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프레시안>에서 문국현 후보의 유류세 인하 방침을 둘러싼 논란을 소개한 기사가 나간 뒤, 기자의 메일함은 홍역을 치러야 했다. 수십 통의 메일은 "서민을 위한 정책인데 환영은 못할망정 비판 기사를 썼느냐"는 힐난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 중 상당수는 문 후보의 열성 지지자가 보낸 것이었다(☞관련 기사 : "문국현 '환경' 버리나…'유류세' 폐지 주장 논란").
최근 대선 후보들이 경쟁적으로 유류세 인하 방침을 밝히고 있다. 이런 정책을 누리꾼을 포함한 대다수 시민은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그러다보니 후보들도 더욱더 경쟁적으로 '유류세 때리기'에 나서고 있다. 문 후보가 이명박(10%), 정동영(20%) 후보보다 더 파격적인 "당장 30% 인하"를 얘기한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유류세를 내리는 게 서민을 위한 정책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서민을 위한다면 유류세를 내려서는 안 된다.
유류세 인하가 서민 위한 정책이라고?
"유류세는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간접세이다. 똑같은 양의 휘발유를 소비한다면 재벌이나 서민이나 똑같은 값의 세금을 내야 한다. 재벌보다 소득이 훨씬 적은 서민이 재벌과 '똑같은' 세금을 내는 것은 실질적으로 부유한 사람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더 많은 세금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류세 인하가 "서민을 위한 정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논리다. '국민 후보'를 자처하는 문국현 후보가 파격적인 유류세 인하를 주장하고, 더 나아가 "폐지"를 거론한 것도 이런 논리를 염두에 둔 것일 테다. 그러나 이런 논리가 현실에서 통하려면 따져봐야 할 것이 많다.
정부가 2006년 유류세로 거둔 세금은 23조5000억 원으로 추정된다. 2006년 전체 세금이 138조 원 걷혔으니 전체 세수의 16.9%에 이른다. 만약 문 후보의 공언대로 취임 첫 해에 유류세를 30% 인하한다면 약 6조 원의 세수가 줄어든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작은 정부'를 지향할 게 아니라면 당연히 이만큼의 세수를 충당할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논리대로라면 "서민을 위해" 유류세를 깎은 후 그 부족분을 '부유세'와 같은 방식으로 부자에게 걷은 직접세로 충당해야 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직접세를 거두려면 일대 격전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정작 유류세를 인하해 놓고 그 부족분을 또 다른 간접세로 충당한다면 유류세 인하는 '쇼'에 불과하다. 서민 입장에서는 말 그대로 '조삼모사(朝三暮四)'다.
문국현 후보를 비롯한 그 어떤 후보도 유류세를 깎아서 발생한 세수의 부족분을 어떻게 충당할지 구체적인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고작 얘기하는 것이라고는 "건설 부패를 바로 잡아서 건설 재정에서 낭비되는 25조 원으로 충당하겠다(문국현)" 정도이다. 그러나 '건설족'과의 일대 격전을 염두에 둔 이 계획이 성공할지는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막대한 외부 비용은 누가 부담할 건가?
설사 유류세를 깎은 부족분을 다른 곳에서 충당할 수 있더라도 논란거리는 여전하다. 현재 유류세는 휘발유 약 60%, 경유 약 50% 선이다. 휘발유 1리터(ℓ)의 가격을 1541.78원이라고 하면, 880.20원(60.10%)이 부가가치세, 지방주행세, 교통ㆍ에너지ㆍ환경세 등의 세금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만하다.
그러나 이런 유류세가 외국과 비교했을 때 딱히 높은 수준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휘발유에 붙는 세금 비중은 열네 번째, 경유에 붙는 세금 비중은 열아홉 번째로 중간 수준이다. 석유가 나지 않는 대다수 국가의 유류세 비중은 60% 이상으로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대다수 국가가 높은 유류세를 물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석유는 언제 고갈될지 모르는 한정된 자원이다. 더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는 석유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한다. 석유 제품에 무거운 유류세를 물리는 것은 세금을 통해 소비를 조금이라도 억제하려는 목적이었다. 석유 공급 상황이 갈수록 좋지 않으니 오히려 유류세의 필요성은 더 절실하다.
더구나 석유 제품은 소비 과정에서 환경오염, 교통 혼잡과 같은 외부 비용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볼까? 서울에서는 하루 오염 물질 배출량 38만5000톤(t)의 76%가 자동차에서 나온다. 이런 대기오염으로 매년 수도권 조기 사망자가 1만1000명에 이르고, 피해 비용이 연간 10조 원에 달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자 중앙, 지방 정부는 매년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서울시 한곳에서만 대기오염을 줄이고자 매년 2000억 원을 쓰고 있다. 서울시는 여기에 더해 2007년부터 4년간 미세먼지를 배출하는 경유를 연료로 쓰는 디젤 엔진 자동차에 여과 장치를 설치하는 데 6400억 원의 예산을 추가로 배정했다.
유류세, 올릴 수도 있다
교통 혼잡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OECD는 서울의 교통 혼잡이 초래한 외부 비용이 5조3100억 원(2002년)이라고 추정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면 휘발유, 경유를 연료로 자동차를 움직이는 이들이 좀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들이 유류세를 물지 않는다면 결국 그 비용은 고스란히 국민 전체의 몫이 된다.
