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평가가 나온 이유는 기본적으로 박지성의 조용한 성격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맨유의 공격수 치고는 개인기가 부족한 박지성을 혹시 이렇게 보는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박지성의 개인기는 영리하고 부지런한 움직임
기우였다. 영국 사람들은 박지성의 개인기를 단순히 드리블 돌파 능력이나 골 결정력으로 보지 않는다. 상대 수비가 예측하지 못할 정도의 빠르고 영리한 움직임과 부지런한 플레이를 그의 개인기로 여긴다. 바로 그 능력 때문에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을 맨체스터로 데려 왔다는 얘기다.
남아공 월드컵 그리스 전에서 터진 박지성의 골은 바로 그의 이런 개인기를 통해 나온 것이다. <가디언>도 "박지성은 지칠 줄 모르고 뛰는 부지런한 한국 축구의 전형이다. 그리스와의 경기를 통해 왜 그가 중요한 선수인지 잘 보여줬다"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개인기를 너무 좁은 의미로 국한시켰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남미 선수들의 화려한 드리블이나 스핀 킥만이 개인기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일선 지도자들이 말하는 한국 축구의 개인기 부족은 패싱 능력과 관련이 크다. 패스를 주고 받는 과정이 매끄럽지 않은 선수들이 많은데 이런 치명적 문제점을 고치려면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푸념이다.
▲ 2010 남아공 월드컵 결승전에서 이니에스타(바르셀로나)가 연장 후반 11분에 터뜨린 결승골로 네덜란드를 1-0으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스페인 대표팀. ⓒEPA=연합뉴스 |
네덜란드 지도자 덕에 뿌리내린 스페인 패싱 게임
그런 점에서 남아공 월드컵 우승팀 스페인은 한국 축구의 연구 대상이다. 스페인선수들은 상대 수비의 압박이 세게 들어오는 상황에서도 어떻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할 수 있는 걸까?
스페인은 전통적으로 남미 스타일의 축구를 했다. 드리블에 많이 의존하는 축구였다. 수비보다는 화려한 공격축구가 자연스레 꽃을 피웠다. 남미 출신의 개인기가 뛰어난 스타들이 스페인 프로축구에 끊임없이 정착하면서 이런 현상은 굳어졌다.
바르셀로나의 감독으로 부임한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 요한 크루이프는 스페인 축구가 기술은 좋지만 같이 하는 플레이에 약하다는 점을 간파했다. 그는 공 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패싱 게임을 주문했다. 1990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압박축구가 대유행하면서 크루이프의 전략은 착착 들어 맞았다. 그가 이끄는 바르셀로나는 1992년 사상 최초로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랐다.
크루이프의 패싱 게임은 또 다른 네덜란드 출신 지도자인 루이스 반 할에 의해 완성됐다. 그는 바르셀로나의 지휘봉을 잡고 있을 때 팀의 유소년 아카데미를 거친 사비, 이니에스타, 푸욜 등에게 기회를 줬다.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 스페인이 우승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던 이 세 선수는 실전에서 패싱 게임에 눈을 떴다. 어떻게 동료 선수를 활용해야 하는지도 터득했다.
반 할 감독은 패싱 게임을 바르셀로나에 정착시키기 위해 최고 스타인 브라질의 히바우두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네 드리블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팀을 위해서 동료에게 패스를 하라"고 윽박질렀다. 젊은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이 말에 힘을 얻었다. 한 경기에서 600번 정도 패스를 주고 받았던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패스가 날카로워질 수밖에 없었다.
반 할 감독은 작은 체구를 가진 스페인 선수들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좁은 공간에서도 통할 수 있는 정교한 패스워크에 모든 희망을 걸었다.
드리블 천재들의 좌절
현대 축구에서 드리블은 보는 재미를 주지만 독이 되는 경우가 많다. 드리블 아티스트들이 실력을 발휘할 공간이 부족해서다. 공간이 생긴다 해도 곧 협력수비 때문에 포위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1980년대를 풍미했던 브라질의 소크라테스가 예전처럼 시원하게 드리블 돌파가 나오려면 "필드 플레이어의 숫자를 8명으로 줄여야 빈 공간이 생겨 가능하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특히 매 경기가 살얼음판같이 진행되는 월드컵에서는 더 그렇다. 남아공 월드컵 직전 가장 주목 받던 스타는 메시와 호날두였다. 두 선수는 기본적으로 드리블러다. 혼자서는 쉽게 막을 수 없다. 그렇지만 빠른 패스가 동반되지 않는 드리블로는 한 두 경기는 이길 수 있어도 그 이상은 쉽지 않다.
팀 플레이가 작동되지 않은 채 몇몇 스타급 선수들의 드리블만으로 월드컵 패권을 차지한다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다. 농구경기와 같은 스피드로 전개되는 현대 축구에서 멋있지만 느린 개인 드리블은 무용지물이다. 상대 팀의 수비 전술도 몰라보게 발전했다. 드리블로 볼을 끌다 차단당하면 되레 역습의 빌미를 제공한다.
안정된 수비를 앞세운 실리축구가 판을 쳤던 남아공에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축구가 재미를 못 본 이유다. 과거에 비해서 이 두 팀의 개인 드리블이 몰라 보게 줄었지만 유럽 정상급 팀과 비교하면 여전히 많았다.
패스의 달인들이 함께 부른 스페인 축구의 합창
스페인 축구가 배출한 최고의 스트라이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말은 월드컵이 끝날 때마다 메아리쳤다. "스페인은 전례 없이 잘 싸웠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졌다." 하지만 이번 월드컵 우승으로 이 말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스페인은 언제나 그렇듯이 잘 싸웠고, 전례 없이 이겼다."
스페인 축구는 지금까지 화려한 개인기로 무장한 축구 천재들이 주도해왔다. 하지만 그들의 개인기는 남미 선수들에 못 미쳤다. 반대로 조직력 측면에서는 다른 유럽 축구 강호에 열세였다.
남아공 월드컵에 출전했던 스페인 선수들은 축구 천재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들은 축구를 더 이상 낭만적인 예술로 보지 않는다. 쓸데없는 드리블은 최소화했다. 대신 끊임없이 동료들과 교감할 수 있는 패스의 달인이 됐다. 골이 나오지 않아도 초조해 하지 않고 침착하게 그들의 경기 방식을 고수했다.
모든 선수가 짧은 순간이지만 공과 자주 접촉하며 경기장을 폭넓게 썼다. 80퍼센트를 기록한 스페인의 패스 성공률은 이렇게 선수들의 능력이 한데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그런 점에서 스페인 선수들은 모두 주인공이었다.
무엇보다 스페인을 월드컵 우승으로 이끈 패싱 게임이 바르셀로나에서 싹텄다는 점이 뜻깊다. 36년 간 계속됐던 프랑코 정권의 탄압 때문에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스페인 대표팀보다 바르셀로나 축구팀을 가슴으로 응원해 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의 가슴 속에는 스페인 대표팀의 자리도 생겼다. 마드리드 뿐 아니라 바르셀로나에서도 '스페인 만세'가 울려 퍼졌다. 지역 감정도 초월한 스페인 축구의 합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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