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히려 실제로는 어디에서나 (정도의 차이는 크지만) 소수의 특정 집단이 소위 '기득권' 층을 이뤄 일반시민들이 누리지 못하는 상당한 정책 혜택을 즐기며 살고 있다. 다시 말해 수많은 정책과 제도들이 일반시민들의 희생 하에 소수 기득권 세력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시민이 주인이어야 할 민주국가에 이런 불공평과 불합리가 만연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이에 대한 해결책은 존재하는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부에 대해 불리하기 마련인 시민사회
시민사회와 정부가 한 정책을 놓고 갈등을 벌일 경우 대부분은 시민사회가 패한다. 시민사회 쪽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면 크게 두 가지다. 정보의 부족과 조직의 결여 탓이다.
특정 정책으로 인한 손해가 상당할지라도 일반시민들은 해당 정책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그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정부에 제대로 대항하지 못한다. 모르니까 손해를 보고도 그냥 넘어간다는 것이다.
설령 안다 할지라도 시민들의 집단행동이 정부의 정책 변화를 불러올 정도로 효과적이기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일반시민들이 하나의 정책집단으로 조직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결국 잘 모르거나 혹은 알더라도 집단적 대응이 어렵기 때문에 일반시민들은 정책적 불이익을 감내하기 일쑤란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당연하지만 일반시민들은 정책과 제도, 그리고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 충분한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를 일반시민들의 '정치 정보(political information)' 부족 현상이라고 한다.
현재 어떤 정책으로 인하여 자신이 얼마만큼의 손해를 보고 있는지, 어떠한 정치제도가 사회의 불공평을 구조화하고 있는지, 드러난 문제의 해결책과 대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해결책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정당과 정치인은 과연 존재하는지 등에 대해 정작 국가의 주인인 시민들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면, 일반시민들의 반대편에 서 있는 소수 기득권 집단은 충분한 양의 고급 정치정보를 보유하고, 그것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익(私益) 추구 행위를 효율적으로 수행한다.
이러한 정보 구도 하에 있는 민주국가의 정책결정 과정은, 말하자면, 잘 아는 소수와 무지한 다수의 정책 게임에 해당한다.
정책의 내용과 효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떻게 결정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반시민들이 그 모든 것들을 미리 알고 계획하고 대처해갈 능력이 충분한 소수 기득세력들을 이기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정부가 이들 기득 집단의 편에 설 경우 시민사회가 이를 이겨낼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조직력 또한 문제다. 규모가 큰 집단과 작은 집단 간의 정책 게임이 소집단의 승리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이는 규모가 큰 집단일수록 소위 '집단행동의 문제(collective action problem)'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회의 한 특정 집단이 구성원들의 공동이익을 위한 정책 목표를 하나 설정했을 때, 그 목표의 달성을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입법안 작성 과정에 참여한다든가, 서명을 한다거나, 거리 캠페인에 동참하거나, 혹은 회비를 납부하는 등의 행위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대집단일수록 이러한 협조를 효과적으로 확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구성원들의 수가 많은 까닭에 개개인들은 자기가 아닌 다른 이들만의 협력으로도 그 목표가 충분히 달성될 수 있으리라는, 그리하여 자신은 성공할 경우의 혜택만을 받으면 된다는, 즉 '무임승차'를 하겠다는 경향을 갖게 된다.
또 대집단이 개개인의 협조를 강제할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마련하는 일이 쉬운 것이 아니다. 결국 필요한 만큼의 협조가 확보되지 못해서 대집단의 집단행동은 목표 달성 전에 중단되곤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단의 조직화가 필요하다. 피라미드식 위계질서나 하부집단 구조 등을 만듦으로써 구성원들 간의 견제와 감시, 억제와 조장, 보상과 문책 등을 용이하게 하는 일이다. 조직 메커니즘을 활용해 물리적 대집단을 기능적 소집단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시민들에게는 이러한 조직화도 적용하기 어려운 해결책이다. 그러기에는 일반시민은 너무나 거대한 집단이기 때문이다. 결국 조직화가 어려운 일반시민들은 그 잠재적 영향력을 묻어둔 채 무력한 거대집단으로 일상을 보내기 마련이다.
요컨대, 일반적으로는 설령 정부가 대다수 국민들의 이익에 반해 소수 기득 집단에 유리한 정책을 수립·집행한다할지라도 국민들이 이를 효과적으로 막거나 시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한 마디로 정보와 조직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반시민들이 언제나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의 각성이나 정책게임의 룰이 개혁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유능한 '공익정치 기업가'(political entrepreneur)가 등장할 경우 시민사회 쪽의 문제, 즉 정보 부족과 조직 결여의 문제는 극복될 수 있다.
공익정치 기업가에 대한 기대
일반 기업가가 이윤 추구에 목적을 둔다면, 공익정치 기업가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정치적 지지나 선거에서의 표, 개인적 신망과 존경심, 혹은 자긍심이나 역사적 소명의식의 충족 등 자기 고유의 (비경제적) '유익(utility)'을 보상 받고자 한다.
