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움직임은 자본이 드러내는 21세기형 야만성이 어쩌면 신종의 보편적 휴머니즘을 자극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산업국가의 모든 노동조합과 정부는 한편으로는 그러한 고삐 풀린 자본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고민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자본으로 하여금 어떤 최소한의 '신사복'을 걸치도록 유인 내지 강제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10년간의 '파업 논쟁' 종지부 찍은 독일 법원
이미 독일에서는 90년대 이후 '사회적 대화', 아니 노사관계 전반에서 가장 첨예한 테마가 되어 버린 것이 소위 '생산지 이전(Standortverlagerung)' 현상이다. 베를린 장벽의 철거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동구권의 개방, 그리고 그들 나라들이 자본주의로 탈바꿈하면서 추진한 해외투자 유치 전략의 매력에 이끌려 너도나도 매년 아니 매일 엄청나게 많은 독일 기업이 동방으로 떠나갔다. 독일 내에서도 도시별, 지역별 인건비 격차를 계산하여 서독 지역을 떠나 동독 지역으로, 남부 독일에서 북부 독일로 손쉽게 이동해 다니는 모습은 이미 예사롭다. 독일에 투자한 외국 기업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러한 '떠남의 엄포'가 노사관계상의 권력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정치경제학적인 사실과 기존의 독일의 노사관계 시스템을 흔든다는 점이다. 자본의 기동성을 본질적으로 규제하는 권력 수단을 지니지 못한 노동자와 그들의 조직체들(노동조합 혹은 노동평의회)은 "떠나는 그대, 조금만 더 늦게 떠나준다면…" 하며, 임금을 낮춰주는 대신 "언제까지 이곳에서의 생산 규모와 고용 규모를 유지한다"는 내용의 계약을 사측과 체결해 왔다. 이러한 관행의 점진적인 확산이야말로 지난 세기에 정착된 독일식의 산별교섭 체계가 기업별 수준으로 교섭의 지점을 이동하는 결과를 초래한 핵심적인 이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한편, 대화조차 거부하고 떠나려는 더 과격한 자본에게 일부 노동조합은 파업으로 맞섰다. 이는 의제의 성격상 기존의 파업 관련 규제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었기에 노동 행정관련 법원 당국자들을 골치 아프게 했다. 무엇보다도 생산지 이전이라고 하는 '기업 경영상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제어하겠다는 명목으로 벌이는 노조의 단체행동이 파업 성립 요건을 충족시키느냐 마느냐의 본질적인 문제에서부터 논란이 일었다.
자본 측은 이 문제가 의제의 성격상 파업권을 지니는 노동조합(Gewerkschaft)이 아니라 기업 내에서 산업 평화의 의무와 협의의 권리만을 지니는 노동평의회(Betriebsrat)와 대화할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노조들은 보다 전략적으로 이 문제를 사고하며 개별 기업 노동자들의 분노를 조직화했고, 개입의 명목은 어디까지나 교섭의 활성화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며 그것을 정당화는 논리를 폈다.
최근 독일의 사법부는 드디어 이러한 야생마 같은 자본의 뜀박질에 고삐를 묶고 노동에게 그 말고삐의 한 가닥을 건내 주는 판결을 내렸다. 4월 24일 동독 지역의 소도시 에어푸르트에 위치한 연방노동법원(Bundesarbeitsgericht)이 "기업의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근로자의) 경제적인 손실을 메우거나 완화하려는 의도로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경우에 노동조합은 파업을 벌일 수 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법원의 최종 판결문을 공고한 것이다.
이는 근 10년간 진행된 '파업요건론'의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판결이었다. 보수적 성향의 경제전문지 <한델스블랏(Handelsblatt)>은 이 결정을 "독일 노동법원이 노동조합에게 선사해 준 역사적 승리"라고 평하며 크게 다루었다 (한델스블랏 4월 26일자 3면). 이 결정을 통해 독일의 사용자들이 생산지를 이전하는 결정은, 이 신문의 표현을 빌자면, 훨씬 "더 길고 값비싼" 것이 되었다.
이제 기존에 제도의 외곽에서 횡행되었던 자본의 신종 야만을 독일의 노사관계 체계 한가운데로 통합시켜내는 제도적인 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파업이 가능하다"는 말이 파업에서의 승리를 보장해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정든 일터를 하루아침에 황폐화시키고 야속히 떠나려는 사용자의 등을 향해 '파업이라도 벌여 볼 수 있는' 인륜적인 항거와 분노의 몸짓을 정당화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것은 또한 사회적 합의주의의 독일식 관행을 세계화의 컨텍스트로 적극적으로 확산시켜내려는 제도 권력 실행자들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결정에 대해 독일 사용자단체의 한 관계자는 기업이 "노조와 노동평의회의 이빨에 물리게 되었다"고 불평을 늘어놓으며, "향후 노동조합은 보다 책임 있는 주체로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는 자신의 개입을 증대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노동에게 방어적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자율적인 노사 간의 파트너십을 확대시키는 의도를 결정의 근거로 삼았다. 세계화의 도전을 받아들이되 "독일식 모델을 강화하자"는 지향성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기업이 떠날 때의 예의
필자는 최근 한국 모 대기업의 노동조합 간부를 독일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현재 자신의 회사가 엄청난 야심을 갖고 향후 10여 년 내에 세계 시장의 수위를 점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 대부분이 해외 투자이며, 더불어 현재 국내의 생산 기반조차 축소하려는 계획이라며 한숨을 짓는 모습을 접했다. 더 답답한 것은 그러한 문제가 야기할 사태가 불 보듯이 훤한데도 자신을 포함한 노동조합 진영이 이 문제를 어떻게 '치고 나가야 할지'에 대해 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언제부턴가 우리에게는 '기업 하기 좋은 나라'가 '살기 좋은 우리나라'의 21세기적 이념형인 것처럼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 마음대로 떠나고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 주는 것이 '기업 하기 좋은 조건'으로 해석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위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로 가자는 것이 선진화의 외길인 양 외쳐졌다.
그러나 동독의 소도시에서 어느 봄날 빨간 옷을 입은-독일은 법관들이 붉은 색 옷을 입고 법전의 표지도 붉은 색이다-법관들이 내린 이러한 결정은 대륙의 동쪽 끝에 그러한 결정과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고 있는 듯한 동방예의지국인 우리에게 단적으로 간결한 메시지를 전한다. '떠날 때는 말없이'가 아니라 '꼭 합의하고 예의를 갖추고 떠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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