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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자 '황우석', 바로 보자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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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잊지 말자 '황우석', 바로 보자 '이명박'"

[화제의 책] 이형기 교수의 <잊지 말자 황우석>

이른바 '황우석 사태'가 잦아들고 1년이 지나서 황우석 박사의 '과학 사기'의 진실을 알렸던 제보자 부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도 모르게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말을 건넸다. 반가움보다 고마움이 먼저였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거짓과 침묵이 뒤섞인 사기극이 더욱 거대해지고 그만큼 더 비극적인 상황을 경험하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정말 고마웠다.

황우석 사태를 돌이켜보면 그렇게 고마운 사람이 여럿 있다. 그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사람이 지금 소개하는 책의 저자인 이형기 교수다. 그는 당시 광기에 가까운 황우석 박사 지지 여론 속에서도 '양심에 맞는 말'을 주저하지 않았던 몇 안 되는 논자였다. 특히 과학자 사회의 규범에 부합하는 원칙을 주장한 극소수의 전문가였다.

이런 이형기 교수가 최근 <잊지 말자 황우석>(청년의사 펴냄)이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책을 펴냈다. 이 교수가 황우석 사태에 관한 책을 낸 것은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일이다. 언론인 또 나와 같은 활동가의 시선으로 황우석 사태를 평가하고 성찰한 책은 몇 권 나왔지만, 과학자의 시선으로 황우석 사태를 되돌아본 책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형기 교수는 책의 첫머리에서 아직도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황우석 박사에게 기회를 주자'는 주장을 과학자 내부의 규범에 입각해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과학자 사회에서 논문 조작과 같은 부정행위가 얼마나 경계와 배척의 대상인지, 그것을 막지 못하면 궁극적으로 과학자 공동체가 붕괴되고 말 것이라는 이 교수의 지적은 강한 힘을 갖는다.

한국 사회에서 과학 활동을 하는 개인은 있을지 몰라도, 엄격한 규범을 가진 '과학자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한국 사회에 과학자 공동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형기 교수가 <프레시안> 기고 글과 이 책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원칙을 지키는 과학자가 곳곳에서 나왔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한국의 과학자는 여전이 형식적인 강령, 지침 제정으로 자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파시즘의 도래 경고하는 우파
▲ <잊지 말자 황우석>(이형기 지음, 청년의사 펴냄, 2007). ⓒ프레시안

그러나 이 책은 황우석 사태를 기록하는 데 멈추지 않는다. 이 책은 스스로가 밝히고 있듯이 '보수적 자유주의자'가 황우석 사태를 통해 본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다.

이형기 교수가 보기에, 애초 황우석 박사의 과학 사기는 과학자 공동체 내부에서 논문 조작 사건으로 평가되고 단죄돼야 할 일일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자 공동체의 규범이 무시되고 오도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었다. 이형기 교수가 최초로 이 일에 '개입'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황우석 사태는 과학자 사회 내부의 일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사회를 격렬하게 뒤흔든 사태로 발전했다.

이런 전개는 이형기 교수의 시선을 황우석 박사의 과학 사기를 넘어서, 황우석 사태 이면에서 작동되었던 사회 구조의 문제점까지 들추게 만들었다. 이 교수는 황우석 사태를 '황우석 드라마'로 비유하면서, 황우석 박사라는 주연 이외에도 '무대 장치'로서 파시즘적 반이성주의, 조연으로서 극렬 지지자, 언론, 정부의 역할을 꼼꼼히 살피고 엄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이런 인식은 나와 동료들이 함께 쓴 <침묵과 열광 : 황우석 사태 7년의 기록>(후마니타스 펴냄)에서 주장한 바 있는 '과학기술동맹'의 성장과 붕괴라는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종국에 한국 사회에 희망이 있는지 묻고 '희망은 있다'고 답변한다. 그러나 이 답변은 아무래도 힘이 실리지 못하는 듯하다.

그가 한국 사회에 대해 불안해하는 이유는 제2, 3의 황우석 사태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특히 이형기 교수는 나중에 덧붙인 에필로그에서 '디워 논쟁'을 통해 다시 부각된 파시즘적 반이성주의에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그는 이번 대선을 통해서 보수 정권이 등장하면서 폭발할지 모를 '파시즘 폭탄'을 경고한다. 그의 우려는 어떤 좌파보다도 진지하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에서 집권한 좌편향 진보·개혁 세력의 실정으로 보수 세력에 의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높게 점쳐지는 이 시점에서 파시스트 정권 또는 대중 집단의 등장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 또는 강화를 원한다. 핍절한 삶에서 벗어나 경제적 풍요를 꿈꾸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변화를 갈망하는 대중의 에너지가 임계점에 거의 도달한 상태에서 장밋빛 미래만을 외는 탐욕스런 보수의 집권은 파시즘 폭탄의 연쇄 반응을 일으킨 뇌관으로 작용할게 거의 확실하다." (335쪽)

탐욕스러운 보수, 과연 누구인가

이 책의 부제는 '껍데기 진보와 탐욕스런 보수로부터 나라를 구하자'이다. 보수주의자인 이형기 교수가 '껍데기 진보(정치 세력)'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인다(이 교수의 이 비판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잠시 뒤로 미루겠다). 그러나 보수주의자가 보수 정치세력의 탐욕스러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흔한 것이 아니니 이를 경청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이 책의 앞부분부터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직하고 규범을 준수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에 비춰보았을 때, 일부 대중의 지지 때문에 황우석 박사에게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보수 정당 대권 후보의 태도는 그릇된 것이다. 그것은 수단 방법을 가르지 않고 표를 구걸하기 위한 '탐욕'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최근에 읽은 한 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이명박 후보의 경부운하 공약이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하다고 고발한 환경운동가의 책(<경부운하>, 오마이뉴스 펴냄)이다. 이 교수가 제2, 3의 황우석 사태라고 생각했던 '신정아 사건'이나 디워 논쟁'의 뒤를 이어, 제4의 황우석 사태가 바로 이명박 후보의 경부운하이다.

