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은 4일 <프레시안>에 보내온 '특별 기고'를 통해서 "6월 항쟁 2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서 또다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며 착잡한 심정을 토로했다. "계속해서 돌보지 않아" 민주주의가 "죽어버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김종철 발행인은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주권이 박탈당하는 상황에서 "대운하 같은 허망한 공약"만을 되뇌는 정치인, 엘리트에 의한 권력 독점을 꾀하는 언론을 차례로 고발하면서, "지금 우리에게 긴급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것을 촉구한다. <편집자>
6월 항쟁 20주년을 맞이하여 수많은 기념행사와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20년 전 이 무렵 우리 사회는 불완전하게나마 어떻든 군사독재체제를 종식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그 후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 민주적 직접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를 되풀이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 20년을 돌이켜보고 기념한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또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당연히 축제의 분위기가 되어야 할 이 시점에서 또다시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것을 보는 우리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하다. 거의 틀림없이 이 나라 민초들의 삶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한미 FTA를 타결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그 민초들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하지 않던 정부는 결국 6월의 마지막 날 미국에서 협정 체결을 완료하고 말았다.
한 노동자의 분신사태까지 유발하고, 격렬한 이의(異議)제기와 항의의 목소리들을 계속하여 철저히 무시하면서, 대통령은 엊그제 또다시 해외교포를 상대로 한 연설에서 "개방하면 모든 게 잘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천명하였다. 현대국가란 가능한 한 엄밀하고 과학적인 사태 파악과 정당한 절차와 여론 수렴을 통해서 합리적인 정책을 만들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한 방대한 인적·물적 조직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현대국가를 이끌도록 위임받은 지도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감(感)'과 '믿음'에 의해 중차대한 국가정책을 결정하였노라고 주저 없이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한미 FTA는 국가 주권을 박탈하는 조약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 다가오는 대선을 앞두고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보여주는 무지와 무관심은 더욱 기막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노동당 후보들을 제외하고 지금 소위 유력 정당이나 정파의 후보들이라고 알려진 인물들 가운데 과연 한미 FTA라는 협정문에 무엇이 씌어있는지 제대로 공부한 사람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최근에 <한미 FTA 핸드북>을 쓴 통상법 전문가 송기호 변호사의 간명한 말을 빌리면, 한미 FTA는 한국이라는 국가의 '패퇴'를 선언하는 조약문서이다. 특히 이 협정문의 '투자자-국가 직접 소송제'에 관한 규정에 의해서 앞으로 적어도 한국에서는 국가주권의 행사에 해당하는 공공정책을 포함한 거의 모든 공익성 사업이 극도로 위축되고, 오로지 투자자의 사적 이익이 절대적인 우선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그동안 끊임없이 지적되어온 사실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은 시장의 자유경쟁 논리에 맡겨질 뿐 사실상 국가는 할 일이 없어질 게 분명하다.
한미 FTA가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에도 적용될 터이니까, 그리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챙겨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즉, 그것은 앞으로 이 협정에 의해서 전개되는 상황이 거의 일방통행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한미FTA에는 "장차 한국이 관련 법률을 개정하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내용 혹은 양국의 의회의 승인을 얻겠다는 내용의 조항들"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에(<한미 FTA 핸드북>, 67쪽), 지금까지 미국이 다른 국가들과 체결한 FTA의 선례에 따라 다음과 같은 미국 의회에 의한 '한미FTA 이행법(履行法)'이 따라 붙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어떠한 미합중국 법률과 일치하지 않는 FTA의 그 어떠한 조항 또는 그 적용은 어떠한 미국인에게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무효이다. 미국 주(州)의 법률의 조항이나 그 적용이, 미합중국이 제기하는 절차를 제외하고는, FTA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떠한 미국인에게든, 어떠한 상황에서든, 무효로 선언될 수 없다. (북미FTA이행법 102조, 미국-칠레FTA이행법 102조, 미국-싱가포르FTA이행법 102조, 미국-호주FTA 이행법 102조) (<한미 FTA 핸드북>, 68쪽)
실질적으로 국민을 위해서, 혹은 공익을 위해서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 제대로 된 일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한미 FTA는 사실상 국가 주권을 박탈하는 조약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소위 유력 대선 후보들은 이런 문제에는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대운하'니 '열차페리'니, 혹은 '대통합'이니 '소통합'이니 하는 허망한 공약이나 자기들만의 무의미한 정치 공방에 골몰해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언론
하기는 그들이나 그들을 에워싼 사이비 전문가, 지식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풀뿌리 민중의 자립, 자치, 자율적인 삶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세력에 관해 말할 때 우리가 오늘의 주류 언론을 빼놓을 수는 없다.
