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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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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화제의 책] <이현상 평전>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저 라틴아메리카 혁명가 체 게바라는 알아도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은 모른다. 마오쩌둥·호치민·티토·카스트로, 그리고 김일성은 알아도 이현상은 모른다. (…) 아름답고 훌륭한 새 세상을 만들고자 30년 동안 밤을 낮 삼아 뛰어다녔던 불요불굴한 우리 조선의 혁명가 이현상." (소설가 김성동)

이현상. 낯설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5년간 빨치산을 이끌었던 그는 지난 50년간 남쪽에서 존재를 부정당했다. 1980년대 후반 집중적으로 나온 빨치산을 소재로 한 반공 소설, 실화의 등장인물로 잠시 '상품'이 되기도 했지만 금세 잊혔다. 2000년 6월,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김대중을 안내했던 이가 그의 막내딸이라는 사실이 화제가 되는 정도였다.

이렇게 완벽히 잊힌 이현상의 삶을 복원한 <이현상 평전>(실천문학사 펴냄)이 광복절을 앞두고 출간됐다. 21세기에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골수' 사회주의자의 삶을 되돌아보는 게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왜 이현상을 '망각의 늪'에서 끄집어내느라 애를 써야 하는 것일까?

▲ <이현상 평전>(안재성 지음, 실천문학사 펴냄). ⓒ프레시안

이현상과의 갑작스런 만남


<이현상 평전>의 저자 안재성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수년간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정국을 연구하면서 '이현상'이라는 이름을 수도 없이 만났지만 따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이미 남한에 널리 이름이 알려졌고 북한에서도 영웅으로 등록돼 있는 이현상을 새삼스레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재성이 이현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엉뚱한 이유 때문이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에서 일어난 반란 사건을 추적하던 그는 순천에서 반란군이 살해한 이들의 숫자가 1700명에 이른다는 사실을 맞닥뜨린다. 물론 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목 하에 군인, 경찰이 학살한 3000명~7000명의 민간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숫자다. 그러나 그는 충격을 받았다.

"아득한 절벽을 만난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들이 반민족적인 패악을 저질렀다 해도, 혹은 개인적인 원한을 맺었다 하더라도,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포로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무더기로 학살할 수 있다면 이것은 정의가 아니었다. (…)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혁명이란 것이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혁명은 증오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닐까?"

이런 안재성의 앞에 이현상과 5년 동안 지리산에서 함께한 생존 빨치산 대원이 나타났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이현상 선생님은 여순 사건을 봉기라거나 항쟁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 수많은 인민과 혁명 역량을 훼손시킨, 크나큰 오류요 죄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그는 이현상의 삶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현상, 타고난 혁명가

이현상의 삶은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과 많이 겹친다. 게바라가 의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해방을 위해 온몸을 던진 것처럼 이현상 역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풍족한 삶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독립운동의 길로 나섰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 맨 처음 만세를 부른 이가 바로 22세의 이현상이었다.

"역사는 자신의 존재에 의거하지 않은 지식인 출신 혁명가의 나약함과 우유부단함에 관한 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 그러나 역사는 그 반대의 경우도 무수히 보여준다. 자기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없더라도 타인에 대한 애정과 정의감만으로 기득권을 버리고 변혁운동에 띄어들어 아낌없이 죽어간 사례들이다.

자신이 처한 부당한 현실에 분개하고 분노를 폭발시키는 일은 생존의 본능이지만, 타인의 고통에 분노하고 목숨까지 걸어 싸우는 일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본인이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지식인이거나 노동자이거나 아무 상관없이, 타인에 대해 얼마나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성품의 문제였다."


이현상은 타고난 혁명가였다. 그가 평생 변절하지 않고 사회주의자로 살 것을 간파한 이는 바로 일본 경찰이었다. 학생 조직을 꾸리다 두 번째로 구속된 그를 심문한 일본 경찰은 이렇게 적었다.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함. 극렬한 사회주의자로서 의지가 매우 강고하므로 '개전할' 가능성은 없음."

▲ 1926년 6·10만세운동 때 맨 선두에 섰다가 첫 감옥살이에 들어간 젊은 이현상(왼쪽),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된 이현상 사진(오른쪽). ⓒ실천문학사

인간에 대한 예의


이현상은 193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감옥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이재유, 김삼룡 등과 함께 1933년 1월 결성한 '경성 트로이카'와 4년7개월의 옥살이를 끝내고 나오자마자 1939년 1월 다시 결성한 '경성코뮤니스트그룹'은 싹이 말라버린 1930년대 국내 항일운동의 빛나는 이름이었다. (☞관련 기사 : "나의 '경성 트로이카' 친구들")

