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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싸구려 애국주의'에 호소 말고 '근거'를 대라"

이형기의 학이사(學而思) 의ㆍ과학 <10> 최후엔 관료만 웃는다

정부가 논란 속에 약제비 적정화 방안을 실시한 지 1년이 지났다. 지난 2006년 12월부터 시행한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보험 급여 대상 약품을 미리 결정하는 '선별 등재(포지티브리스트)' 방식을 도입해 큰 논란이 되었다. 국내에 진출한 외국계 제약기업이 적극 이 정책을 반대하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핵심 쟁점으로 부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의료계도 양분돼 찬반 논란이 계속됐다. 한편에서는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 미흡하다며 외국계 제약기업의 신약의 약값을 더욱더 강력히 통제할 것을 주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식의 약가 통제 정책으로는 정책의 목적인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는 데 기여할 수 없다는 비판도 나왔다.

지난 6일 이형기 교수는 "정부의 1년이 지난 시점에서 평가해 보건대, 이런 식의 약가 통제 정책은 국민건강보험 재정을 아끼는 데도, 환자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관료를 위한 정책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관련 기사 : "약가 '통제', 관료 기득권 지키려는 발버둥인가?") 이 교수의 주장을 보고 보건복지부 현수엽 보험약제팀장은 즉각 반론을 보내왔다(☞관련 기사 : "다국적 제약업체와 싸워 얻은 성과, 폄훼 말라").

그러나 이형기 교수는 이 현수엽 팀장의 반론이 "제대로 된 근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싸구려 애국주의'에 호소하는 것일 뿐"이라며 조목조목 근거를 대며 재반론을 했다. <프레시안>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이런 토론이 더욱더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면서 앞으로도 이해당사자, 전문가의 토론을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프레시안>

내가 정곡을 찌르긴 찌른 모양이다. 보건복지부 현수엽 보험약제팀장이 발끈했다. 자신의 애국심도 자랑했다. 다국적 제약업체를 내세워 침탈에 나선 미국을 온 몸으로 막아 냈단다. 급기야, 현 팀장은 내 국적까지 의심하고 나섰다.

오죽 논리가 빈약했으면 이렇게 치졸한 방법에 기대 반박을 할까 싶어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현 팀장은 과연 알고 있었을까? 새뮤얼 존슨의 유명한 경구다. "애국심(에 호소하는 것)은 불한당이 동원하는 마지막 수단이다."

현 팀장은 이런 말도 했다. "비판을 하려거든 근거에 주장해서 하는 토론 문화가 필요하다." 사실 이 말은, '비판을 하려거든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라든가 '비판을 하는 사람이 근거를 대는 토론 문화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써야 옳다. '비판을 하는' 내가 '토론 문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 엘리트 관료가 이런 주술(主術) 비호응의 비문(非文)을 거리낌없이 사용했을 정도로 사정이 급하기는 급했나 보다.

어쨌든, '근거를 대라'는 말씀 잘 하셨다.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지적이니 말이다. 그럼, 준비되셨는가? 겸손히 근거를 수용할 자세가.

약제비, 오히려 증가할 것

누가 뭐래도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본질은 정부의 일방적 약가 인하다. 따라서 이 제도의 타당성을 주장하려면 약가 인하로 약제비 지출이 절감됐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현수엽 팀장은 자신의 반박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떤 자료나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대신,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효과는 향후 수년간 서서히 나타날 것"이라며 정책 집행자의 막연한 희망만을 나열한 게 고작.

사실, 현 팀장이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지금까지 얻어진 대부분의 경험적 증거들은, 약가 인하로 오히려 약제비 지출이 증가했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 주고 있으니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처럼 정부의 일방적인 통제로 약가를 낮게 유지했던 프랑스의 일인당 약제비는 고(高)약가국인 스웨덴의 세 배가 넘었다(Vogel RJ, 2004).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을 이전 기고문에서 내 주장의 '근거'로 분명히 제시했다.

