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27일, 전태일이 죽은 지 꼭 2주일 되던 날 청계피복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그 때부터 37년간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불꽃'이 되었다. 소설가 안재성이 청계피복노조 산 증인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청계, 내 청춘>(돌베개 펴냄)은 바로 꺼지지 않는 불꽃의 기록이다.
불꽃에 화답하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전태일이 병원으로 옮겨지자마자 불꽃을 가슴에 품은 이들이 거리로 나섰다. 최종인, 신진철, 주현민, 조병섭 등. 그들은 검붉은 피로 쓴 혈서를 손에 들고 불꽃이 된 친구가 죽음을 무릅쓰고 입에 되뇌던 구호를 외쳤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
병원으로 옮겨진 전태일 역시 그들의 불꽃에 풀무질을 했다. "우리가 하려던 일, 내가 죽고 나서라도 꼭 이뤄주게. 아무리 어렵더라도,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되네. 쉽다면 누군들 안 하겠나? 어려울 때 어려운 일 하는 것이 진짜 사람일세. 내 말 분명히 듣고 잊지 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굳어가는 온몸을 쥐어짜며 친구의 다짐을 받던 전태일은 결국 밤 10시가 조금 지나 간호사가 침대를 옮기려는 순간 세상을 떴다. "배가 고프다." 평생 가난을 극복하지 못했던, 그래서 모두가 가난을 극복하는 세상을 꿈꿨던 그의 마지막 말이다. 이제 그의 불꽃은 고스란히 어머니 이소선에게 또 친구들에게 전해졌다.
"전태일의 유언은 실현되었다. 이소선 어머니와 친구들은 그가 붙여놓은 조그마한 불씨를 되살렸다. 그리고 또다시 태어난 수많은 전태일이 그 불꽃을 거대한 불길로 피워 올렸다. 이후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이름 없는 수많은 미싱사, 재단사, 시다들이 한국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역사에 기념비적인 업적을 일궈냈다. 청계피복노조의 역사는 바로 그들의 역사다."
'다른' 전태일을 만나다
지금까지 우리는 <전태일 평전>(돌베개 펴냄)을 통해 전태일을 알았다. 변호사 조영래는 1970년대 초, 수배 상태에서 전태일의 일기를 토대로 친구의 구술을 받아 몇 년에 걸쳐 이 책을 썼다. 이렇게 힘들게 쓰인 이 책은 일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국내에서는 1983년에야 빛을 본다.
"<전태일 평전>은 수많은 노동자와 학생에게 인간의 길이 무엇인가, 진정한 사랑과 희생이 무엇인가를 가르쳤다.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치고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은 이가 없고, 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조영래는 이 책의 저자가 자신이라는 것을 공개한 개정판이 나오기 한 달 전인 1990년 12월 세상을 떴다.
<청계, 내 청춘>은 엄혹한 시절에 쓰인 <전태일 평전>에서 미처 담지 못한 전태일의 모습을 복원한다. 전태일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는 바보 흉내도 마다하지 않는" 낙천가였고, "저녁마다 단벌 바지를 잘 펴서 요 밑에 깐 뒤 아침이면 줄이 잘 선 바지를 입고 나가는" 멋쟁이였다. 또 누구보다도 상상력이 뛰어난 '공상가'였다.
"노동운동의 전통이 끊어진 지 오래인 불모의 시대에 오로지 자신의 생각만으로 노동 문제를 제기한 것도 (전태일의) 풍부한 상상력의 결과였으리라.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의 육신을 불태워 얼어붙는 사회를 녹이려 했던 것도, 이전에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전태일은 '사랑'이다
전태일은 자신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만 먹는다면 재단 기술을 이용해 끔찍한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예민했다. 그는 특히 끔찍한 노동 조건에 처해 있었던 어린 여성 노동자를 구하고자 했다. 차비를 아껴 풀빵을 사주고, 재단사가 돼서는 그들의 임금을 높이고자 애를 썼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종교적인 신념처럼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글이나 말 속에서 신의 존재나 신앙의 필요성에 대해 심각하게 언급한 적은 없었다. 그가 기독교로부터 배운 것은 신에 대한 믿음보다는 '무조건적인 사랑의 정신'이었다."
이런 전태일의 '사랑'은 청계피복노조 27년의 역사 속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된다. 그가 그토록 고통을 덜어주고자 했던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야말로 청계피복노조의 불꽃이었다. 10대 중반에 단춧구멍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던 이들이 청계피복노조 활동을 통해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노예'가 아닌 '노동자'로 거듭나는 장면은 <청계, 내 청춘>에서 가장 감동적이다.
그들은 이 과정을 통해서 마치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상처뿐만 아니라 동료의 아픔을 인식했다. 또 자신보다 더 못한 가난한 이웃의 처지에 눈을 돌리게 됐다. 그들이 사내도 견디기 힘든 온갖 고초를 버티며 청계피복노조를 지켰던 것은 이런 각성에서 비롯됐다. 만약 이들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청계피복노조 27년의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노동은 '삶'이다
<청계, 내 청춘>은 청계천 터줏대감 박명옥을 소개하며 청계피복노조 27년의 기록을 마무리한다. 한때 청계피복노조 부위원장을 했던 그는 환갑이 훨씬 넘은 나이에도 미싱을 탄다. 1956년부터 청계천에서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50년째 미싱을 타고 있는 셈이다. "노동은 그녀의 삶이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저마다 일하는 사람을 위한다며 대통령을 달라고 한다. 그러나 불꽃이 된 전태일이 각인된 27년 청계피복노조의 역사는 그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정말 "노동의 고통, 노동의 기쁨, 노동의 슬픔"을 아는가? 당신들은 자신의 불행보다 타인의 고통에 더 예민했던 전태일 정신을 기억하는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안재성은 수많은 청계피복노조 관계자의 도움으로 <청계, 내 청춘>을 쓰면서 특히 전태일과 관련해서 기존에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거나, 주목 받지 못했던 내용을 소개한다. 전태일의 분신 상황과 관련된 내용도 그 중 하나다. 애초 <전태일 평전>에는 분신할 때 김개남(가명)이라는 친구가 전태일의 몸에 불을 붙인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전태일은 스스로 몸에 불을 붙였다. 바로 옆에서 이것을 지켜본 사람은 김영문이었다. 분신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이들이 상황을 조영래에게 잘못 전달하면서, 김영문이 김개남이라는 가명으로 등장해 전태일에게 불을 붙인 것으로 <전태일 평전>에서 잘못 묘사된 것이다. 김영문은 전태일이 분신한 1년 후 군대에 가 있어서 조영래에게 직접 상황을 설명할 처지가 못 됐다. 조영래도 수배 중이어서 취재가 제한적이었다. 이런 사정 탓에 이렇게 잘못된 사실이 <전태일 평전>에 수록된 것이다. 안재성은 "잘못된 기록은 오랫동안 김영문의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고 지적한다. 조영래도 <전태일 평전>으로 마음고생을 했다. 조영래는 "자신의 글이 민주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친 좋은 면도 있는 반면, 이를 읽은 많은 젊은이들이 분신으로 죽은 것을 무척 가슴 아프게 생각했다." 안재성은 "그는 의도를 하지 않았지만 죽음을 미화함으로써 이후 많은 사람이 분신했다는 생각으로 괴로워했다"고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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