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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을과의 인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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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마을과의 인연 2

[김정헌의 '예술가가 사는 마을']<35>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기념전'

농촌과 마을에 더 가까이 접근할 수 있었던 계기는 100년 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혁명'이었다.

내가 공주대에 있으면서 공주 지역사회와 인연을 맺은 것도 다 '동학농민혁명'과 관련이 있다. 공주에는 이 동학농민혁명의 유명한 유적지인 '우금티'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1894년 10월에서 11월 정도였으리라.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혁명군은 기세를 올려 전주를 함락하고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들고 기세를 올려 한양으로 진격중이었다.

당황한 왕조는 일본군을 끌어 들여 공주 우금티에 진을 쳤다. 최대 10만명으로 추산되는 농민군들은 논산과 연산들을 지나 공주를 지쳐들어 갔다. 그러나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농민군들은 기관총 등 최신 무기로 무장한 우금고개에서 기다리는 일본군들에게 추풍낙엽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몇 만 명의 농민군이 무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민란'이 아니라 최초의 농민혁명이라고 부를 만 한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이런 근대사와 관련된 유적지 때문인지 자연히 나는 우리의 '근대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한 세기 전에 일어났었던 대규모 농민혁명이 좌절된 후 동학농민군들의 후손들은 철저하게 신원을 숨긴 채 숨어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에도 관심을 가졌다.

한 세기 동안 진행된 근대화의 과정에서 농사와 농사꾼을 우습게보고 천시한 것도 다 이런 역사적인 사건-동학농민혁명의 좌절에서 기인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러면 그 당시로 되돌아 가보자.

1994년은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이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여기저기에서 준비되고 있었다. 특히 역사학계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종교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유적지가 있는 지역에서는 거의 다 100주년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1993년도부터 나는 미술계의 뜻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이런 역사적인 전시회에 동참하겠다는 미술가가 100 여 명 가까이 되었다. 조직위를 구성하고 대규모 전시를 뒷받침에 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와 기업 등에 후원을 요청 하는 등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역사학계의 여러 선생들, 이이화, 이태호, 유홍준과 지역의 향토사학자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소설을 집필 중이던 소설가 송기숙 등의 안내와 지원을 받으면서 자원한 미술가들과 여러 차례 답사를 다녔다.

이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현장 답사를 통해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온갖 착취와 억압으로 기층민중인 농민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들 수 밖에 없었던 백 년 전의 현실이 현장 답사 중에 마주친 오늘의 현실에 자주 오버랩 되기도 했었다.

또 답사 중에 농사에 의욕을 잃고 어떡하면 이 천덕꾸래기가 된 농사를 벗어나려는 많은 현장의 농민들을 만나기도 했다. 또 그들은 자기네들의 조상들이 이 '동학란'으로 규정된 '동학농민혁명'과는 애써 무관하다고 주장을 하거나 숨기고들 살고 있었다.

답사 중 내가 가장 주목했던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는 정읍 고부에 있는 '말목장터 감나무'였다. 그 감나무는 수령이 100년 쯤 됐을까? 그 당시에도 이렇게 큰 나무는 아니었을 테지만 이 감나무 밑에서 봉기한 농민군들이 집결했다고 한다.

나는 이 감나무 밑에 어른거리는 농민군들이 실제 보이는 듯했다. 녹두장군을 노래한 '새야 새야 파란새야 녹두 밭에·…'의 파란새가 감나무 밑을 떠돌고 있는 듯이도 생각됐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이 전시회- 동학농민혁명 100주년 전시회에 출품한 '아직도 말목장터 감나무 밑에 서 있는…' 이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이 전시회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자료전까지 갖춘 대규모 전시회였다. 예술의 전당 전시관 전 층을 다 사용해서 열렸고 전주 등에 순회전 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갔고 그 동안에 숨죽이고 살았던 농민군들의 후손들이 찾아와 눈물을 훔친 이가 적지 않았다.


이 전시회는 나로 하여금 새로운 역사화에 눈뜨게 해 주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이후의 우리의 근현대사가 당연히 내가 주목했던 대상이었다. 혁명이 실패하여 전봉준이 압송되던 그 때서부터 우리의 수난사가 계속된 셈이며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일제의 수탈로 민중들의 삶은 더욱 나락으로 굴러 떨어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해방과 해방공간에서의 좌우의 대립, 남북의 분단, 6.25 등을 거치면서 이 한반도의 민중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렸다. 올바르게 어디 한 곳 정착할 수도 없이 부유하는 삶을 살았으며 농어촌의 전래 마을들도 주민들끼리 반목과 갈등을 일삼았다. 전통적인 마을에서 유지돼 왔던 마을 공동체 정신도 이런 근현대의 수난과 질곡의 과정에서 산산히 붕괴되고 말았다.

익히 알려진대로 박정희시대 개발을 중심으로 한 근대화와 산업화의 와중에서 농어촌의 젊은 인력들은 거의 도시로 빠져나가고 농어촌은 공동화, 노령화되었다.

동학농민혁명의 실패 후 지금까지 100년 이상의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제일 희생이 큰 것이 바로 농어촌이란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의 우리도 바로 이런 농어촌의 희생의 댓가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희생은 지금도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아직도 지역에서는 토지를 매개로해서 중앙의 건설 자본들이 계속해서 개발을 부추기고 있고 농촌의 희생 위에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외국에 팔아먹기 위해 자유무역협정(FTA)을 맺거나 서두루고 있다.

한 화가로서 이런 역사적인 과정을 지켜보면서, 또 그 희생의 댓가로 지금의 내가 현존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 자신 이런 문제를 그냥 방기할 수는 없었다. 무언가는 해야 한다. 농촌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는 심리적인 강박이 나에게 수시로 찾아왔다.

그래도 화가로서 공동체로서의 마을에 대한 '가상'을 꿈 꿔 왔던 게 자연스럽게 이런 강박을 대신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대규모 전시회를 조직하는 일을 마무리 지우면서 농촌풍경을 배경으로 주민들의 삶을 내세우던 관념적인 농촌그림에서 자연스럽게 역사화 쪽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말하자면 동학농민혁명을 통하여 마을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농사에 관한 역사적인 시각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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