표를 끌어 모으고자 물동량을 포함한 기본적인 통계조차 왜곡하면서 개발 공약을 앞세우는 이명박 후보야말로, 이 교수가 경고한 '탐욕스런 보수'의 전형이 아닐까 생각한다. 정직한 보수주의자인 이 교수에게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일이겠다 싶어 참으로 안타깝다. 하긴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이 교수가 돋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불편한 진실

"참여정부 내 진보·개혁 세력을 '껍데기 진보'라 일컫는 이유는 우선 이들이 국가를 운영할 만한 실력이나 전문성을 전혀 갖추지 못한 '맹탕'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동시에, 진보·개혁 세력이 진보의 원리조차 충실하지 못한 '얼치기' 또는 '사이비'라는 사실도 이들을 '껍데기'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진보도 아니면서 분수에 맞지 않게 진보를 참칭(僭稱)하는 이들을 '껍데기'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도대체 더 적당한 다른 말이 또 무엇이 있을까?" (322쪽)

이형기 교수의 이런 '껍데기 진보'에 대한 비판은 참여정부를 진보·개혁 세력 혹은 좌파라고 규정하며 이 좌파 정권에게 권력을 빼앗긴 것에 울분 가득한 많은 우익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능력은 없으면서 이데올로기만 내세우고 원칙이고 뭐고 무시한 채 뒤에서는 자신들의 사적 이해만 챙기는 것이 진보·개혁 세력이라는 비판이다. 황우석 사태는 그런 무능하고 원칙 없는 진보 세력의 문제점을 그대로 내보여준 사건이라고 평가하는 듯하다. 전부 동의할 수는 없지만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대목도 없지 않다.

문제는 이 교수가 참여정부를 진보·개혁 세력이라고 지칭하여 비판하면서, 노무현 정권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 그보다 더 왼쪽에 있는 세력까지도 구분 없이 함께 묶어버렸다는 것이다. 황우석 박사에게 최고 과학자상을 수여하고 265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정부가 발표했을 때, 모든 정당이 열렬히 지지하는 가운데 외롭게 문제제기를 했던 정당은 누구인가?

황우석 박사의 난자 의혹에 대해서 모두가 덮고 가자고 했을 때, 진실 규명을 주장하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던 정당은 누군가? 벌써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 민주노동당만이 그 악역을 자처했고 황우석 사태 이후 떳떳이 '황우석 청문회'를 주장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정당이 될 수 있었다.

황우석 사태를 노무현 정권의 왼편에서 비판해온 정당의 존재를 외면해서는 곤란하며, 황우석 박사를 옹호하기 바빴던 범여권(특히, 정동영, 손학규 대선후보)과 한 묶음으로 묶어서 비판해서도 안 될 일이다.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게다가 이형기 교수가 노무현 정부를 진보·개혁 세력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집권이 가지는 상대적인 진보성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보자면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중도 우파 정권일 뿐이다.

참여정부가 고집스레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가 어찌 진보 좌파 정권의 정책일 수 있는가. 또 황우석 사태도 그 이면에는 참여정부가 이끌어가던 신자유주의 성장 동맹이 있었다. 그 신자유주의 동맹은 의료의 공공성을 최대한 축소하고 상업화를 목표로 해서 움직여나가고자 했다. 이것이 어찌 진보 좌파 정권의 모습이란 말인가.

시장의 역할에 더 큰 신뢰를 보내는 보수주의자로서의 이형기 교수의 입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과 더 가까우면 가깝지, 의료와 과학기술의 상업화에 우려를 보내면서 공공성을 강조하는 나와 같은 진보주의자의 입장에 더 가까울 수는 없다.

또 '특허 수호', '국익 300조'를 외치는 황우석 극렬 지지자의 국익과 경제성장의 논리가 747을 띄우고 경부운하를 공약하는 이명박 후보의 입장에 더 친화성을 가지며, 부유세와 무상의료·무상교육을 주장했던 권영길 후보의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분명하다. 불편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진실이다.

좌우합작이 이런 것이었구나!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해낸 황우석 사태의 긍정성이 하나 있다. 황우석 사태가 나와 같은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이형기 교수와 간접적인 방식으로나마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때 황우석 사태의 해결을 위해서 일종의 '좌우합작'(다분히 심리적·정서적인 차원이겠지만)을 이루었었구나 하는 점도 깨닫게 된다.

나는 이형기 교수의 책을 <침묵과 열광>과 함께, 황우석 박사가 이화여대의 모 교수(지금 그는 한 환경단체의 공동대표다)와 함께 쓴 <나의 생명 이야기>(효형출판 펴냄) 옆에 나란히 꼽았다. 내 책장 안에서 이 교수는 나와 함께 열심히 황우석 박사를 협공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협공이 일상적이 될 때 한국 사회가 좀 더 나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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