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방송(MBC) <W>의 한학수 PD는 미군기지 탓에 삶의 터전을 잃고 40여 년간 고향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차고시안(Chagosian)의 사연을 취재했다. 이들은 현재 영국 정부를 상대로 1965년부터 시작된 강제 이주의 부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들의 사연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진보적 언론인 존 필저가 만든 다큐멘터리 <Stealing a Nation>을 통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학수 PD는 이번 차고시안에 대한 취재 후기를 보내왔다. <편집자>
2007년 2월 16일, 이날도 어김없이 차고스 제도(Chagos 諸島)의 사람들, 바로 차고시안(Chagosian)을 만날 수 있었다. 차고시안과 영국 정부 사이의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런던의 법원 입구로 차고시안은 모여든다. 그들에게는 나라가 없다. 차고시안은 40년 전에 나라를 도둑맞았다. 도대체 누가 이들의 나라를 훔쳐갔단 말인가?
미국과 영국의 밀약
인도양의 한 복판에 64개의 산호섬으로 이루어진 차고스 제도가 있다. 이곳에는 200여 년 전부터 아프리카에서 이주해온 주민 2000여 명이 살고 있었다. 프랑스의 지배를 받다 영국 식민지령이 된 이곳에서 이들은 크레욜(creole)이라는 아프리카식 프랑스어를 쓰며 살아갔다.
이 차고스 제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산호섬, 디에고 가르시아 섬은 가장 많은 이들이 모여 사는 삶의 터전이다. 이들은 코코넛과 올리브를 재배했고, 섬의 항구에는 18세기부터 어선들이 붐볐다. 그러나 평화롭던 이 섬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뒤바뀌고 말았다. 1965년부터 이 섬에 미군이 들어와 숲을 밀고 활주로와 같은 군사시설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아프리카와 서남아시아 일대를 감시하기 위해 인도양 기지를 물색 중이었다. 영국령이었던 차고스 제도에 눈독을 들인 미국은 영국 정부에 섬에 살던 주민 2000여 명의 완전한 추방을 요구했다. 미국에 50년 동안 섬을 임대해주는 대가로 영국은 미국으로부터 잠수함용 핵미사일을 500만 파운드에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었다.
영국 법정의 차고시안 측 변호사는 이 협약의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이 밀약이 이뤄진 것은 베트남 전쟁에 미국이 참여하고 불과 몇 달 후의 일이다. 미국은 인도양 중앙에 있는 차고스 제도를 소유할 수 있다면 군사적으로 인도양 전체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해 이런 밀약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인 것이다."
결국 1965년부터 강제이주가 시작됐다. 8년 만에 단 한 명의 원주민도 남기지 않고 차고스 섬에서 모두 추방됐다. 약 2000명의 차고시안은 영문도 모른 채 배에 올랐다고 한다. 또 개를 죽이며 위협하는 영국 군인에 맞서기에는 차고시안은 힘이 없었다. 영국 정부는 협박뿐만 아니라 이주 지역에 집과 가축을 주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다.
물론 영국 정부의 이 약속은 거짓말이었다. 차고시안이 이주 지역 모리셔스 섬에 도착했을 때, 영국 정부는 약속한 집과 가축 대신 다시는 고향에 돌아갈 수 없다는 통보만 할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가난에 굶주리게 된 차고시안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40년간 유랑해온 차고시안
아프리카 대륙의 동쪽, 마다가스카르 인근의 섬나라 모리셔스(Mauritius). 수도인 포트 루이는 관광객들로 늘 북적이는 항구 도시다. 천혜의 휴양지로 급부상하며 인도양의 파라다이스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모리셔스의 해변들. 그러나 아름다움과 행복만이 가득 한 곳은 아니다.
이곳에는 40년 전 영국에 의해 버려져야만 했던 차고시안들의 서러운 역사가 뿌리내리고 있다. 모리셔스로 강제 이주된 차고시안 대부분은 아직도 고향으로 돌아갈 배를 기다리며 항구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 하나의 차고시안 슬럼가를 형성했다.
빈손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타국에서의 생활은 비참했다.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차고시안은 약물·알코올 중독 그리고 자살 등으로 죽어갔다. 취업과 교육의 기회에서도 소외됐다. 모리셔스 로체보이스 지역의 빈민가에는 일정한 직업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차고시안 젊은이들이 많았다.
차고시안은 영국 정부로부터 90만 원 안팎의 강제 이주 보상금을 받았다. 그것도 강제 이주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손에 쥘 수 있었다. 모리셔스의 삶이 너무 고달팠던 차고시안 중에서 일부는 몇 해 전부터 영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영국의 빈민가에서 여러 가구가 한 집에 함께 거주하면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영국에서 만난 차고시안은 고향에서 가져온 조개껍데기를 꺼내 보면서 망향의 슬픔을 달래곤 한다고 토로했다. 그는 조개껍데기로 차고스 제도의 지도를 만들어 보여주며 고향이 너무 보고 싶을 때는 이렇게라도 하면서 위안을 삼는다고 했다. 65세의 한 차고시안은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차고시안 대다수는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차고시안이 살던 섬에는 현재 수천 명의 미군이 살고 있다. 미군은 이곳을 최상의 조건을 갖춘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 기지로 홍보하고 있다. 미군이 부르는 이 기지의 이름은 '캠브 저스티스(Camp Justice).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 때, 이곳에서 바로 미군 전폭기들이 출격했다.
영국은 자신의 범죄를 인정할 것인가?
차고시안의 투쟁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각지에 흩어져있던 차고시안은 '차고스 난민그룹(chagos refuges group)'으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모리셔스의 영국 대사관 앞에서 꾸준히 항의 집회와 시위를 열었다. 차고스 난민그룹 대표인 올리비에 방쿠는 "영국 정부는 전혀 책임이 없다는 입장만 되뇌었다"고 전했다.
결국 영국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에 분노한 차고시안은 직접 행동에 나섰다. 1997년 모리셔스에 사는 차고시안은 1년간 모은 돈으로 항공권을 구입해, 런던 법원으로 향했다. 자신들의 억울함을 직접 영국 법원에 호소하기 위한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로 싸우는 격이었다.
재판 진행 과정에서 감춰진 진실이 서서히 드러났다. 차고시안의 존재가 알려질 경우, 국제연합(UN)에 의해 차고스 기지 건설이 중단될 것을 우려했던 영국 외교부가 비밀리에 허위로 작성했던 문건들이 발견된 것이다. "차고스 제도에는 갈매기만 산다"는 식의 거짓 보고들이 속속 공개됐다.
재판 과정에서 더욱더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애초 미국이 노리고 있던 군사기지 후보는 알데브라 섬이었다. 그러나 이 섬은 쉽게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미국이 알데브라 섬에 기지를 세우게 될 경우 거북이들이 죽게 될 것"이라고 환경단체가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결국 차고시안은 거북이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지난 2000년 런던 법원은 강제이주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리며 차고시안 측의 손을 들어줬다. 힘없는 차고시안들에게 행해진 야만이 법의 심판을 받는 순간이었다. 차고시안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2004년 블레어 정부는 왕실칙령이라는 편법을 동원해 재판의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다.
지난 해 5월, 2심에서 런던 법원은 왕실칙령을 거부하면서 다시 한 번 차고시안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제 이 문제의 최종심이 3월 중에 내려질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연 영국은 미국과의 밀약을 통해 만들어낸 야만적 행위에 대해 성찰적인 판결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차고시안은 자신들이 고향 땅 차고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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