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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만들어진 다큐' 한 편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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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 만들어진 다큐' 한 편 어때요?

[화제의 책] 조영철의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

사회과학 서적시장의 상황이 암울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건만, 이런 와중에도 지독하게 재미 없고 절대로 안 팔릴 것 같은, 그러나 '이런 책도 있구나' 라는 감동을 주는 책들이 '용감하게' 나오기도 한다.

최근 그런 책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으니 바로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조영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2007)다.

이 책은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금융세계화가 20세기 자본주의를 어떻게 변모시켰으며 경제주체들의 사회적 힘 관계와 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설명하고, "실질적 민주주의 발전을 갈망하는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한국형 민주적 시장경제 모델의 조건과 얼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냉정하게 말해, 이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라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들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주목을 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으니, 바로 500쪽이 넘는 책 안 구석구석에 담긴 방대한 분량의 데이터와 연구자료들이다. 단지 통계의 양이 많거나 논문 인용 빈도수가 높은 정도가 아니고, 관련된 모든 숫자와 이론을 집대성해 '금융세계화와 한국경제'라는 21세기 핵심 테마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 <금융세계화와 한국 경제의 진로>(조영철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2007>. ⓒ후마니타스

그래서 이 책은 꼭 숫자와 이론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이 이 두꺼운 책을 단숨에 읽어내려 가게 하는 스릴(thrill)을 선사한다.

이 책의 저자인 조영철 박사(경제학)는 과거에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대안을 찾는 노력의 일환으로 여러 권의 공저를 발간한 바 있지만, 조 박사 단독으로는 이 책이 첫 작품이다. 그는 지난 13년 간 국회에서 정부 경제정책과 예산산업의 세부내역을 분석하고 그 문제점을 찾아내는 일을 해 왔다.

신자유주의 비판자들마저 행하는 오류

조영철 박사는 이 책에서 20세기 초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을 지배한 '금융자본주의 시대'는 투기적 거품과 금융 불안을 양산한 뒤 대공황으로 종말을 고했고, 그 뒤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금융자본을 통제한 뉴딜식 관리금융이 확산된 '포드주의 시대'가 이어졌고, 1980년대부터는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으로 상징되는 보수당과 자유주의 정치세력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새로운 금융자본주의 시대를 열었다고 분석한다.

20세기 초의 금융자본주의 시대와 지금 우리가 맞닥뜨린 금융세계화 시대는 모두 "금융이 경제를 주도하던 주주자본주의 시대"라는 본질 면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과거에는 금융자본이 산업자본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진 반면 지금은 금융자본이 이른바 '거리두기'를 통해 산업자본과 경제 전반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정적으로 다르다.

"19세기 말~20세기 초의 금융자본은 산업자본을 수직적으로 지배했던 대규모 장기투자자들이었다. (…) 100년 전 투기적 유동자본이 전 세계 증권시장을 휘젓고 다니기도 했지만, 산업을 책임지고 지배하던 금융자본은 위기 징후가 보이면 군집행동(herding behavior)으로 위기를 증폭시키는 금융유동성의 포트폴리오 투자자들과는 달랐다. 현재의 금융세계화 시대도 금융자본이 경제를 주도하고 있지만 거대 금융회사와 거대 기금들은 대부분 거리두기관계(arm's length relations)의 포트폴리오 투자자들이다."

이런 분석과 더불어 조 박사는 실물경제가 왕성하고 소득분배도 평등해 시민들의 삶이 가장 윤택했던 시기는 다름 아닌 포드주의 시대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주요 경제권의 실질 경제성장률을 살펴보면, 금융자본주의 시대나 신자유주의 시대의 성장률보다 포드주의 시대의 성장률이 훨씬 더 높았다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가 다른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지 몰라도 성장에서만큼은 확실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장과 세간의 인식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비판자들 일부는 신자유주의 성장 담론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들은 신자유주의가 성장에 성공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OECD 국가에서도 경제성장률을 높인 것이 아니라 하락시켰다. 즉 신자유주의는 분배는 물론 성장모델로도 성공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도 신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모델을 찾아야 한다."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국내에서 번역·출간된 <나쁜 사마리아인들>(장하준 지음, 부키 펴냄, 2007)도 다음과 같이 지적하며 신자유주의를 '신바보주의'라고 비판하고 있다.