일반 기업가는 소비자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고 그 상품의 장점을 널리 선전함으로써 판매의 극대화를 꾀한다. 돈을 대가로 소비자들에게 일정한 편리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러나 공익정치 기업가는 일반 시민들의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 새로운 정책이나 제도를 개발해내 (혹은 기존의 정책이나 제도의 개혁안을 내) 그 효용을 널리 홍보함으로써 지지의 극대화를 도모한다.
여론의 지지와 동원을 통해 자신이 구상하고 개발한 정책이나 제도가 채택되게 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에게는 공공재(public goods)가 제공되도록 하고 그 대가로 자신에게는 원하는 보상이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실제로 공익정치 기업가의 존재로 인해 이론적이나 경험적으로는 지난하게만 여겨지는 개혁 작업들의 상당수가 성공리에 끝나곤 한다. 비근한 예는 규제 완화의 경우다. 경제 영역에 있어서의 규제 정책은 대부분 소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그들과 결탁한 정부에 의해 내려진 정치적 배려라는 성격을 갖는다.
신규진입을 규제함으로써 기존 업자들로 하여금 독과점에 따른 과도한 이익을 챙길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완전경쟁 시장일 경우보다 더 비싼 가격에 덜 좋은 품질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언제나 희생을 강요하는 셈이 된다.
그러나 이같은 불합리한 규제가 완화되거나 철폐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일반 소비자 혹은 시민들은 규제의 존재 자체를 모르거나 존재는 안다 할지라도 그 구체적 의미 혹은 효과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들이 규제의 부당성을 자세히 안다 할지라도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 않는다. 조직되지 않은 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무수한 일반시민들이 정부와 기득집단 연대라고 하는 조직된 소수정예 세력을 상대로 자신들의 집합적 이익을 쟁취할 길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누군가가 일반 시민들에게 정책 정보를 쉽고 편하게 알려주고, 그들의 개혁의사를 동원·결집하고, 정책결정 과정에서 그런 개혁 여론을 대변해줄 수 있을 때 비로소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익정치 기업가가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한다. 많은 경우 규제완화는 이런 정치기업 행위 덕분에 이뤄졌던 것이다.
규제완화의 예에서 보듯 공익정치 기업가는 최우선적으로 시민에 대한 '정보 제공자(information provider)'로서의 기능을 수행한다.
시민들이 정치 정보에 무지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생업에 종사하며 일상의 희로애락을 감당하기에도 빠듯한 일반인이, 자신의 삶과 복지에 치명적이지 않는 한, 정치 정보의 수집과 이해에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려 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익정치 기업가는 이런 시민들에게 정책이나 제도의 문제점, 개혁을 위한 대안, 그리고 개혁의 복지효과 등의 정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그들을 일깨우고 그들의 개혁 요구를 결집시켜 자신에 대한 지지를 극대화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공익정치 기업가는 조직되지 못한 데에서 오는 일반시민들의 정치적 약점을 해결해준다. 조직적인 집단행동을 하지 못하는 시민들을 위하여 그들의 수렴된 여론을 모아 정책결정 과정에 대신 참여하는 일이 그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공익정치 기업가의 역할은 역시 정치가들, 특히 정당 지도자들이 담당할 때 가장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시민단체나 사회운동가와 같은 민간 주체들과는 달리 정책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공익정치 기업가에 달린 한미 FTA 문제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됐지만, 아직 정보공개가 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언론 등에 의해 일부 알려진 것만 보더라도 문제는 심각하다.
자기 분야에서 월등한 국제경쟁력을 확보한 소수 기업 외에는 돌아갈 이득이 별로 없고, 오히려 대부분의 경제 주체 및 일반시민들에게는 상당한 손해를 끼칠 것이라고 많은 전문가들이 평가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미 FTA 체결을 지지할 사회구성원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 국민들이 반대할 것이며, 따라서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도 한미 FTA 비준 동의안을 거부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는 상식적으로는 타당하다.
그러나 현실이 언제나 상식대로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협상 내용이 실제로 엉망이라 할지라도 그 사실 자체가 국민들의 반대 여론을 드높여 한미 FTA의 조기 체결이라는 기존 정책의 전환을 저절로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협정문이 완전히 공개되더라도 스스로 그것을 읽고 그 내용을 해석해 자신에 미칠 영향 등 협상의 의미 파악을 위해 노력하는 국민들은 거의 없을 것이고, 따라서 국민들은 여전히 '모르는 상태'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설령 어찌하여 많은 국민들이 한미 FTA 내용을 자세히 파악하게 될지라도 각지에 흩어져 있는 국민 개개인의 반대 의사를 하나로 모아 영향력 있는 집단 여론이나 행위가 형성되도록 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잘못된 협상일지라도 그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개별적으로는 반대한다 할지라도 한미 FTA가 체결될 가능성은 여전히 높다는 것이다.
