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에게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 역시 '금융투자의 수익 보장'이다. 그래서 국가는 물가인상을 야기하기 쉬운 재정 정책을 갈수록 꺼리게 된다. 투자자 입장에서 인플레이션은 앉아서 손실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런 금융투자자의 이해를 반영하는 사회운동이 한국에서도 유명해진 '소액주주운동'이나 '좋은기업지배구조운동'이다.
한편 '(금융)투자자 안보'의 정신이 편집증적인 수준까지 치달으면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Investor-State Dispute, 미국인/한국인 투자자가 한국/미국을 직접 국제중재기관에 제소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발전한다.
노무현, 김대중 정부의 계승자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금융화는 노무현 집권기에 한 단계 도약했다. IMF(국제통화기금) 금융위기 이후 한국에 강요된 신(新)금융 질서를 적극적으로 내재화하고 '우리의 역량'으로 바꿔, 다른 개발도상국에서 '한국이 당했던 그 방식'으로 금융적 이익을 추구하는 구상을 갈고 닦았던 시기가 지난 4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간접투자자산운용업법,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 등 법률 제정을 통해 금융투자의 수단, 즉 금융상품을 다양화했다. 이와 동시에 한국투자공사 등을 설립해 해외 금융회사를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를 마련했다. 새로운 '투자자 보호' 장치도 속속 도입될 예정이다.
이런 조치들이 '동북아 금융허브론'이라 불리는 국가 시책으로 추진됐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금융허브란 무엇인가.
지금 금융적 이익을 추구하는 수십 조 달러가 전 세계를 떠돌고 있다. 이같은 자금 흐름의 결절점이 바로 금융허브다. 물론 그 자금은 결절점에 잠시 머물렀다가 세계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지만, 그 순간 엄청난 규모의 수익이 금융허브에 떨어져 부와 고용을 창출한다는 것이다.
한국이 금융허브가 되려면, 예컨대, 여러 국적의 금융회사들이 한국 영토 내에서 활발한 영업활동을 벌이면서 역시 여러 국적의 자금을 위탁, 운용해야 한다. 해외 기업이 한국의 주식시장에서 사업 자금을 조달하거나, 기업 인수합병(M&A) 등을 통해 경영권을 사고팔 수 있어야 한다. 전 세계의 투자자들은 한국의 금융시장에 등록되는 각종 금융상품에 자유롭게 투자하고 안전하게 그 수익을 돌려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노무현 정부는 금융투자 상품에 대한 규제를 종전의 '포지티브 시스템(positive system, 법률로 정한 상품만 출시 가능)'에서 '네거티브 시스템(negative system, 법률로 출시 불가라고 규정한 상품 이외의 모든 것이 출시 가능)'으로 대폭 완화할 자본시장통합법을 추진하고 있다. 바로 미국이 요구하던 것이다.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르면, 증권사 등 금융투자회사는 은행의 고유 기능인 지급결제권을 가지게 된다. 이는 금융산업의 세 축인 은행-증권-보험 간의 장벽을 다시 한 번 무너뜨리는 것이다. (금융산업의 장벽이 처음으로 무너진 사건은 은행이 투자상품과 보험상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해준 것이었다.) 이 역시 미국이 요구하던 것이다.
IMF 사태 이후 계속돼 온 금융시장 자유화로, 오는 2008년이면 외환시장에서도 세이프가드(safeguard) 등 최소한의 안정화 조치를 제외한 모든 규제가 풀리게 된다.
한편 김대중 정부 이후 꾸준히 진행되었던 외자유치 정책의 결과, 국내에 법인을 설립한 해외 은행과 투자회사, 보험사들은 한국 회사와 거의 동일한 형태로 영업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허브 프로젝트로서의 한미FTA
이같은 수준의 금융시장 개방과 금융허브육성법, 자본시장통합법 등 금융시장 개방 관련 법안이 상정돼 있는 상태에서, 한미 FTA 금융 부문 협상은 진행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는 이 부문에서만큼은 당초의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했다. 그 목적이란? 바로 해외 금융기관을 국내로 끌어들이는 것, 즉 해외 금융기관이 국내에 '상업적 주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정부가 금융 부문 협상에서 내세웠던 원칙은 "상업적 주재는 포괄주의(네거티브 시스템), 국경 간 거래는 열거주의(포지티브 시스템)"였는데 그 의미를 풀어 쓰면 다음과 같다.
"한국 내에 법인을 둔 해외 금융회사에는 어떤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허용한다. 그러나 외국 금융회사가 한국 내에 법인을 두지 않고 국내 고객에게 직접 서비스를 공급하는 경우엔 엄격하게 규제한다."
물론 이는 금융허브 정책의 연장이다. 1970년대의 자유수출공단 정책이 그랬던 것처럼, 국내에 들어온 외국기업에 사실상의 특혜를 부여함으로써 고용을 촉진함과 동시에 -더욱 중요하게는- 기술이전을 유발해 토종 금융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노무현 정부의 의도는 적어도 한미 FTA 금융 부문 협상에서는 충실하게 관철됐다고 본다. 정부가 지금까지 발표한 금융 부문 협상 결과만 놓고 봐도 -그 협상 결과가 사실이라는 전제 하에- 그렇다.