한미 FTA 반대를 위해 단체행동에 나선 최근의 금속노조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하여 이 사회의 주류매체들이 정부와 한목소리가 되어 보여준 신경질적인 반응은 그들의 본심이 무엇이든 그것이 결코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었다.
정부와 언론은 금속노조의 파업결의에 대해 합법적인 노동쟁의가 아닌 정치파업은 용납할 수 없다고 엄포를 놓고, 한미 FTA로 인해 오히려 이익을 볼 자동차 기업 노동자들이 한미 FTA를 반대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주장을 폈다. 과연 자동차 자본이 아니라 자동차 기업 노동자들이 한미FTA의 수혜자가 될 수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사람이 자신의 좁은 이해관계를 넘어 행동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는 이러한 논조는 인간성에 대한 근원적인 편견과 무지, 몰이해에 수반되어 있음이 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노동자의 단체행동을 임금인상이나 직접적인 노동조건의 개선 등 매우 좁은 의미의 경제주의 투쟁으로 국한하여 왜소화하면서, '정치파업'을 사갈시(蛇蝎視)하는 정부와 언론의 논리도 매우 위험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 존립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민중의 정치적 표현의 권리를 부정하고, 소위 엘리트들에 의한 권력 독점을 합법화하려는 음험한 기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오늘날 약육강식의 논리를 구조적으로 강요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날로 심화되는 경제력의 격차는 사실상 민주주의의 필수적인 요건인 평등한 사회적 관계의 수립을 갈수록 어렵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기초적인 사실이다.
삼권분립이 제도적으로 구비되어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이 나라의 밑바닥 백성들에게 4년 내지 5년마다 투표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다고 해서 이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대한 정치적·정책적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는가. 단적으로 이 나라의 민초들에게 과연 엘리트 집단만큼의 정치적 발언권이 허용되고 있는가.
민주주의는 몇몇 제도로서 완결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단계에 이르러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돌보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생명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원점에서 다시 시작되고, 순간순간 되풀이하여 쟁취되는 것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트에 의한 권력독점 현상이 구조적으로 강화되기 쉬운 오늘의 상황에서는 민주주의의 생명은 풀뿌리 민중이 얼마나 자주, 얼마나 많이 거리로 나오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음이 분명하다. 정말로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민중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정당하게 요구하고, 그들의 민주시민으로서의 의견을 자유롭게 개진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미 FTA를 통해서 풍요로운 선진사회로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정부와 주류 언론의 일방적인 주장에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맡겨놓을 수는 없다. 오늘의 지구사회와 생태계가 처한 현실을 고려할 때, 그들이 말하는 그러한 선진사회가 과연 도래할지도 극히 의심스럽지만, 설령 그런 미래가 온다한들 그것은 그들의 미래이지 우리들의 미래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들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마지막까지 이 땅에서 살면서 함께 일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며, 자식을 낳고, 기르며, 죽어갈 이 나라의 풀뿌리 민중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 모두에게 한미 FTA가 가져다 줄 것은 장밋빛 미래이기는커녕 나락(奈落)이기 쉽다. 왜냐하면 한미 FTA는 무엇보다도 공생의 삶을 위한 토대 중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농민과 그들의 공동체를 가차 없이 사멸시키고자 하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한미 FTA는 소수 특권층의 배타적인 치부(致富)를 위하여 만인의 삶을 망가뜨리려는 야만적 논리의 결정판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은 그 소수 특권층의 누각(樓閣)도 사상누각으로 만들어버릴 공멸의 논리이다.
지금 우리에게 긴급히 필요한 것은 우리가 기어코 이러한 공멸의 논리를 넘어갈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와 희망일 것이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러한 신념과 용기와 희망은 우리들 자신의 협동적 연대의 그물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을 뿐이다.
(이 글은 곧 발행될 <녹색평론> 7~8월호(95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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