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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이나 노래나 페이스 유지가 관건이죠"

하프코스 두 번째 완주한 소리꾼…장사익

구성진 노래로 듣는 이들의 가슴을 촉촉이 적시는 소리꾼 장사익 씨. 그가 지난 3월 4일 열린 서울마라톤대회에서 하프코스를 완주했다.

겨울이 차마 떠나지 못하고 흔적처럼 눈을 뿌리던 3월의 오후, 장사익(58) 씨의 노래를 틀었다. 늘 차 안에서 듣던 그의 노래를 사무실에서 들으니, 흩뿌리는 눈과 그럴싸하게 어우러졌다. 이런 날, 인왕산 자락이 훤히 내다보이는 그의 2층 거실에서 밖을 바라보면 더욱 장관일 것 같았다.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사랑굿'이 낮게 퍼진다. 김초혜 시인의 '사랑굿 93'을 엮은 노래다.

'화염의 옷을 벗을 수도 벗길 수도 없어/ 태워지면서 형극의 길로 든다/ 살들이 타고 남은 재 영혼을 맑게 하고/ 그대만이 벗길 수 있는 이 옷은/ 타지도 않고 낡지도 않고 나를 태운다'

봄볕처럼 순박하고 따뜻한 미소
▲ 인왕산이 한눈에 보이는 거실에서 필자와 인터뷰 중인 장사익씨.ⓒfocus marathon

지난 2월 말, 서울마라톤클럽 게시판에 장사익 씨가 팬카페 회원들과 함께 3월 4일 열리는 서울마라톤대회에 참가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가 달리기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은 있지만, 필자도 참가할 대회에서 같은 코스를 달린다는 소식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뜨거운 듯, 서늘한 듯 마음속에서 아련하게 요동치다가 끝내 눈물을 쏟게 만드는 노래를 부르는 그는 어떤 마음으로 달릴까?

3월 1일, 집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요즘 보기 힘든 털신을 신고 집 앞 언덕길로 달려 나왔다.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소년보다 더 맑은 웃음을 띠고 있었다. 슬픈 노래로 남들을 수없이 울려놓고선 정작 본인은 순박하고 어린애 같은 표정이다. 누군가 그 앞에서 설움에 겨워 마냥 흐느껴도 그저 허허 웃으며 쳐다볼 것만 같다. 깊은 주름, 희끗희끗한 턱수염, 털털한 옷차림, 소탈한 몸가짐까지 그저 동네 아저씨다.

194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으니 우리 나이로 59세. 재작년 봄, 처음으로 마라톤대회의 10km 코스에 참가하였다. 10km를 뛴 후 '상장'(그는 완주 기록증을 상장이라고 불렀다)을 받고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단다. 곧이어 참가한 10km 대회에선 51분으로 기록을 단축하였다.

"기록이 빨라지니께 하프코스를 뛰고 싶은 욕심이 생기더라구유.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께 하프면 50리 길인디, 그 거리는 지 고향인 광천에서 대천해수욕장까지의 거리란 말이지유. 무지 먼 거예유. 그걸 쉬지 않고 달린다니, 꿈같은 얘기지유."

필자가 풀코스를 뛴다는 말을 듣곤 "어유, 대단해유! 진짜 대단해유"를 연발했다. "어떤 분이 서울마라톤클럽 게시판에 장 선생님이 대회에 참가한다는 얘기를 올려놓았다"고 하자, 대뜸 "쪽팔리게 그런 걸 왜 올렸대유. 이번엔 연습을 못 해서 2시간 반에나 뛸까 싶은디…" 했다.

작년 10월에 개최된 농촌사랑 마라톤대회에서 처음으로 하프코스를 완주하였다. 기록은 2시간1분. 그의 팬카페인 '찔레꽃 향기 가득한 세상' 회원들과 함께 뛰었다. 카페 회원 중에도 '마라톤 타짜'들이 있다고 한다. 따로 정해진 모임이 없는 회원들이 건강도 돌볼 겸 마라톤대회를 통해 만남을 갖자고 의견이 모아졌다. 작년 대회 때는 세 명의 회원이 그의 페메로 나섰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더라구유. 초반에 저보다 열 살 어린 회원이 저를 앞서가는데, 막 따라잡고 싶은 거예유. 근디 페메들이 못 가게 막더라구유. 참고 가는데, 참 답답하대유. 반환점을 돌자 저더러 마음껏 가보라고 하대유. 그래서 후반에 언덕에서 잡아버렸슈. 정말 통쾌하대유! 대회에 한번 참가하면 그 기쁨이 1년은 가는 것 같애유."

