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자급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을 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있다. 아무래도 좁은 국토에 비해 인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도시농업 활성화 등 다양한 보완 대책을 마련해야겠지만 최종적인 해답은 통일농업을 통해 마련할 수 있다.
그런데 통일농업은 그 특성상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정책 방향을 결정할 수 없으며 남과 북 모두의 실정을 고려하여 상호 협의 아래 추진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농업 동향을 살펴보는 것은 통일농업 모색에서 일차적 과제다.
한계에 이른 북한의 농업정책과 통일농업
북한의 농업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식량을 자급할 수 있을 만큼 높은 생산성을 유지해 왔다. 협동농장을 중심으로 한 농업 집단화는 농업의 규모화, 기계화, 화학화를 촉진함과 동시에 농업 노동력의 효율적 운용을 보장함으로써 농업 생산성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1986년 곡물 생산량이 약 711만t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이후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소련의 붕괴와 함께 밀어닥친 일련의 위기는 북한 농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겨 주었다. 무엇보다도 석유 공급의 축소는 비료 공급의 축소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농기계의 정상적인 작동도 어렵게 만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속된 대규모 자연재해는 북한 농업의 생산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말았다.
가까스로 위기 상황을 넘긴 북한은 조속히 농업생산을 정상화하고 식량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해 갖가지 대책들을 쏟아냈다. 이들 대책은 지난날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의 환경에 맞는 보다 지속가능한 방향에서 수립되었다. 이를 몇 가지 흐름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식량 증산을 위한 4대 농업 방침. 4대 농업 방침은 종자 혁명, 두벌농사 방침, 감자 농사 혁명, 콩 농사 혁명을 총칭한다. 감자와 콩 농사의 혁명은 쌀과 옥수수에 주력했던 기존 곡물 생산 체계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쌀은 산악 지대가 많고 밭농사 위주인 북한 지역 특성에 비추어볼 때 고비용 농사일 수밖에 없다. 산악지대의 경우 남쪽 평야 지대에 비해 최고 6배의 비용이 소요되었다는 보고도 있다. 옥수수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다량의 비료가 투입되었던 대표적인 고투입 약탈형 농사였다. 게다가 옥수수는 두벌농사가 매우 제한적이었다.
북한은 이 같은 곡물 생산 체계를 과감하게 거부하고 감자와 콩 중심으로 전환했다. 그 중에서도 콩 농사는 비료를 크게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질소 보정을 통해 황폐화된 토양을 개선하는 효과를 낳는다. 또한 콩은 식물성 단백질을 공급함으로써 육류 공급의 부족을 보충해줄 수 있다. 아울러 콩은 논농사는 물론이고 밭농사에서도 다른 작물과 연계한 두벌농사가 가능하며 논두렁을 비롯한 어디서든 재배할 수 있었다. 북한의 상황에 비추어볼 때 콩은 여러 모로 매력적인 작물이었던 것이다.
둘째 생산 기반 정비. 과거 북한의 농업 생산 기반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형태였다. 대표적으로 전기로 작동하는 양수장 중심의 수리 체계를 들 수 있다. 이러한 생산 기반은 19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극심한 자연재해와 에너지 공급 부족이라는 두 가지 요인으로 사실상 붕괴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생산 기반 정비를 서두르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에너지 소모형에서 탈피해 물길의 자연흐름을 이용한 자연 유역식 수리 관계 체계를 도입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2002년에는 개천-태청호 물길 공사를 완료하여 평안남도 지역에 대한 농업용수 공급이 크게 개선되었다.