해외 금융회사가 국내에 지점이나 자회사를 두지 않고, 즉 '상업적 주재'를 하지 않고 제공할 수 있는 서비스인 '국경 간(cross-border) 금융서비스' 개방 수위는 FTA 협상 타결 이전인 2007년 3월 수준으로 거의 고정됐다.
설사 한미 FTA가 비준·발효된다고 해도, 국내 법인이 없는 해외 금융회사가 국내 소비자들에게 직접 '예금 및 대출(은행업) 영업을 하거나, 보험 상품과 펀드를 판매하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한국 측이 '양보'한 것으로 발표된 투자자문, 무역 관련 보험, 국내 펀드 외환자산의 해외 위탁 등도 사실은 지난 김대중 정부 시절에 이미 개방된 부문들이다. 지금까지 발표된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책금융 기관들과 시중은행에 대한 미국의 새로운 개방 요구도 거의 차단했다.
금융허브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같은 협상 결과는 대단히 고무적인 것으로 인정할 수 있다. 특히, 농업 부문의 협상 결과와 비교해보면 '버리는 자식'과 '키우려는 자식' 간 차별이 섬뜩할 정도다.
미국에는 있으나 한국에는 없는 금융상품 및 서비스, 즉 '신금융서비스' 협상 결과도 역시 외국 금융기관에게 한국에 '상업적 주재'를 하도록 강제하는 기계(奇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타결안 내용 그 자체는 상당히 살벌하다. 미국의 금융회사는 한국에 없는 금융상품을 국내 고객에게 판매하려면 상품별로 우리 금융당국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그 '무서운' 금융감독원이 신상품 하나하나를 엄격히 심사한 뒤에야 판매 여부를 허용하겠다니 외국 금융회사들에게 죄송할 마음이 들 정도다.
그러나 다른 조건들을 고려하면 그렇지 않다. 예컨대 2009년 시행될 예정인 자본시장통합법에 따르면, 국내의 금융투자회사들은 포지티브 시스템으로, 즉 법률에서 금지하지 않는 것 이외의 모든 금융상품을 출시할 수 있게 된다. 미국 금융투자회사 역시 국내에 상업적 주재를 두기만 하면 한국 회사로 인정받아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 지사나 자회사가 없는 미국 금융투자 회사들은 국내 자산운용사를 통해서만, 그것도 신상품 하나하나에 대해 일일이 금융당국의 인가를 받아야만 한국 고객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미국 금융투자 회사들은 한국에 상업적 주재를 두는 전략을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금융허브 정책이 의도한 바로 그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배신? 개과천선?
2007년 4월 현재 국내의 진보-개혁-보수 세력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감정이 있다. 바로 노무현 정부에 대한 반감이다. 진보세력은 노무현 정권의 한미 FTA 추진을 '배신'이라 부르고, 보수세력은 '변신' 혹은 '개과천선'이라고 주장한다.
이같은 표층적 발언의 기저엔 노무현 정권이 '어느 정도 진보적 성향을 가진 동시에 종잡을 수 없이 우왕좌왕하는 철없는 세력'이란 심층적 인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인식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는 너무나 주도면밀하고 치밀하게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정책을 진전시켜 왔다. 미국과의 FTA 금융 부문 협상을 이런 자신의 목표에 철저히 종속시킬 정도였다.
이같은 횡보는 이 땅에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기초를 닦은 김대중 정부를 충실히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이미 언급했듯, 이같은 발전 전략은 경제성장이나 고용창출과는 일정한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김대중 패러다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2002년 하순 노무현 후보 캠프는 7%의 경제성장률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3~4%의 잠재성장률을 전제하고 여기에 외부충격, 즉 남-북-미 관계 정상화에 따른 북방수요 3%를 가산했던 것이다.
현재 유력한 대선 후보인 이명박 씨와 박근혜 씨 역시 7% 경제성장률을 공약하면서, 각각 경부운하와 열차 페리 등 대규모 외부충격에 따른 인위적인 수요 창출을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되게 마련인가. 이런 '우연의 일치'는 의미심장하다. 현재 우리 경제 시스템 자체로는 도저히 충분한 성장과 고용을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서술했듯이 김대중 정부 이래 한국의 집권세력은 금융 부문의 변혁을 매개로 한국의 사회경제 시스템 전체를 바꿔 왔다. 그 목표는 금융업을 중심으로 하는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으로의 산업구조 전환이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무현 정부의 국가전략은 금융허브론에서 한미 FTA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한미 FTA를 노무현 대통령 한 사람이 퇴임 전 업적을 하나라도 세우기 위한 시도나 노무현식 돌출 행동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오히려 IMF 사태 이후 새롭게 집권한 자유주의 정부들은 금융세계화라는 지구적 추세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려고 노력해 왔으며, 한미 FTA 역시 이런 추세에 놓여 있는 나름대로 진지한 국가전략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문제는 김대중-노무현식 '적극적 적응'의 '성공'이 그동안 저성장-고실업-양극화 등 서민들의 실패로 나타났고, 한미 FTA는 이같은 구조를 '역진 불가능'한 수준으로 고착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한국 시민사회가 지금 막 돌입하고 있는 'FTA 비준 정국'에서, 단지 한미 FTA가 아니라 좀 더 심층적인 주제인 금융화와, 자유주의 정부의 성공이 서민의 실패로 나타난 아이러니한 사태를 논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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