그날의 통쾌함이 되살아나는 듯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 대회에서 부인 고완선 씨는 10km를 완주하였다. 그의 매니지먼트를 담당하고 있는 부인은 달릴 때마다 공연의 성공을 염원하는 '기원(祈願) 마라톤'을 한다. 이번 서울마라톤대회에서는 6월 2일부터 시작되는 미주 공연(미국의 뉴욕·시카고·워싱턴·LA와 캐나다에서 한 달 반 동안 열리는 거대한 프로젝트이다)이 잘 되도록 기도하며 10km 코스를 달릴 예정이다.

동네 언덕길에서 연습

연습은 동네에서 한다. 운동 시간을 따로 내기 어렵기 때문에 틈이 나면 동네의 언덕을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언덕 훈련이 돼서, 대회에서도 언덕에 강하다. 마라톤을 시작하기 전인 1997년 무렵부터 운동 삼아 동네의 가파른 낭떠러지를 뛰어다녔다. 그때 얻은 별명이 '북한산 다람쥐'였다. 그러다 무릎에 이상이 생겨 한동안 뛸 수 없었다. 훈련 방법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언덕을 뛰다가 부상을 입은 것이다.

그 후 우연히 중학교 동창을 만났는데, 마라톤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멋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번 해보고 싶다는 부러움이 밀려왔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마라톤 완주의 꿈을 품게 되었다.

47세에 소리꾼이 되다
▲ 그는 늘 바보처럼 "허허~"웃지만 마음속에는 진리를 꺠우친 부처가 들어있다. 맨발로 취재진을 맞은 모습이 해탈한 듯 자연스럽다. ⓒfocus marathon

"처음 하프대회에 나갈 때만 해도 재미있을 것만 같았는디, 중간에 '내가 왜 뛰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유. 그만두고 싶은디, 창피해서 그냥 뛰었지유. 2시간1분이면 제 나이치고는 괜찮은 기록이라구 허대유. 보통 제가 공연을 하면 2시간10분 정도가 돼유. 뛰면서 '이제 노래 한 곡 끝났다', '지금은 쉬는 시간이다', 반환점을 돈 뒤에는 '지금부터 2부 공연 시작이다' 같은 생각을 하지유. 공연할 때는 반대로 '지금이 마라톤으로 따지면 어느 정도 왔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구유. 이렇게 마라톤과 공연의 상황을 대입시키면 너무나 재미있슈."

마라톤을 하면서 자신의 몸에 대한 확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은 것이 이 정도의 체력을 유지한 비결인 듯싶다. 풀코스 도전은 올가을쯤으로 생각하고 있다.

장사익 씨는 40대 중반에 노래를 시작하여 47세에 데뷔 음반을 냈다. 고교시절부터 노래를 좋아했지만, 보험회사와 무역회사 사원·가구점 총무·독서실과 카센터 운영 등 삶의 부침을 겪으면서 노래를 포기하고 있었다. 40대 초반에 변변한 직업도 없이 표류하고 있을 때 그를 구원한 것이 태평소(날나리)였다. 불혹의 나이를 넘긴 인생의 후반기에 그는 다시 음악을 찾았고, 1993년과 1994년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연달아 차지하며 서서히 이름을 알려나가던 중에 사물놀이패 '노름마치'와 임동창 씨 등을 만나 소리꾼으로서 대중 앞에 서게 되었다.

지금의 그는 공연 한 달 전에 전 좌석이 매진되어 버리는 폭발적인 영향력의 소리꾼이다. 또한 얼마 전 그의 글씨가 휴대전화와 의류, 패션 액세서리 등에 적용되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살아가는 길목마다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하나짜리인 저를 열로 보이게 만들어 주었지유. 지보다 노래 잘 하는 사람 중에도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 많은디, 쭈글탱이인 지가, 배운 것도 없는 지가 운이 너무 좋았지유. 글씨는 디자이너 이상봉씨가 지가 보낸 편지를 보고 제품에 응용해 보자고 제안을 했슈. 하찮은 제 글씨를 유명하게 해주셨으니 그저 감사할 뿐이지유."

