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야릇하고, 조금은 신나고, 조금은 들뜬 듯한 휴대전화 컬러링. 얼마 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한라산 148km 트레일런의 결승점을 밟은 '울트라 여왕' 김순임(53) 씨와 통화를 시도하면서 듣게 된 휴대전화 연결음이다. 막강 체력을 자랑하는 여성 울트라마라토너에 대해 가졌던 선입견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전해오는 목소리는 애교 섞인 경상도 사투리. 경남 통영 출신임을 알고 전화했지만 다소 거친 바닷가의 사투리와는 차이가 있었다.
미소가 고운 소녀 같은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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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울트라대회에서 입상을 휩쓴 그녀는 지난 3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열린 2007 한라산 148km 트레일런에서 24시간03초로 여성 1위를 차지했다. 해안을 따라 제주도를 일주하는 200km 코스와, 제주시에서 서귀포까지 달리는 100km 코스와는 달리 148km 부문은 한라산의 종주 코스로서 그때까지 여자가 한 번도 완주한 적이 없는 난코스이다. 총 20명이 완주한 이 대회에서 그녀는 여성 1위인 동시에 남녀 통틀어 3위를 차지하여 다시 한 번 그 명성을 확인시켜 주었다.
"작년에 한반도 횡단 308km를 완주한 후 '한라산 트레일런은 아직까지 여자가 도전해본 적이 없다. 한번 시도해보라'는 주변의 권유가 있었어요. 이번 대회는 출발 직후부터 한라산에 강풍과 비가 몰아쳤고, 짙은 안개가 가득했으며, 산 곳곳에 남아있는 잔설들로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살아 돌아온 것만도 감사한 일이에요."
이번 한라산 종주는 올해 그녀가 세운 세 가지 목표 중 첫 번째였다. 두 번째 목표는 4월 말에 열리는 성지순례 222km 울트라마라톤이고, 마지막 목표는 7월로 예정된 한반도 종단 637km이다.
지금까지 울트라마라톤을 30여회 완주했다. 최근 들어서는 한 달에 한두 개의 울트라대회에 나가는데, 세어본 적이 없어서 정확한 횟수를 모른다. 일단 참가한 대회에서는 모두 입상한 것으로 기억한다. 울트라대회가 없을 때는 5km, 10km, 하프코스, 풀코스 등의 대회에 골고루 참가한다. 참고로 그녀의 3∼4월 대회 참가일정을 보면 "악" 소리가 날 정도다.
지난 3월 4일 서울마라톤 풀코스 참가(3시간45분56초-최악의 풀코스 기록이었지만 연대별 1위 차지), 3월 10일 무지원 100km 울트라(11시간42분, 여자 1위), 3월 18일 동아 마라톤(3시간35분11초), 3월 25일 불암·수락 산악마라톤 18km(2시간15분, 여자 3위), 3월 31일 148km 한라산 종주(24시간03초, 여자 1위). 3월 대회에 참가해 달린 거리만 332.39km이다.
4월을 살펴보면, 4월 8일 서산 마라톤 10km(45분33초, 장년부 7위), 4월 15일 제2회 아산 산악마라톤 15km(1시간53분, 여자 5위-산악 마라톤에서 최악의 등수란다)에 이어 4월 22일 칠갑산 산악마라톤 15km, 4월 27∼29일 성지순례 222km가 예정돼 있다. 아무리 울트라의 여왕이라지만 이 정도면 거의 초인적이다. 그렇게 많은 거리를 뛰면서도 지금까지 부상을 입은 적이 거의 없다.
"몸에 무리가 안 가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몸이 만들어지면 부상을 잘 안 당해요. 짧은 거리를 달리는 주자들은 속도가 워낙 빠르고, 인터벌 훈련도 자주 하니까 부상을 입죠. 나이가 들수록 울트라가 좋아요. 인간적인 면들이 많거든요. 짧은 거리의 대회에 나가면 기록 경쟁을 하느라 주자들끼리 대화를 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요. 그런데 울트라는 처음 만나도 함께 얘기를 나누고, 보조가 맞으면 함께 뛰는 동안 동지가 되고, 뛰다가 자연스럽게 헤어지기도 하죠. 별다른 인사 없이 헤어져도 다음 대회에서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친숙할 수가 없어요. 끈끈한 동지애 같은 것이 생기지요"라고 대답한다.
