을 공정위가 매년 조사해서 발표한다면, 산업별 또는 업종별 중소하도급기업의 공동행위가 활성화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공정거래법 19조를 고쳐서 공정위의 역할을 명시해야 한다는 게 경제개혁연구소의 의견이다.
반도체 부품 생산자 조합이 삼성전자·하이닉스 경쟁시킨다면
그러나 이는 반쪽짜리 해법이다. 나머지 반쪽은 '조직화'다. 수백 개 중소기업이 대기업 한두 곳의 낙점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구조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게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수직적·종속적 하도급체계를 수평적·협력적 체계로 바꾸려면, 부품 종류별 사업자 조합(협동조합)이 만들어지고 활성화돼야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반도체 부품 생산자 조합, 휴대폰 부품 생산자 조합 등이다. 이런 조합이 생기면, 경쟁의 평준화가 이뤄진다. 대기업은 '갑'의 자리에서 협력업체를 고르기만 하고, 수많은 중소기업이 '을'의 자리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현 구조가 바뀐다는 것.
반도체 부품 생산자 조합이 삼성전자와 하이닉스반도체를 경쟁시키며 가격흥정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중소기업의 교섭력이 지금보다 훨씬 높아진다. 또 개별 기업 단위에서는 두기 힘든 정책 인력을 조합 단위에서 뽑으면, 해당 산업 분야 정책에 대해서도 발언권을 가질 수 있다. 사회적 영향력 부문에서도 중소기업이 약간이나마 대기업을 따라 잡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중소기업에 대해 노동조합 수준의 '단결'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이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대기업 및 관공서와의 관계에서만 약자일 뿐이다. 다른 관계에서는 대체로 강자에 가깝다. 그리고 '강자의 단결'은 담합이다. 이게 어떤 부작용을 낳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중소기업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균형감각이 필수적인 이유다. 경제개혁연구소의 주장 역시 중소하도급 업체의 담합을 무조건 허용하자는 것은 아니다. '선별적 카르텔(담합)'이라는 점을 못박고 있다.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지금처럼 완전히 개별적으로 교섭하는 경우보다는 높고, 노동조합보다는 낮은 수준의 단체행동"이 적절하다고 말했다. 개별 교섭과 단체행동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야 하는데, 지금은 전자에 너무 쏠려 있다는 설명이다.
▲ 지난 2008년 레미콘 업자 조합이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납품단가 인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뉴시스 |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 하도급업체는 거래 끊길 각오해야
다른 문제도 있다. 지금도 상당수 업종에서 사업자 조합 및 이와 유사한 단체가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대기업과 교섭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대부분 관급 공사를 수주하기 위한 로비 목적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따라서 이들 단체의 체질 개선이 필수적이다.
지난해 4월 도입된 납품단가 조정협의 의무제가 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원자재 가격 변동으로 납품단가의 조정이 불가피한 경우, 하도급업체가 원사업자(대기업)와 조정 협의를 할 수 있게 하는 제도다. 하지만 개별 하도급업체가 이 제도를 이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대기업과의 거래가 끊길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개별 하도급업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단체(사업자 조합)가 직접 조정 협의를 할 수 있게끔 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은 그래서다. 중소기업인은 여러 관계 속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를 오가는데, 대기업과 마주한 자리에서는 극단적인 약자가 된다. 따라서 단체 결성의 정당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도 이 경우다. 앞서 언급한 사업자 조합의 체질 개선 문제 역시 하도급업체를 대표해서 조정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풀린다.
하지만 정부 안팎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조금 다르다. 정부 역시 개별 하도급업체가 납품단가 조정협의에 참가하기를 꺼리는 현실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하도급업체를 대표하는 단체에 조정 협의권을 줄 수는 없다는 게다. 개별 하도급업체가 아닌 제3자에게 조정 신청권을 주자는 게 정부 안팎에서 나오는 목소리인데, '협의권 없는 신청권'에 기대를 거는 중소기업인은 사실상 전무하다. 하도급업체가 대기업과 직접 교섭해야 한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정부 입장은 현재 논의 중이며,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대기업-중소기업 동반성장을 위한 종합대책'이 나오는 이달 말에야 정확한 입장을 알 수 있다.
'약자의 단결' 막는 '친서민 정책'?
다만 분명한 것은, 하도급업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단체에 조정 협의권을 줄지 여부가 약자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태도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라는 점이다. 약자의 단결을 허용하지 않는 정책과 친서민 행보가 양립할 수 없다는 점은, 누가 봐도 명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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