프랑스만이 아니다. 독일의 약가를 100으로 했을 때, 그리스나 스페인도 상대적 약가지수가 각각 69, 77 밖에 안 되는 저(低)약가국이다(Ess SM, 2003). 하지만, 이들의 일인당 연간 총 약제비 지출은 각각 389달러, 351달러로 고약가국인 네덜란드(150달러) 또는 덴마크(156달러)보다 훨씬 높았다(Vogel RJ, 2004). 한 마디로, "약가 통제를 실시하는 나라에서 약제비 지출이 감소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Ess SM, 2003)"는 것이다.

이처럼 구체적 자료를 이용해 비판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으면서 '근거에 기반을 둔 토론 문화'를 운운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황당한 경우인가? 하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또 있다.

정부의 약가 정책, 검증된 적 없어

근거 중심 의학을 정립하는 데 앞장 서 온 '코크란 제휴(Cochrane Collaboration)'는 최근 광범위한 문헌 조사와 자료에 근거해 각종 약가 정책의 효과를 분석했다(Aaserud M, 2006). 그런데, 이들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처럼 정부의 직접 통제에 의존하는 약가 정책의 효과를 검정한 문헌(논문, 보고, 요약 등)을 '단 한 건'도 찾아내지 못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현수엽 팀장을 비롯해 이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 온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약제비 절감 효과가 지금까지 한 번도 면밀한 과학적 검증의 대상이 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수엽 팀장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선별 등재(positive list)' 방식이 "선진국 대부분이 채택하고 있는 제도"라며 옹호했다. 현 팀장은 내가 무슨 근거로 비판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단순히 미국 또는 다국적 제약업체와 표면적으로 유사한 주장을 펼친다는 이유로 남의 국적이나 의심하던 사람이다. 그러니, 갑자기 생뚱맞게 '선진국의 제도니 좋은 게 아니냐'는 식으로 말하는 게 우습다. 하지만 현 팀장의 말처럼 과연 선진국이 채택한 제도면 다 좋은 것인가?

미국은 저소득층의 보건의료서비스를 지원하기 위해 '메디케이드'라는 제도를 운용하는데, 최근 '선호 의약품 목록(Preferred Drug List, PDL)'이라는 정책을 도입했다. 약제비 지출을 통제하기 위함이다. PDL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의 선별 등재(positive list) 방식과 비슷하다. 즉, 값이 싼 의약품을 PDL로 지정해 놓고 이를 처방하는 의사에게 각종 유인책을 제공하거나, PDL에 포함되지 않는 의약품을 처방하기 전에 반드시 사유서를 첨부해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하는 등 절차를 복잡하게 만들어 저가약을 사용하도록 '반강제'한 것이다.

문제는 PDL로 약제비 지출이 줄었는지는 몰라도, 환자들의 내원, 입원, 의사 방문 등의 의료 서비스 이용이 거의 80%나 증가했다는 사실(Murawski MM, 2005). 뿐만 아니라, 연간 일인당 총 의료비 지출도 250달러나 늘어났다. 여기에다 PDL 제도 자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행정 비용을 더하면, 실제 총 지출은 훨씬 더 증가할 게 뻔하다.

그러나 문제는 지출 증가만이 아니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들이 PDL에 따라 저가약만을 사용하도록 의약품 접근권이 제한되면 39%나 더 빈번하게 의약품 사용을 중단한다는 실증적 연구 결과도 있다(Wilson J, 2005). 현수엽 팀장의 의학 지식이 어떤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고혈압처럼 장기적으로 꾸준히 치료를 받아야 하는 질병에서 치료 중단은 급격한 반동적 혈압 상승으로 이어져 치명적 결과를 낳는다는 것 정도는 알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의 약제비 지출란만 보는 정책 결정자는 줄어든 약제비에 기뻐할 것이다. 왜냐 하면, "치료 기회의 상실이 몰고 올 각종 부정적인 결과들-건강 상의 위해는 물론이고 이로 인해 증가된 다른 의료 비용도 포함해서-은 의약품 재정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기 때문이다(Burroughs VJ, 2005)." 따라서 정책을 잘 집행한 결과로 승진 기회를 얻게 된 현 팀장께는 축하를 드려야 할 일이나, 동시에 건강을 상실한 환자들의 신음 소리가 묻히게 됐다는 사실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환자 건강 악화되면 보험 재정도 '압박'