그녀가 말하는 짧은 거리에는 풀코스도 포함돼 있다. 지난 3월 동아 마라톤 완주 이후 3주 만에 참가한 물사랑 마라톤 풀코스에서 허우적대다가 컨디션이 돌아오지 않아 애먹고 있는 필자에게는 참 기죽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3시간20분
2000년에 마라톤을 시작했으며, 울트라는 2년 전 시작했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2002년에 세운 3시간20분, 10km 최고기록은 39분이다. 지금이야 여성 주자들의 기록이 워낙 빨라졌지만 그 당시에는 대회에 참가하면 상위 입상을 휩쓸었다. 첫 울트라는 2005년 북한강 울트라 105km 코스였는데, 12시간대에 완주했지만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울트라 안 한다'는 결심만 되씹으면서 달렸다. 100km 울트라는 9시간40분의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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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 때는 잠이 올 때죠. 잠만 안 오면 웬만한 남자는 다 따라잡겠는데…. 졸려서 갈 지(之) 자로 뛰고 있으면 뒤에서 '김순임 씨 차옵니다!' 하고 알려주기도 해요. 긴 거리를 달리다보면 앞뒤에 아무도 없이 오랜 시간을 달리기도 합니다. 어두울 때 내 그림자에 깜짝 놀라기도 하고, 꼭 뒤에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아서 자꾸만 뒤를 쳐다보기도 해요. 깜깜한 길에서 40km 정도를 한 사람도 못 만나고 혼자 달린 적도 있어요. 빨리 뛰어가서 쉬어야겠다는 생각만 하지요."
1주일에 세 번은 오전에 서울 아차산을 찾는다. 두 번은 속보로 걷고, 한 번은 뛴다고 한다. 1주일에 네 번은 오후 4시 30분쯤 저녁식사를 한 후 6시쯤 한강에서 10km 조깅을 한다. 입상 경력이나 기록에 비하면 소박한 훈련량이다. 대회에서 뛰는 거리가 워낙 많으니 대회 출전이 곧 연습이 되는 셈이다. 그녀에게 10km나 하프코스는 '인터벌'이고, 풀코스는 'LSD'인 셈이다.
평소에 산을 즐겨 찾는 것 말고 인터벌이나 특별한 보강운동은 하지 않는다. 윗몸일으키기와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는 아령(덤벨) 운동이 보강운동의 전부다. 하지만 워낙 상체가 잘 발달되어 출발에서부터 골인 때까지 흐트러짐 없이 똑같은 자세를 유지한다.
"포기하지도, 걷지도 않는다"
"제가 특별히 잘 뛰는 건 아닙니다. 울트라마라톤대회에 나가면 스타트가 굉장히 늦은 편이거든요. 단지 사람들이 지칠 때쯤에도 저는 처음 페이스를 계속 유지하기 때문에 후반에 많은 주자들을 따라잡는 거지요. 북한강 울트라마라톤대회에 참가했을 때 80km 지점에서 추월한 남자는 서브3 주자였어요. 부산비치 울트라에서 저와 같이 공동 1위를 한 남자 주자는 제가 여자이고 나이도 있어서 곧 떨어질 줄 알고 달리다가 제가 끝까지 따라 따라붙으니까 할 수 없이 계속 뛰었데요. 완주 후 '이렇게 지독한 여자는 처음 봤다'고 하더군요. 저 때문에 퍼진 남자들, 수없이 많아요."
지금까지 수많은 대회를 뛰었어도 중도 포기는 한 번도 없었다. 몇몇 고수들은 기록이나 순위가 예상보다 안 좋으면 미련 없이 그만두기도 하지만, 기록과 상관없이 항상 끝까지 완주한다는 게 그녀의 철칙이다. '울트라마라톤에서는 걸어도 된다'는 의견에도 그녀는 반대한다.
"울트라마라톤도 마라톤인데 뛰어야지요. 먹을 때와 쉴 때, 졸 때를 제외하고는 걸어본 적이 없습니다."