상황이 바뀔 가능성은 유능한 공익정치 기업가가 등장할 경우에 생긴다. 위에서 본대로 공익정치 기업가가 시민집단이 안고 있는 정보 부족과 조직 결여의 문제를 해결해준다면 시민사회는 정부의 정책 추진을 중단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민사회의 정보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공익정치기업가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의 정책 정보는 소상히 알려주어야 한다.
첫째, 한미 FTA 조기 체결이 야기할 부작용과 폐해, 즉 그것이 국민과 주요 경제주체들에게 끼칠 손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둘째, 그것의 대안, 즉 한미 FTA 조기 체결을 커다란 부작용 없이 피하고 그 대신 취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은 무엇인지; 그리고 셋째, 그 대안 채택의 결과, 즉 한미 FTA 조기 체결이 아닌 다른 대안을 선택한 결과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어떤 혜택을 얼마나 증대시켜주는지 혹은 어떤 손해를 얼마나 감소시켜주는지 등에 관한 것들이다.
유능한 공익정치 기업가는 이런 정보를 가능한 한 쉽게 풀이해 널리 알릴 수 있어야 한다. 즉, 정보의 설득력과 접근 용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내용이 편견 없는 일반시민이라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것이어야 한다.
정보의 접근성도 중요하다. 아무리 설득력 있는 정보라 할지라도 그 정보의 획득이나 숙지 과정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면 그 정보의 여론 동원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별 다른 노력 없이 접할 수 있고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보일수록 여론 동원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정보의 설득력과 접근성을 높이는 작업에는 많은 전문인들의 조력이 필요하다. 우선 특정 정책으로 인해 야기될 현재와 미래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분석하며, 그를 바탕으로 현실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하고, 다시 그 대안의 채택 효과를 예측하는 일을 맡아 줄 사람이 필요하다.
또한 그런 분석과 연구 결과들을 쉽고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하고, 그것을 널리 퍼트리는 일을 해주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 모든 일에는 학자, 사회운동가, 언론인 등과 같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기 마련인 바, 여론 동원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이들 모두의 적극적 협조를 확보해야 한다.
공익정치 기업행위의 성공을 위해서는 각계 전문가들의 체계적 참여가 조직화 돼야 한다. 그래서 소위 '공익정치 기업체(political enterprise)'의 결성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한편, 시민사회의 조직 결여 문제는 공익정치 기업가가 여론의 구심점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때 해결할 수 있다. 정보 확산을 도모하는 정치기업 행위는 사회운동가나 시민단체 등과 같은 민간 주체들이 맡아도 무방하나, 시민사회의 정치적 구심점 혹은 대변자 역할은 역시 정치가나 정당이 담당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상기한대로 그들은 정책결정 과정에의 직접 참여권이 있을 뿐더러 그러고자 하는 의지 역시 가장 강력한 행위자들이기 때문이다. 자발적인 정치 참여로 자신에 대한 지지를 극대화하는 것은 정당과 정치인의 상시적 목표다.
한미 FTA 문제에 직면해 있는 한국 시민사회의 현실을 보면, 현재 정보 제공 기능을 수행할 공익정치 기업가는 이미 상당수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협상 개시 초부터 학계와 전문가 그룹, 그리고 각종 언론매체와 시민사회단체 등에서 수많은 이들이 문제 제기를 해 왔던 터이다.
협정문 원문이 공개되면 이들의 활약이 본격화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정치적 구심점이 되어줄 공익정치 기업가의 존재는 아직 뚜렷하지 않은 상태이다.
정보가 확산돼 반대 여론이 형성된다 할지라도 그것이 정책적으로 의미를 가지려면 누군가가 그 여론을 하나로 결집해 모은 힘을 정책결정 과정에 투입해줘야 한다.
누가 그 일을 맡을 수 있겠는가? 세간에서는 현재 개인으로는 천정배 의원, 김근태 의원, 심상정 의원 등이, 그리고 정당(세력)으로는 민주노동당과 민생정치모임 등이 거론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평가하듯 이들은 모두 (적어도 아직은) 미약하다.
한편, 천정배 의원은 장기 단식투쟁의 와중에 한미 FTA 문제를 중심으로 정계개편이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밝힌 바 있다. 한미 FTA를 반대하는 정치세력의 결집과 조직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라 해석된다. 이것이 성사되면 영향력 있는 공익정치 기업체로 부상하겠지만 그 성사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모든 것이 여전히 불확실성의 세계에 잠겨 있다. 단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한미 FTA 문제의 민주적 해결은 공익정치 기업가의 등장 여부와 그 능력 정도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일반시민들의 여론이 어느 방향에서 어느 정도로 모아질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결정 변수가 될 것이다.
만약 한미 FTA 반대 여론이 과반을 넘고 이것이 유능한 공익정치 기업가에 의해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결집돼 그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현 정부가 추진하는 한미 FTA의 조기 체결은 불가능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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