"개발도상국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행에 옮긴 1980년대 이후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기록했던 성장률의 절반 정도의 속도(1.7%)로 성장했다. 부자나라들의 성장률도 (3.2%에서 1.7%로) 역시 둔화되었지만, 그 둔화의 정도는 개발도상국의 경우보다 크지 않았다. 이는 이들 국가가 개발도상국들만큼 신자유주의 정책을 광범위하게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주가치 경영과 재벌총수 체제의 기묘한 동거

조영철 박사는 1990년대 초 자본시장 개방과 1997년 IMF 금융위기를 겪으며 본격적으로 이런 역사적 흐름에 동참하게 된 한국 경제의 현 상황을 '주주가치 경영과 재벌총수 체제의 기묘한 동거'라고 요약한다.

사실 주주가치 경영은 재벌총수 경영과 반대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주주가치 경영이 확산되면서 주주들의 요구에 의해 재벌의 지배구조가 부분적으로나마 개혁된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도 이런 기묘한 동거가 가능한 것은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 등과 같은 친재벌적인 정책이 재벌의 내부지분율을 높여줬기 때문이다. 즉, 재벌이 강력한 주주로 등극한 것이다.

"외국인투자자들이 가져온 주주가치 경영은 재벌 총수체제와 기묘한 공존을 하고 있는 상태이다. 현재 한국 재벌 기업들은 기존의 재벌 소유구조와 주주가치 경영이 악조합을 이루고 있어 높은 배당률, 단기수익성 위주 경영, 투자율 저하, 비정규직 증가, 하도급 기업과의 장기 공존관계 약화 등 주주가치 경영의 폐해가 주로 노출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한국 사회를 이런 방향으로 이끌어 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이끌어갈 것이 틀림 없는 핵심 세력은 케인즈가 '안락사 시켜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 '금융자산계층'이다.

"금융자산계층은 1997년 체제가 낳은 가장 중요한 결과물이며, 1997년 체제를 지지하고 이끌어갈 핵심 사회세력이다. 이제 국내기관투자가와 소액주주도 외국인 주주의 발언권에 편승해 당당히 주주자본주의(stockholder capitalism)를 주장하고 있다. 금융자산계층과 투자자 집단의 사회경제적 영향력 확대는 곧 금융산업과 자본투자자의 수익률을 높이고, 금융자산계층의 발언권은 제도의 위계구조에 따라 금융-기업지배구조-노동시장-사회문화 부문 등으로 계속 파급되고 있다. 금융자산계층은 민주정부가 추진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최대 수혜자이며, 신자유주의 동맹이 한국사회를 지배할 수 있는 정치경제적 기반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문제가 아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인 조영철 박사는 환율정책, 금융정책, 재벌정책, 산업정책, 사회정책 등 각 부문별로 다양한 정책 대안을 제시한다. 이런 대안 제시와 함께, 그는 "세계화 시대가 대세이며 미국식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종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패배주의적 사고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가 결론을 대신해 한 말은 몇 번을 음미해도 좋을 것 같다.

"세계화 경쟁 격화, 산업구조 변화, 기술변화 등의 가설들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신자유주의 현상이 정치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장경쟁의 자생적 진화과정에서 저절로 형성된 것이라는 의미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 대처와 레이건으로 상징되는 보수당과 자유주의 정치세력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자본 권력 강화를 초래한 본질적 힘은 금융자유화•자본자유화 정책과 주주자본주의 개혁을 추구한 신자유주의 정책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모델 외에 대안이 없다", 주주자본주의, 효율적 자본시장 등 신자유주의 구호들은 사실(fact)이 아니라 이념이다. (…)

신자유주의는 주어진 조건에서 가장 효율적인 자원배분 방식에 적응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 여지가 없는 경제문제가 아니라 민주적 토론과 국민적 합의에 따라 지금보다 더 신자유주의 쪽으로 더 갈 수도, 현재에서 멈출 수도, 신자유주의 반대쪽으로 갈 수도 있는 정책 선택의 정치문제라는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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