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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구조적 요인은 무엇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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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구조적 요인은 무엇인가 (1)

[강철구의 '세계사 다시 읽기']<76> 민족주의의 근대주의적 해석 비판 (12)

민족주의 연구의 방향 전환

1930, 40년대만 해도 민족주의 연구는 그 이념적 뿌리를 찾는데 주력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연구를 주도한 칼톤 헤이즈나 한스 콘은 그것을 독일의 계몽사상에서 찾으려 했다. 특히 한스 콘의 경우 그의 주 전공이 사상사였으므로 그런 태도는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통은 1960년에 <민족주의>라는 책을 쓴 엘리 케두리에게 계승되었다. 그도 역시 사상사적 입장에서 민족주의를 다루었고 민족주의의 뿌리를 칸트, 헤르더, 피히테 같은 독일 계몽사상가들에게서 찾았다.

그러나 민족주의를 그 사상적 뿌리와 연결시키는 이런 태도는 50년대 이후 사회과학자들에게는 불만족스럽게 생각되었다. 이런 정황은 겔너가 자신의 민족주의 연구가 런던경제대학에서 같이 근무하던 케두리의 민족주의 연구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되었다고 술회한 데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이것은 특히 2차 대전 이후에 아프리카, 아시아의 많은 식민지들이 해방되고 이들이 새로 독립 국가를 형성하며 국가형성이나 민족형성이 사회과학자들의 큰 관심사가 되었던 상황과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민족과 민족주의를 근대사회의 여러 구조적 현상들과 결부시키려 했다. 그것들이 그것이 산업화, 자본주의, 근대국가와 같은 '근대성'을 가져온 여러 현상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당시에 많은 국가나 민족들이 새로 형성되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인위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이 어느 정도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기까지 민족주의 연구를 주도했던 역사학은 이렇게 새로운 연구경향을 보이는 사회과학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그 연구에 직접 뛰어들며 오늘날에는 오히려 그들이 민족주의 연구를 주도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그런 경향이 민족과 민족주의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 점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근대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전근대에 대해 편파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은 문제이다. 그러면 이런 근대적 현상들이 민족이나 민족주의의 발전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자.

산업화와 민족주의

산업화와 민족주의의 관련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겔너이다. 그는 인류사를 농업적 사회조직으로부터 산업적 사회조직 형태로의 근본적인 이행으로 보았다. 근대 이전에는 모든 사람들의 삶의 영역은 지역적인 공동체에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포괄하는 국가의 정치, 종교, 군사적 엘리트들은 지역 공동체들의 일상생활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정치구조 아래에서는 많은 문화적 다양성이 허용되었다. 그래서 일부 이념적 통합이 있기는 했으나 통합된 문화는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 산업사회에서는 과거의 사회구조를 가지고는 사회를 기능적으로 통합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위해 새로운 대중문화가 등장했다. 대중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문자를 해득하고 공통의 언어를 확산시킴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유동성과 상호교환성을 용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고도문화'가 등장했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이념이 민족주의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주의와 민족은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의 구조변화의 산물인 셈이다.

겔너의 테제는 20세기 중반의 사회과학을 풍미한 산업화론, 근대화론을 대체로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이 시기의 사회과학자들은 근대사회를 산업사회로, 근대화는 산업화 및 그 모든 결과를 포함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통사회와 근대사회의 2분법을 받아들였고 그 사이에는 사회형태의 점진적 이행이 아니라 명확한 질적인 단절이 있는 것처럼 보았다. 겔너와 그를 뒤따른 근대주의자들은 이런 생각을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겔너보다 좀 앞의 사람으로 1953년에 <민족주의와 사회적 소통>을 낸 칼 도이치도 비슷하다. 그도 봉건시대에는 수평적인 문화적 정치적 연결이 엘리트층에만 제한되었고 그것이 대중에게까지 확산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환경제의 성장, 농촌인구의 사회적 동원, 언어와 여러 문화들의 공유, 도시의 성장, 사회적 소통의 확대를 통해 민족과 민족주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도 민족주의나 민족의 흥기를 산업화나 근대화가 가져오는 '반자동적' 결과로 보았다.

그러나 겔너나 이런 사람들의 주장은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다. 우선 역사적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다. 민족주의와 민족이 산업화의 결과라는 일반론만 되풀이할 뿐이지 실제 그것들이 역사과정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니 산업화와 민족주의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실제로 민족주의는 산업화와 별 관계가 없다. 전근대의 민족주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근대적 민족주의의 전형으로 보는 프랑스혁명기의 민족주의도 산업화 이전의 일이다. 19세기 중반 이탈리아와 독일의 민족주의운동도 기본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또 19세기 후반의 동유럽이나 20세기에 들어와 발전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민족주의들도 대부분 산업화와 별 관계가 없다.

초기의 산업화는 높은 수준의 문맹율과 함께 진행되었다. 그리고 민족감정을 불러일으킨다고 주장하는 대중교육은 실제로는 산업화가 한참 진행된 다음에야 가능했다. 영국의 경우도 1870년 이후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또 산업화가 고도문화를 형성하면 자연히 민족주의가 만들어진다는 식의 주장은 민족과 민족주의의 형성을 평화스럽고 순탄한 과정으로 이해하게 한다. 실제로 그것은 장기에 걸친 투쟁과 유혈의 고통스런 과정이다.

그러므로 겔너와 같은 식의 접근으로는 사람들이 왜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민족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하려 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그는 민족주의와 관련된 이런 감정적인 측면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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