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시안>이 창간하던 2001년 9월, 저는 포클레인이 바위를 깎고 나무가 쓰러지는 현장 근처에 앉아 우는 일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들고 다니는 전화가 있다는 것도, 컴퓨터라는 물건이 어떤 일을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수행은 죽 떠먹은 자리처럼 진전이 없었지만 세상은 저와 무관하게 잘 돌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눈물을 닦고 처음 구입한 물건은 지도와 나침반이었습니다. 발품으로 산을 측량하며 수없이 천성산을 오르내렸습니다. 제 딴에는 오차 범위를 생각하고 한 자리를 3번 이상 측량했습니다. 경부고속철도는 18개의 크고 작은 늪 주변과 6개의 계곡 아래를 직선으로 관통하고 있었습니다.
관통로 주변에는 도롱뇽을 포함한 30여 종의 법적 보호 동·식물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놓고 한 생태학 박사는 "1년 동안 천성산을 다녔지만 도롱뇽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증언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도롱뇽밖에 보지 못하는 스님"으로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롱뇽으로 대표되는 천성산 동·식물의 고통은 곧 인간의 고통으로 이어질 게 뻔합니다. 저는 바로 그것을 보았고 그 생태학 박사를 포함한 많은 이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아는 (비극으로 끝날) 천성산 이야기의 시작입니다.
천성산 지키기를 하면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일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단 한 번도 천성산에 오르지 않고도, 천성산을 아주 잘 알고 있더군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지명만 넣으면 한순간에 답이 돌아오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성산뿐만 아니라 '지율'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9월 언론중재위원회 심의로 확인된 천성산 공사 지연으로 인한 손실금은 145억 원입니다. 그러나 이 145억 원은 2조~35조까지 부풀려져 400번 이상 언론에 계속 보도되고 있습니다. 12곳의 중앙일간지와 2곳의 방송국에 정정 보도를 요청하는 공문을 띄웠지만 단 한 곳도 답신하는 곳이 없었습니다.
사건과 진실의 차이를 저는 천성산 지키기를 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진실을 향하는 불빛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성산 지키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 빛이 얼마나 힘겹게 빛을 내고 있는지 뼈저리게 실감한 탓입니다.
<프레시안>은 진실이 담긴 기사와는 별개로 광고료를 거절하고 무려 8개월 이상 '도롱뇽 소송인단 모집' 광고를 잘 보이는 곳에 달아주었습니다. 그 때 <프레시안>의 담당자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이런 일은 독자를 위해서 <프레시안>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랬던 <프레시안>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 광고가 실렸을 때,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 광고를 보면서 목이 메었습니다. 3년 동안 30번 이상 천성산을 함께 오르며 현장 조사에 참여했던 한 박사가 "3년 동안 끌려 다녔지만 스님이 내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이렇게 반문하며 함께 조사했던 자료를 공단 측에 넘겨주는 것을 지켜봤던 순간처럼 말입니다.
그 박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이제는 나도 살아야겠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도 살아야겠다" 이 한마디는 저와 천성산의 심장을 갈라놓았고 세상에 대한 마음의 문을 건 빗장이 되었습니다. 마치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 "사랑과 우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던 것처럼…….
저 역시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때로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스님이 원하는 다른 것"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저는 분기를 참지 못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지만, 지금 한국 사회는 그것을 당연시하는 길로 가는 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프레시안>이 "나도 살아야겠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광고를 내려놓고 대신 독자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이 사회의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참여를 통한 새로운 소통의 공간이 만들어질지, 아니면 이제 이 사회에서 진실은 공허한 관념의 구호로 전락할지,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다행히 1000인이라는 적지 않은 시민이 '프레시앙' 운동에 동참했고, 얼마 전 <프레시안>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를 꿈꾸는 발행인의 글을 안도하는 기분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첫 번째 질문보다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이 훨씬 더 어려운 법입니다.
아버지께서 백지 신문이었던 <동아일보>를 10부씩 받아 보셨던 이유가 궁금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목수로 생업을 꾸리셨던 아버님이 10부의 신문을 받아 보았던 중대 사건이었지만 그 때 그 <동아일보>는 끝내 문을 닫았습니다. 그 때 <동아일보> 정신은 죽었습니다.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우리는 자주 유혹에 빠지며 선과 악의 두 갈래 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갈래 길에서 방황했던 시간들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진다면' 자기 안의 모순은 극복되고 선은 더욱 소중해지며 공익의 가치는 확장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여전히 인적이 드물고 때론 험난한 길이 되겠지요. 언제나 <프레시안>이 선택한 길에 선한 빛이 내려 우리 모두를 인도하는 길이 되기를 바라며 두 손을 모읍니다.
"훗날, 먼 훗날에 우리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면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우리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
산막에서 지율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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