먼 거리를 달리는 긴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묻자 한참을 혼자 웃다가 "남자들 수십 명은 죽지요. 우리 집 아저씨를 제일 먼저, 제일 많이 죽이고…. 이렇게 말한다고 혼나지 않으려나 모르겠네. 또 온갖 이유를 만들어서 이 남자, 저 남자를 죽이죠. 그렇게 죽이다보면 시간이 흘러가요. 때로는 내가 뛰는지 느낄 사이도 없이 무아지경에서 뛰는 경우도 있고요"라고 대답한다.
"언제가 제일 행복하냐?"는 질문에는 "골인할 때가 제일 좋죠. 대회에 나갈 때는 완주만 하자 생각합니다. 그런데 뛰다보면 마음이 달라져요. 또 많은 분들이 1등은 으레 제 차지라며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대회가 끝나면 다리가 아파서 절뚝거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남 볼까봐 못 해요"라며 웃는다. 여성 울트라마라토너 1인자로서의 부담이나 애환도 적지 않을 듯싶지만, 말할 때마다 웃음 짓는 긍정적 성격이 그 부담감을 이겨내게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독립군으로 훈련하고, 홀로 대회에 나가지만 현재 구리마라톤클럽과 굿모닝마라톤클럽에 적을 두고 있다. 매주 대회에 나가느라 함께 활동을 못 하고, 모임에도 자주 참석하지 못한다. 하지만 동호회 카페에 들어가 보면 그녀의 달콤하고 정다운 글들이 항상 회원들을 맞이한다. 이 또한 필자가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다. 나이가 있기에 인터넷과 친숙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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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마라톤클럽과 구리마라톤클럽 게시판에는 그녀의 수많은 글이 올려져 있는데, 본인이 달리면서 느낀 감상을 적은 글에서부터 피곤한 일상을 달래는 글과 음악, 마라톤에 관한 글, 울트라마라톤에 관한 자료들, 몸에 좋은 음식 소개와 그 요리법까지 글의 종류 또한 다양하다. 특히 굿모닝마라톤클럽의 게시판은 그녀가 아니면 운영이 불가능할 정도다. 강인한 체력, 굳건한 정신력과 달리 글에서는 여린 심성과 섬세한 감성, 왕언니·왕누나로서의 자상함과 따뜻함이 엿보인다.
"품위 있고, 권위 있는 마라톤 걸"
재미있는 것은 그녀의 닉네임이다. 구리마라톤클럽에서 그녀는 '품마걸', 굿모닝마라톤클럽에서는 '권마걸'이라는 닉네임을 쓰고 있다. 품마걸은 '품위 있는 마라톤 걸', 권마걸은 '권위 있는 마라톤 걸'의 준말이라고 한다. 그녀가 게시판에 올린 글 중 울트라 완주 후의 감상을 잘 나타낸 글이 있어 소개한다.
'권마걸은 여러 횐∼님들의 따땃한 성원에 힘입어 책임 완수하고 왔네요. 짧은 거리든 긴 거리든 뛴다는 그 자체! 즐런이란 없다구 봅니다. 듣기 좋은 말로 힘겨움을 최대한 줄인 말이라는 것으로 알고 있기에…. 첫 단추를 잘 끼우면 모든 게 순조롭게 이어지듯 작년에 이어 부산비치 2연패를 시작으로 올해 권마걸의 마라톤은 화려하게 시작하게 되었답니다. 많은 주자들의 당연하게 제가 첫 번째 주자로 골인하리라는 생각이, 그 자체가 완전히 스트레스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또 절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정의 표시라고 생각되기도 하구요. 뛸 때의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단 한 가지! 저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완주하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최선이고,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이고, 나이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하지요.'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녀에게 동화되어 작년 여름 60km를 뛰면서 '다시는 울트라마라톤을 하지 않겠다'고 했던 결심이 살짝 흔들린다. '저 나이에도 저렇게 하는데, 나도 한번 도전해봐? 아니지, 고수들을 만나서 눈만 높였다가는 가랑이 찢어지지'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흔든다. 하지만 그날 저녁, 어제까지 근육통 때문에 잘 달릴 수 없었던 다리 상태가 씻은 듯이 좋아져서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마라톤은 역시 정신력의 영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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