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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복지국가, 농업이 구원할 수 있다"

[도시인을 위한 농업 이야기·6] 복지국가와 도시농업

권태와 빈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미국의 한 이주민 아파트 단지. 공터에는 주민이 함부로 버린 쓰레기와 오물이 뒤범벅되어 있다. 아파트 주위는 물론 사람들의 표정 어디에도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다. 그러던 그곳에 누구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기적이 일어난다.

한 베트남 소녀가 공터 한 구석에 심어놓은 강낭콩 싹이 사람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소녀가 심어놓은 콩 줄기가 행여 말라죽지나 않을까 조바심을 내던 사람들은 급기야 자기만의 텃밭을 일구기 시작한다. 흉물처럼 쌓여 있던 쓰레기와 오물이 치워지고 그 자리에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텃밭이 속속 들어선다.

일거리가 없어 허구한 날 방구석에 틀어박혀 텔레비전이나 보던 사람들과 을씨년스런 길거리가 싫어 외출을 삼가던 노약자들, 놀이터가 없어 컴퓨터 방으로 몰려다니던 아이들, 고된 노동으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와 식구들에게 지청구부터 늘어놓던 가장들, 식품점에 갈 때마다 감자 한 알을 가지고 수없이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던 이주 노동자들, 아이들 학교 보내놓고 하릴없이 모여서 남 흉보기에 골몰하던 주부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누가 더 풍성하고 예쁜 텃밭을 만드나 시합이 벌어진 것이다.

매일같이 공터로 출근하다 보니 전에는 서로 마주쳐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사람들이 자기가 심어놓은 채소가 얼마나 잘 자라는지 자랑하느라, 또는 옆집 농사의 비결을 정탐하느라 먼저 말을 걸기에 바빴다. 이렇게 몇 계절을 거치는 동안 어느덧 그곳은 불결함과 무기력 대신 생명과 사랑이 흘러넘치는 '녹색 아파트 공동체'로 변해 갔다.

폴 플라이쉬만이 쓴〈작은 씨앗을 심는 사람들>(김희정 옮김, 청어람미디어 펴냄)에 나오는 이야기다. 도시농업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농업은 지역 공동체의 부활을 통해 20세기를 넘어서는 21세기형 사회복지 모델을 창조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지역 공동체 중심의 사회복지 모델

20세기 복지국가의 전형은 철저한 국가 주도형 사회복지 모델이었다. 국가가 국민의 생활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국민은 국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관계였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이든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 모델이든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주도형 복지모델은 다음과 같은 요인으로 효력을 상실해가고 있다.

먼저 나날이 늘어나는 수요를 국가재정으로 감당하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있다. 설령 각종 보험과 연기금을 포함한다 해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스웨덴 등 대표적인 복지국가는 GNP에서 조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50% 수준이었는데 그 이상 조세 비중을 높이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한국의 경우는 조세저항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이 많다.

또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복지 요구를 국가가 일일이 답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비록 맞춤형 복지가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항상 복지 사각지대가 발생할 수밖에 없으며 현실의 요구와 부합되지 않은 관료적 처방이 발생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와 함께 국가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관계는 의존적 체질을 형성함으로써 사회를 무기력 상태에 빠뜨렸다. 개인의 자발성과 책임성을 기초로 사회적 연대성을 고취하는 데 많은 부작용을 낳은 것이다. 이 점은 복지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주도형 사회복지 모델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면서 정반대의 극단적 처방을 내놓은 것이 바로 시장주의 모델이다. 시장주의는 개인의 책임과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면서 일견 사회적 무기력증을 해소하는 데 성공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의 경시로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시장의 한계가 드러났다. 즉 시장 실패로 귀결되고 만 것이다.

국가주도의 복지 모델과 시장주의 복지모델 모두가 부적격 판정을 받으면서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 지역 공동체(community) 중심 복지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지역 공동체 중심의 복지 모델은 공동체가 자체의 힘으로 복지를 해결할 능력을 키워가는 전제 위에서 국가의 지원이 결합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지역 공동체 중심의 복지 모델은 종전의 국가 주도형 복지 모델과 비교해 볼 때 다음과 같은 차이점을 갖는다. 우선 재정이든 기금이든 돈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지역 공동체 중심 복지 모델은 자원 봉사에 의한 해결을 강조하며 물질적 지원 못지않게 공동체적 인간관계 회복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중시한다. 그럼으로써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복지를 지향한다.

지역 공동체 중심 복지 모델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구성원이 복지의 대상이자 동시에 주체라는 사실이다. 이 점은 민을 복지의 대상으로만 사고했던 기존 국가 주도의 복지 모델과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복지의 주요 대상인 노인들 역시 지역공동체 안에서의 복지 시스템을 움직이는 주역이 될 것이다. 잠시 뒤에 살펴보겠지만 노인들은 의료와 교육 등 복지 분야에서 매우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다음으로 지역 공동체 중심 복지 모델은 정부 기구보다는 비정부 혹은 비영리 조직의 활동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비정부 비영리 조직의 활동은 나날이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는 주민의 복지 요구를 상호 협력을 통해 자율적이면서도 기동성 있게 해결하는 데 매우 유리한 것으로 판명됐다. 이러한 해결 능력이 축적될수록 공동체는 더욱 풍부하면서도 역동적으로 발전하면서 기존 복지 모델이 갖는 무기력증을 원천적으로 극복한다.

무상교육-무상의료 가능할까?

지역공동체 중심의 복지 모델을 지향하게 되면 교육과 의료 등 주요 복지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 과정에서도 도시농업은 다시 한 번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진보 진영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해 온 정책 가운데 무상의료, 무상교육이 있다.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는 대부분의 기업이 국가 소유였던 전통적인 사회주의 국가에서 주로 선보인 것이었다. GNP 중 조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 정도에 이르렀던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나라도 완벽하게 실현하지는 못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상교육 무상의료는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무상교육, 무상의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재원이 소요되며 이를 국가 재정으로 충당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진보진영 스스로 새로운 재원 조달 방안을 뚜렷이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오직 교육과 의료에 투입되는 사회적 비용을 대폭 절감할 때 해결의 실마리를 마련할 수 있다. 교육과 의료에서의 과잉 지출을 해소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인 것이다.

먼저 교육과 관련해서 살펴보자. 무상교육으로 나아가는 데 있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것은 과중한 사교육비 해소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소책은 교육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즉 사회 전체적으로 자연과 교감하고 생명 친화적인 경험을 가장 중요한 교육 과정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시농업을 기초로 노인들을 주축으로 한 다양한 친환경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방과 후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지역 안에서 직접 책임지고 교육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다. 이럴 때 무상교육은 현실에 성큼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무상의료 역시 패러다임을 바꿀 때 실현 가능해진다. 즉 의료기관을 통한 치료 중심에서 벗어나 예방의학, 생활의학, 자연요법 등을 통해 질병 발생 가능성을 최소화하면서 자가 치료 능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여기서 도시농업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도시농업은 노동을 통한 흙과의 교감, 안전한 먹을거리 섭취, 원예치료, 녹색약재 재배 및 사용 등을 통해 한층 건강한 삶을 보장한다. 이렇듯 전체적으로 의료비 지출을 대폭 줄이는 조건에서 필요불가결한 나머지 의료비를 국가가 책임질 때 무상의료가 가능해질 수 있다.

물론 도시농업이 이러한 기능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태농업을 지향해야 한다는 엄격한 전제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기회에 살펴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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