현수엽 팀장은 "약제비 적정화 방안 시행 이후 지금까지 보험 적용이 인정되지 않은 신약 총 2개를 살펴보라, 정말로 환자 부담이 증가하게 되었는가"라며 자못 예리해 보이는 듯한 질문을 해 왔다.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절망했다. 왜냐 하면, 현 팀장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족한 논리야 보충할 수 있다지만, 난독증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법이다.

"꼭 필요한 신약을 쓰려고 해도 보험 적용이 거부돼, 주머닛돈을 꺼내야 할 판이기 때문이다. 정부는 약제비 지출을 줄였지만, 환자가 대신 그 몫을 떠안은 셈이다." 이게 이전 기고문에서 내가 한 말인데, 무슨 뜻인지 쉽게 설명할 테니 제발 엉뚱한 소리는 하지 말자.

환자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되는 의약품(치료법)에 대해 매우 가격 비탄력적인 양상을 나타낸다. 아무리 비싸도 필요한 의약품을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의료인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실증적으로도, 의약품의 수요에 대한 가격탄력성(price elasticity of demand)은 대략 -0.4인 것으로 추정됐다(Vogel RJ, 2004). 절대값이 1보다 작고 0에 가까우니, 가격 비탄력적이란 말이다. 더욱이, 이는 1.3~1.8로 추정되는 의약품의 수요에 대한 소득탄력성(income elasticity of demand)과 비교했을 때 단지 22~31%에 불과한 매우 낮은 수치이다(Schieber GJ, 1992). 다시 말해, 의약품의 가격이 1% 늘더라도 의약품 사용은 단지 0.4%만 줄지만, 수입이 1% 늘면 의약품 사용이 1.3~1.8%나 증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별 등재 제도에서는 신약, 특히 혁신적인 신약이 가장 먼저 규제의 장벽에 부딪힌다. 왜냐 하면, 신약은 상대적으로 고가이며, 도입 초기에 신약의 진정한 혁신성을 판단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현 팀장의 괴이한 질문에도 신약의 보험 급여가 거부된 사실이 그대로 나와 있다.

물론,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보험 급여를 거부함으로써 원하던 대로 약제비 지출을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을 사용하려는 의사나 환자의 수요까지 공단이 통제할 수는 없다. 결국 약제비 적정화 방안으로 약가 부담이 고스란히 환자와 그 가족에게 전가되는 셈이다.

더욱이, 국가 전체로 보아서는 오히려 총 약가 부담이 증가하는 기현상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다. 왜냐 하면, 개개 환자는 보험 급여에서 제외된 신약의 가격을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결정할 수 있는, 구매력에 근거한 가격 협상 메커니즘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약가 통제, 특히 선별 등재 제도는 의약품에 대한 접근성을 떨어뜨림으로써 환자의 건강 수준을 감소시킴은 물론, 약제비를 제외한 기타 의료비의 지출을 늘려 종국에는 보험 재정을 악화시킨다는 증거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그러니 제발, 근거 어쩌고 하면서 짐짓 아는 척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더군다나, 남에게 근거를 제시하라고 강짜를 부리기에 앞서 먼저 정부부터 어떤 근거가 있는지 살펴 근거중심정책을 집행해야 할 일이 아닌가?