셋째 농업 관리 방식의 변화. 북한은 2002년 7ㆍ1경제관리조치(7ㆍ1조치)를 통해 제한적 범위에서 시장 기구를 활용하는 것을 기초로 가격 체계와 기업별 독립채산제를 도입하는 등 경제관리 방식에서의 의미심장한 전환을 시도하였다. 북한 자신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아래 단위의 자율과 책임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실리'를 중심으로 경제를 운영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은 농업 분야에서 매우 조심스럽지만 분명하게 변화를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고투입 약탈형 농업에서 탈피해 지속 가능한 농업을 추구함과 동시에 국가 주도에서 생산 현장 주도로 농업 관리 방식이 변화하는 것으로 집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변화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농업 생산은 기대했던 만큼의 획기적인 성과가 나오고 있지 않다. 단적으로 2005년의 곡물 생산량은 1991년 540만t에도 못 미치는 454만t에 그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지만 무엇보다도 영농 자재가 원활하게 공급되지 않은 점이 컸다. 즉 미국의 지속적인 경제 봉쇄로 외부로부터 자본과 기술의 유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생산능력의 획기적인 호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남북 간의 협력을 통해 북한의 생산 기반을 소생시켜야 하는 절박성이 제기된다.
북한의 식량 자급의 토대 마련
남북 농업 협력은 궁극적으로 통일농업을 통해 식량 자립을 실현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남과 북의 절박한 과제를 함께 해결하는 방향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남쪽의 경우 국제 농업자본으로부터 자립적 생산 기반을 확보하는 것이라면 북쪽의 경우는 취약해진 농업생산 기반을 복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전략에 입각해서 이러한 과제를 해결할 것인가. 우선 북에 대한 지원 확대를 통해 농업 생산 기반을 복원하고 그 성과를 남한 농업의 자립적 기반 강화로 연결시킴으로써 민족 전체의 식량 자급을 실현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북의 농업이 완전히 자생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는데 그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이러한 이유로 남북 농업 협력은 북쪽을 지원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특히 북쪽이 외화 부족으로 식량 수입이 어려운 조건에서 식량을 지원하는 것은 매우 절실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다.
대북 식량 차관을 포함해 남쪽의 정부와 민간단체가 1995년부터 2004년까지 북쪽에 지원한 규모는 금액으로 9억 달러를 조금 넘는 수준이다. 같은 기간 남쪽이 북쪽에 지원한 금액은 전체 국제사회가 북한에 지원한 금액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중 정부 차원의 지원액은 총 6억2000만 달러로 전체 대북 지원액의 약 3분의 2를 차지한다.
지원 품목은 쌀, 옥수수 등 곡물, 비료 등 영농자재, 식용류, 의약품 등 다양하다. 정부는 1995년 쌀 15만t, 1999년 비료 15.5만t, 2000년 비료 30만t 이외에도 차관 형식으로 쌀 30만t과 옥수수 20만t, 2001년 비료 20만t, 2002년 이후 2004년까지 대한적십자사를 통해 매년 30만t의 비료를 무상으로 지원하고 장기 저리 차관 형식으로 쌀 40만t을 제공했다. 이와는 별도로 세계식량계획을 통해 2001년부터 매년 10만t의 옥수수를 북쪽에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은 장기적인 구상 아래 북의 농업생산기반을 복원하고 남북농업협력을 증진시키는 방향에서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 그때그때의 정치적 고려가 우선되면서 추진된 경향이 강하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 통일농업을 지향하면 식량 자급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통일 한반도와 인구와 면적에서 비슷한 영국이 좋은 귀감이다. 영국은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에 입각해서 식민지에 비싼 공산품을 팔고 그 대신 값싼 식량을 수입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이러한 정책은 영국의 공업이 절대 우위를 점하고 식민지로부터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된다는 전제에서만 작동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독일, 미국 등이 공업 생산성에서 영국을 앞지르기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독일 잠수함에 의해 식량수송선이 격침되면서 대기근이 발생했다. 쓰라린 경험을 한 영국은 2차대전이 끝나자마자 농업 강화 정책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1946년 70%로 하락했던 식량자급률은 오늘날 110%를 웃돌게 되었다.
영국의 사례는 '좁은 국토에 비해 인구가 많기 때문에 식량 자급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비과학적 숙명론에 불과함을 입증한다. 통일농업을 통한 식량자급의 실현! 그것은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이며 중요한 것은 하고자 하는 의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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