이렇게 유명해졌지만 구두는 3만 원 이상인 제품을 신어본 적이 없고, 옷도 1만 원이 구입 상한선 가격이라고 한다. 부인은 "처음 대회에 나갈 때 남편의 대회용 운동복과 러닝화를 뉴발란스 제품으로 사 왔는데, 가격을 알면 기절할 것 같아서 모두 합쳐 5만원에 샀다고 속였다"고 한다. 지금도 정확한 러닝화 가격을 모른다. 연습할 때는 러닝화가 닳을까봐 아까워서 일반 운동화를 신고 달린다.

"컨디션 좋은 날 망치기 쉽다"
▲ 지난 3월 4일 서울마라톤대회에서 팬카페 회원들과 함께 하프코스를 달리는 장사익씨. 작년 10월 2시간1분의 기록으로 하프코스를 처음 완주했다. ⓒfocus marathon

"제가 얼마 전 공연할 때 한마디했슈. '인생은 페이스다!'라고. 인생도, 노래도 모든 것이 페이스인 것 같아유. 오늘이 3월 1일이니 정식으로 봄이 시작되는 날이지유. '철 들어라' 하잖유. 철은 계절을 말하는 거유. 자연은 이유나 변명 같은 거 대지 않고 반드시 넉 달 만에 한 번씩 찾아오잖유. 그런데 우리는 컴퓨터 몇 초 만에 안 뜬다고 막 화내잖아유. 세상 살면서 너무 오버하고 있슈. 자연의 페이스에 맞추는 것이 중요하지유. 욕심 안 부리고 페이스를 지키는 것이 결국은 이기는 것이에유. 공연할 때도 컨디션 좋은 날, 오히려 망칠 때가 많아유. 서로 컨디션 좋다고 자신만만해서 조화를 못 이루면 각자 잘난 척하게 되고, 그러면 망하는겨. 오늘 컨디션 나빠서 어떻게 하나 걱정할 때, 서로 도와주자 마음먹고 조화를 이뤄서 더 좋은 공연을 한 적이 많아유. 그게 인생이유. 세상 원리도 똑같어유."

그의 집을 나서면서 망망대해에 잠시 발만 담그고 나온 것 같았다. 그의 깊이와 폭을 도저히 알 수가 없기에. 며칠 후 서울마라톤대회 주로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 반환점을 돌아 나오던 그가 먼저 아는 척했으나 미처 답하지 못하고 지나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대회가 끝난 후 그의 기록을 검색해 보니 1시간56분26초였다. 첫 하프 때보다 기록을 5분 정도 앞당겼다. 나중에 부인에게 들은 설명에 의하면, 그동안 한 번도 연습을 못 한 불안감에 대회 전날 오후, 집 근처의 언덕길을 1시간30분가량 전력 질주했다고 한다. 게다가 갑자기 집에 전기가 나가서 그걸 고치느라 저녁도 먹지 못하고 밤새 고생하다가 새벽녘에나 잠이 들었다. 그러고도 그런 기록을 내다니, 좋은 컨디션이었다면 더 잘 달릴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의 말대로 안 좋은 컨디션에서 욕심부리지 않고 겸손한 자세로 임했기에 잘 달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에게 완주 소감을 묻자 "즐거웠지유. 참 즐거웠어유"라고 말했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녹슬어 없어지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소크라테스의 원숙한 철학은 70세 이후에 이루어졌고, 플라톤은 50세까지 학생이었다. 르네상스의 거장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완성한 것은 90세 때였다. 파테레프스키는 70세 때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고, 베르디는 오페라 <오델로>를 80세에 작곡했으며 <아베마리아>를 85세에 작곡했다. 쿠바의 전설적 밴드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의 꼼바이 세군도 할아버지가 90세가 넘은 나이에 노래를 부르기 위해 구부정한 걸음으로 천천히 무대로 올라서는 모습은 차라리 감격이었다. 노래가 나오기도 전에, 그의 담담하면서도 숭고하기까지 한 몸짓에 눈물이 흐를 수밖에 없었다.

47세에 노래를, 57세에 마라톤을 시작한 장사익. 10년, 20년, 30년 후에도 그의 공연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주로에서 마주치면 격려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스스로를 태우는 불빛에 세상이 더욱 더 환해지고, 세상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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