유류세 26조 원 중에서 약 10조 원 정도인 교통ㆍ에너지ㆍ환경세는 특별회계로 편성돼 건설교통부, 산업자원부, 환경부 등에서 도로 건설, 대안 에너지 개발, 대기 환경 개선 등에 쓰이고 있다. 그나마 대기 환경 개선, 대안 에너지 개발보다는 도로 건설과 같은 사회간접자본(SOC) 구축에 쓰이는 돈이 더 많다.
이런 사정 탓에 조세 행정 개혁을 고민하는 이들은 "유류세가 잘못 쓰이고 있다"며 "또 다른 오염을 유발하는 도로 건설보다는 기후 변화 대응, 대안 에너지 개발과 같은 생태ㆍ환경에 걸 맞는 산업 구조로 전환하기 위한 연구 개발, 인력 육성의 재원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유류세를 내릴 것이 아니라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유럽연합(EU)을 비롯한 선진국도 유류세를 내리기는커녕 그 쓰임새를 조정하고 있다. 기후 변화, 고유가 사태 등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염두에 둔다면 앞으로 유류세는 깎기는커녕 더 높여야 할지도 모른다. 지금은 유류세를 깎을 때가 아니라, 유류세를 왜 걷어야 하는지 국민을 설득하고, 제대로 쓰는 방법을 고민할 때이다.
더구나 휘발유만 놓고 보면 지난 수년 동안 기름 값에 붙는 세금 인상은 거의 없었다. 물가 상승을 염두에 두면 실질적인 세금 부담은 오히려 낮아졌다. 2000년대 이후 국제 유가의 가파른 오름세(거의 3~4배 올랐다)와 그간 늘어난 자동차가 유발한 대기오염, 교통 혼잡 등 외부 비용을 고려하면 세금은 오히려 관대했다.
'나홀로' 승용차 타는 사람 위해 유류세 내리라고?
유류세를 줄이자는 이들이 내세우는 또 다른 논리가 있다. 바로 기름이 더 이상 '특별 소비'가 아니라 생산의 필수 요소이자 소비의 필수 요소라는 것이다. 즉 세금을 덧붙여 가격이 오른다고 해서 소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휘발유, 경유가 쌀처럼 가격 비탄력적 상품이라면 기름 값이 오르면 바로 서민 가계 부담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주장 역시 한계가 있다. 2007년 1월 첫째 주(1496.04원)와 6월 첫째 주(1620.62원)의 휘발유 평균 가격을 비교해보면 1리터당 124.58원이 올랐다. '서민(?)'들이 타고 다니는 '중형(!)' 승용차의 연료통 용량이 약 70리터이니 불과 6개월 만에 한 번씩 주유할 때마다 승용차 운전자는 8720원을 더 내는 셈이다.
중형 승용차로 '나 홀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6개월 새 기름을 주유할 때 10000원도 안 되는 돈을 더 낸다고 기름 값 소비를 줄일까? 현실은 정반대다. 언론에서는 "기름 값이 올라 서민 가계가 파탄난다"고 연일 떠드는데도 정작 '나 홀로' 승용차는 전혀 줄지 않는다. 현재 전국의 '나 홀로' 승용차 비율은 80% 수준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즉, 현재의 기름 값이 이른바 '중산층'에게는 충분히 감당할 만한 수준이라는 방증이다.
진짜 고려해야 할 이들은 이렇게 '나 홀로'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서민(?)'이 아니다. 경유 값이 오르면서 트럭을 모는 데 부담을 느끼는 진짜 '서민(!)'들, 즉 생계를 유지하고자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움직이는 이들이야말로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지원금이 나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 없이 부족하다.
진짜 서민이 걱정이라면 바로 이들의 기름 값 부담을 직접 덜어주면 된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가장 쉬운 방법은 이들에게 한 달 일정량에 한해 기름 값에 붙는 세금을 환급해 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기름 값을 탓하면서" 오늘도 온갖 외부 비용을 유발하며 '나 홀로' 승용차로 출근하는 '서민(?)'에게 정당한 세금을 매기면서 진짜 '서민(!)'도 보호할 수 있다.
기름 값 해결의 '정석'
재원 마련도 어렵지 않다. 당장 공장에서 쓰이는 중유에 붙는 세금을 올리면 된다. 우리나라에서 중유에 붙는 세금은 휘발유에 붙는 세금의 14분의 1 수준이다. 대기오염과 같은 중유가 초래하는 외부 비용이 세금에 거의 반영돼 있지 않다. 화력 발전소에서 쓰이는 석탄은 아예 세금이 없다. 이렇게 생산된 전기는 공장에 싼 값에 공급된다.
이렇게 산업 분야에 쓰이는 에너지를 싼 값에 공급하다보니 기업은 에너지 효율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 왔다. 그 결과는 뻔하다. 한국 기업은 일본, EU 등과 비교했을 때 경쟁력이 약해져 중ㆍ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에 부담을 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에너지 세금 제도를 개편하면 기름 값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겪는 서민(!)을 '직접 보조'할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야 말로 '환경' 이미지를 내세우며 '서민(!)'을 걱정하는 대통령 후보가 내놓아야 할 기름 값 해결의 '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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