체포된 지 2년 만에 탈출한 이현상은 제3의 사회주의 항일운동 조직을 준비하던 중 해방을 맞는다. 해방된 지 사흘이 지난 1945년 8월 18일,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는 이현상, 박헌영, 이관술, 김삼룡, 이강국 등이 벅찬 감정을 안고 모인다. 그때만 해도 불과 10년도 안 돼 같은 민족, 같은 동지의 손에 대부분 목숨을 잃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48년 10월, 이현상은 남조선노동당 간부부장의 자격으로 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놓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여수, 순천의 반란군을 수습해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일제 강점기 때 그가 했던 12년간 감옥살이이보다 훨씬 더 험한 5년간의 산중 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빨치산 생활을 하던 5년 동안 이현상과 그의 동지들이 두 발 뻗고 잘 수 있었던 기간은 단 18일. 한국전쟁 중 북진하던 미군이 비껴간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에서 보낸 기간이었다. 나머지 기간에 이현상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아산, 백운산, 소백산은 물론이고 전쟁 초기에는 낙동강을 건너 국군, 미군을 교란하는 역할까지 떠맡았다.

이 기간에도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지 않았다. "이현상 선생님은 교전 중이 아닌 이상, 포로로 잡은 군인이나 경찰을 절대 죽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토벌대에 협조하다가 잡힌 민간인은 물론, 경찰 첩자로 산에 들어왔다가 잡힌 사람들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인정이 참 많은 분이었지요. 그것 때문에 나중에 온정주의라고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쟁은 끝났는가?

1953년 9월 18일, 지리산 반야봉 남쪽 빗점계곡에서 이현상은 목숨이 끊어진 채 발견됐다. 경찰이 그의 시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목에 여덟 발의 총알이 박혀 있었다. 그를 호위하다 열흘 전에 경찰에 잡힌 김진영, 김은석은 시신을 보자마자 털썩 주저앉았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이들을 본 경찰은 지리산이 떠나가라며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이현상은 비극적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껍데기만 남은 그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도록 방부제를 넣은 후 서울 시내에서 '전시'되었다. 그의 시신이 지리산 인근 섬진강 백사장에서 화장된 것은 1953년 10월 8일, 죽은 지 20일이 지난 후였다. 그의 장례는 항일운동에 평생을 바친 그의 삶을 존중한 토벌대장 차일혁이 치렀다.
▲ 이현상이 죽기 전날까지 은신했던 곳으로 알려진 빗점계곡 아지트 자리. ⓒ실천문학사

"이현상에게 더 잘 어울리는 호칭은 선생님이었다. (…) 적군이라도 교전 중이 아닌 이상 절대 죽이지 못하게 하고, 동지의 주검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던, 눈보라 치는 겨울 산중의 걸인 움막 같은 천막 속에서 추위에 떨며 홀로 책을 읽다가 스르르 지쳐 잠들곤 하던 영원한 선생님이었다.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아니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혜택을 버리고 혁명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며 춥고 배고픈 산속에서 죽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 인간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약자에 대한 동정심과 인명존중의 정신이라는 거대한 수림이 없었다면 자기희생의 마음을 지켜갈 수 없었다."


비록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운명했지만 그의 영혼은 반세기 동안 계속 현신해 왔다. 나이 어린 시다들의 고통에 마음 아파하며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노력하다가 결국 죽음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저항했던 허세욱 등으로…. 이현상과 동료들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안재성

<파업>의 작가 안재성(47). 안재성은 1986년 '노동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한 한 노동자의 이야기를 담은 <파업>을 통해 한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 받는 소설가다. 정화진, 방현석 등과 함께 노동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그는 1990년대 초반 돌연 펜을 놓았다.

안재성은 1980년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돼 첫 수배를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구로, 사북, 태백 등에서 노동운동을 하면서 누구보다도 19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달라진 세상'에서 글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으리라. 그는 1990년대를 포클레인을 운전하며, 또 농사를 지으며 보냈다(☞관련 기사 : "2004년, 전태일이 살아 있다면…").

그랬던 그가 2000년대 들어 한국의 근·현대사에 초점을 맞춘 글로 다시 돌아왔다. 특히 2004년부터 펴낸 <경성 트로이카>(사회평론 펴냄), <이관술 1902~1950>(사회평론 펴냄)은 이재유, 이관술, 김삼룡 등 그 이름조차 낯선 무명의 혁명가를 역사 속에서 불러내 큰 반향을 얻었다. 이번에 펴낸 <이현상 평전>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관련 기사 : "그의 죽음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일까").

소설가 김성동은 <이현상 평전>의 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역사가라는 사람들은 우리 조선의 혁명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 잘난 역사가들이 괄호 쳐버린 역사의 빈칸을 채워넣은 것이 작가 안재성이다. 이른바 역사가라는 이들은 이 엄청난 일을 해낸 작가 안재성에게 모자를 벗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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