비싼 복제약은 왜 손 안 대나

현수엽 팀장은 약제비적정화방안을 정부가 밀어 붙인 이유의 하나로 "제약 산업의 발전도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들었다. 미안하지만, 현 팀장의 '판단'은 심하게 틀렸다. 정부가 선별 등재 제도의 모범 국가로 금과옥조처럼 외는 호주와 캐나다는 일방적인 약가 통제 정책으로 자국 내 제약기업의 경쟁 우위가 말살돼 결국 세계 시장에서 퇴출된 나라들이다.

예를 들어, 호주 정부는 의약품 연구 개발에 사용된 비용 지불을 거절하고 단지 생산비만 보전해 주었다. 캐나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강제적인 특허 양도와 복제 의약품 사용을 제도화했다. 결국, 제대로 신약 개발을 하려던 기업은 앞다퉈 캐나다를 떠났고 남겨진 것은 국내 제약산업의 몰락과 의약품의 무역 역조뿐이었다.

현수엽 팀장의 지적 중 거의 유일한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등재된 의약품이 2만 개가 훌쩍 넘는다는 통계 수치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던가? 정부다.

복지부는 지금까지도 허술하기 짝이 없는 '의약품 제조 및 품질 관리 기준(GMP)'을 운용해 왔다. 그 결과, 기본적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제약업체들이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고 엉터리 '제네릭(복제약)'을 쉽게 허가받아 생산에 돌입할 수 있도록 방임했다. 더욱이 식품의약품안전청은, 엄정한 검증을 거치지 않고도 수'십' 개의 제네릭이 한꺼번에 허가를 받도록 도왔다.

이를 위해, 도저히 기발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위탁 생동, 공동 생동 제도를 급조해 도입했다. 결국, 동일 성분에 무려 21개 이상의 제품이 등재된 의약품이 전체 의약품의 34%나 이르게 됐다(허순임, 2006). 물론, 이것은 준비가 부실했음에도 정권의 명운을 걸고 의약 분업을 밀어붙인 정부의 실책이 가져온 예견된 부작용이다.

어디 그뿐인가? 도무지 비싸야 할 필요가 없는 제네릭이 오리지날 의약품의 80%까지 가격을 받도록 방조 또는 협조해 온 것도 정부다. 결국, 의약품 개발의 무임 승차자인 제네릭에 대한 정부의 편향적 우대 조치는 각종 불공정 시장 교란 행위를 야기하는 데 필요한 자본 축적을 도왔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양심과 생각이 있다면 점유율이 70%에 달하는 제네릭부터 시장 기능에 따라 가격이 인하되도록 정부 먼저 어쭙잖은 통제를 스스로 철회할 일이다.

관료만 승자로 남을 것

결론을 맺자. 약제비 적정화 방안은 건강 수준 감소로 국민과 환자를 보건의료의 패자로 전락시키는 하책 중의 하책이다. 더 나아가, 건강 수준이 감소되면 의료 서비스 이용이 늘어나 보험 재정은 더욱 악화된다. 이 부담은 국민에게 그대로 전가될 터이므로 국민은 또 한 번 패자로 전락할 운명에 놓인다. 결국, 재량권을 극대화한 비전문적 관료들만 이 과정의 승자로 남을 것이다.

한 마디만 더 하자. 미국에 거주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다. 황우석 사태에서 나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걸핏하면 '양키의 개'니 어쩌니 하면서 내 국적 문제를 걸고 넘어졌던 것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명색이 최고 엘리트 관료라는 사람의 입에서조차 이런 식의 파시즘적 선동 구호가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졸저 <잊지 말자 황우석>(청년의사 펴냄)에서도 불안하게 예견한 것이지만, 우리 사회의 극우 파시즘 회귀 성향은 분명히 선을 넘었다. 통제 만능의 정부 주도 의약품 정책을 신봉하는 관료까지도 논리나 근거 대신 싸구려 국익(애국)주의를 외는 형편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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