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미국은 기존에 체결한 FTA상 이러한 단기 (금융) 세이프가드 조치를 허용한 전례가 없으나, 한미 FTA에서 이를 최초로 인정했다"면서 이 제도를 한미 FTA의 중요한 성과라고 선전해 왔다.
10년 전 혹독한 외환위기를 겪은 바 있는 우리로서는 금융 세이프가드의 발동 권한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금융 세이프가드를 실제로 발동할 가능성은 높지 않더라도, 세이프가드 제도의 존재 자체가 위기 때에는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는 효과를 톡톡히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25일 공개된 한미 FTA 협정문에서 그 '본모습'을 드러낸 금융 세이프가드 제도는, 정부의 대대적인 홍보와는 달리, 위기 때에도 외국환거래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 세이프가드의 발동을 위한 수많은 까다로운 발동요건들과 이 제도의 적용이 배제되는 갖가지 예외조항들로 인해 '차·포는 말할 것도 없고 졸까지 뗀 상태'에서는 외국환거래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외국인직접투자(FDI)에는 세이프가드 발동 못해
먼저 금융 세이프가드 제도의 적용이 배제되는 예외조항을 살펴보자.
한미 FTA 협정문에는 우리나라 외국환거래법상 단기 세이프가드가 협정문에 반하지 않는 조치라고 명시돼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외국환거래법이란 구체적으로 금융 세이프가드 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제6조를 가리킨다.
이에 따르면, "국제수지 및 국제금융상 심각한 어려움에 처하거나 처할 우려가 있는 경우"나 "대한민국 국내와 국외 간의 자본이동으로 인하여 통화정책, 환율정책, 기타 거시경제정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거나 초래할 우려가 있는 경우"에 재정경제부 장관은 금융 세이프가드를 발동할 수 있다.
그런데 외국인투자촉진법에 따라 투자를 한 외국인투자에 대해서는 금융 세이프가드가 적용되지 않는다. 즉, 외국인직접투자(FDI)는 금융 세이프가드 제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국제투자대조표(IIP)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인투자는 모두 6542억 달러인데, 이 가운데 증권투자와 기타투자가 각각 3573억 달러와 1790억 달러이고, 외국인직접투자(FDI)는 1180억 달러이다. 이 FDI는 금융 세이프가드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가 바로 이 경우다. 따라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팔아 그 대금을 송금하는 것은 금융 세이프가드의 적용 대상이 아니다. 심지어 금융위기가 발발한 때라고 해도 그렇다.
여기서, 론스타가 지난해 2월 초 미국 워싱턴에서 한미 FTA 협상 개시가 선언된 시기를 전후해 "한미 FTA 아래서의 투자자 보호"를 강화할 목적으로 미국의 의회와 정부를 상대로 전방위적인 로비활동을 벌였던 사실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경상거래에 세이프가드 적용?…'IMF 허락' 받아야만 가능
외국인직접투자(FDI)뿐만 아니라 "경상거래를 위한 지급 또는 송금"도 금융 세이프가드 적용대상에서 사실상 제외된다. 경상거래란 상품거래와 서비스거래, 그리고 증여, 배상 등 일방적인 이전 등을 포괄한다.
우리 정부는 "경상거래의 경우, IMF 절차에 따라 단기 세이프가드 발동이 가능함을 확인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내막을 살펴보면 이같은 정부의 주장이 심하게 과장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한미 FTA 협정문을 보면, '국제통화기금(IMF) 협정 조항' 제30(d)조에 따른 무역대금, 서비스 경상거래, 단기은행여신, 대출이자, 투자 순이익, 대출 분할 상환, 직접투자 감가상각액, 가족생계비 등은 금융 세이프가드의 제외 대상이다.
다만, "IMF 협정 조항에 규정된 절차에 합치하고", "대한민국이 그러한 조치를 미합중국과 사전 조율하는 경우"에는 경상거래에 대해서도 금융 세이프가드를 적용할 수 있게 돼 있다.
미국과 미국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IMF가 미국에 피해가 가는 경상거래에 대한 금융 세이프가드 발동을 허용할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모든 경상거래가 금융 세이프가드 적용 예외 대상으로 남는 것이다.
금융 세이프가드, 여전히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대상
예외 대상이 많은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금융 세이프가드 제도를 사실상 무력화시키는 수많은 발동 요건들도 문제다.
협정문에 따르면, 금융 세이프가드를 발동하려면 △"몰수적이지 아니할 것" △"이중 또는 다중 환율 관행을 구성하지 아니할 것" △"모든 제한된 자산에 관하여 대한민국에서 시장 수익률을 획득할 수 있는 투자자의 능력을 달리 방해하지 아니할 것" △"미합중국의 상업적·경제적 또는 재정상의 이익에 대한 불필요한 손해를 피할 것" 등 많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이 모든 요건을 충족시키기란 '면도날 위에서 구슬 굴리기'와 같을 것이다.
발동 요건에 대한 해석도 문제다. 가령, "상업적·경제적 또는 재정상의 이익"이 무엇인지, "불필요한 손해"는 무엇인지에 대한 규정이 협정문 안에는 없을 뿐더러, 이를 누가 판정할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분란거리를 만들 수 있다.
정부는 큰 틀에서 금융 세이프가드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투자자-국가 간 분쟁해결절차)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세이프가드 발동 요건의 해석을 둘러싼 분란은 여전히 ISD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금융 세이프가드가 결코 ISD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얘기다.
결국 정부가 한미 FTA의 성과라고 선전하는 금융 세이프가드 제도는 이름만 있을 뿐 내용이 없는 유명무실한 제도다. 이 제도의 목적은 긴급한 상황에서 외국환을 붙들어 두려는 것인데, 각종 예외조항과 까다로운 발동요건으로 론스타와 같은 미꾸라지는커녕 잔챙이들마저 가두기 어렵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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