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여름, 서울 강동구의 일자산에서 배미경(44) 씨를 처음 보았을 때 마론인형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외삼촌에게서 선물받아 유년시절 내내 보물목록 1호였던 나의 마론인형. 그녀를 보고 그 인형을 떠올린 건 까무잡잡한 피부와 얼굴 생김 때문이었던 것 같다.
허약하고 소극적이었던 어린 시절
![]() |
1963년생, 수영·사이클·마라톤을 즐기는 철인, 3시간17분의 풀코스 최고기록을 가지고 있는 마스터스 마라토너…. 그녀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는 이 정도였다. 그 외에 소문으로 들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예쁘다", "잘 뛴다" 등이었다. 여자 달림이에게 이 두 가지 찬사가 붙는다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지 않을까?
필자가 2005년 달빛마라톤클럽에 가입했을 때, 그녀는 '훈련할 때 남자들과 당당히 겨루는 악바리'로서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었다. 하지만 필자가 가입하기 직전에 배미경 씨가 그 클럽을 나왔기 때문에 아쉽게도 함께 뛰어볼 기회는 갖지 못했다. 어찌 보면 여자가 여자에게 관심이 더 많은 법. 소문으로 들리는 그녀에 대한 평가는 그녀를 직접 보고 싶다는 욕구를 안겨 주었다.
그해 여름, 달빛 회원들과 함께 일자산에서 산악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아담한 체구에 인형 같은 얼굴로 언덕길을 다람쥐처럼 내달리는 여자를 목격하였다. 바로 그녀였다. 선망과 호기심의 대상을 만나본 첫 느낌은 '작다'였다. 저렇게 작은 여자가 몸속에 어떤 열정을 숨겨 놓았기에 수영과 사이클, 거기다 마라톤까지 척척 해내는 체력을 지니게 되었을까? 그런 체력은 어려서부터 타고났을까? 많은 궁금증을 안고, 오는 8월 제주에서 개최되는 아이언맨 대회에 대비해 동계훈련에 들어간 그녀를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만났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잘 했으면 지금쯤 고수가 됐겠죠. 어릴 때는 몸이 약해서 체육시간에 툭하면 코피가 터졌어요. 성격조차 내성적이어서 활발한 활동과는 거리가 멀었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소극적인 성격 탓에 학창 시절에는 제일 뒷자리만 고수하는 폐쇄적인 학생이었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여 한번 좋은 사람은 영원히 좋은 사람으로, 한번 싫다고 생각하면 다시는 쳐다보지 않는 외곬 성격. 시작하기 전에는 신중을 기하고 잘 뛰어들지 못하지만 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을 보는 성격이기도 하다.
서울의 평범한 집안에서 1남6녀 중 둘째로 성장, 이른 나이에 남편 김규찬(50) 씨와 결혼하여 대학 1학년인 도훈과 고등학교 2학년인 도형, 두 아들을 두었다. 마라톤대회에서 충분히 입상이 가능한 실력인데도 참가자 명단에서 그녀를 자주 볼 수 없었던 것은 큰아들의 입시 준비 때문이었다. 결혼 전부터 운동을 좋아했지만 종갓집 맏며느리로서 아이 낳고, 남편 내조하며 집안에서만 생활하던 그녀에게 남편이 오히려 골프채를 사다주며 운동을 권했을 만큼 집안에서만 파묻혀 지냈다.
산후병 때문에 운동 시작
![]() |
아이 낳고 산후통이 너무 심해 시작한 운동이 수영이었고, TV에서 어느 모녀가 철인3종 경기에 나란히 참가한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 이어 팬이었던 오세훈 현 서울시장이 설악 국제트라이애슬론대회에서 완주한 모습을 본 후 자극을 받아 2004년 7월 강동철인클럽의 문을 두드렸다. 그해 울진 트라이애슬론대회(수영 1.5km·사이클 40km·마라톤 10km)에 참가해 40대 여성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마라톤은 의외로 쉬웠다. 2달 반 연습한 뒤 하프코스 출전을 생략하고 그 해 10월 춘천 마라톤대회에서 평상시 집에서 신던 운동화를 신고 3시간39분에 첫 풀코스를 완주하였다.
"달리는 내내 많은 시민들의 응원과 환호에 도취되어 힘든 줄도 모르고 완주했지만, 대회가 끝나고 보니 발톱이 4개나 빠져 있더군요."
그리고 다음해인 2005년 중앙 마라톤에서 작성한 3시간17분이 그녀의 풀코스 최고기록이다. 하프 최고기록은 1시간33분대이다. 거칠 것 없던 그녀의 달리기에 제동이 걸린 건 작년 중앙 마라톤 때다.
"남들이 잘 뛴다, 잘 뛴다 하니까 더 욕심을 부리게 되더라고요. 기록 단축을 위해 7개월 동안 열심히 훈련하다가 대회 2주 전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었어요. 그동안의 노력이 아까워 출전했다가 정말 마라톤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릴 정도로 힘들게 뛰었어요. 26km 지점부터 쥐가 나기 시작하더니 골인할 때까지 지긋지긋하게 괴롭혔죠. 회수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관심도 없었는데, 두 번이나 회수차가 눈에 보이더군요. 회수차 타는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겠더군요."
필자는 이 말을 들으며 뜨끔했다. 지난 1월, 고성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가 반환점을 돌자마자 달리기를 포기하고 차가운 바람 속에서 덜덜 떨며 1시간이나 기다려 회수차를 탔던 경험이 떠올랐다. "참담했다"는 회수차 탑승 경험자들과는 달리 필자는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힘들게 뛰고 있는 주자들을 앞서서 지나칠 때면 신나기까지 했다.
그때 중앙 마라톤을 3시간32분의 기록으로 겨우 완주하고 한 달 반 동안 운동화를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운동 욕심이 많아서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밤잠을 자지 못할 정도였는데, 그 날 이후 마음을 비우고 즐기는 마음을 배웠으니 어쩌면 큰 걸 얻은 셈이다. 그렇게 즐겁게 달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부상도 나아서 얼마 전 서울마라톤클럽에서 운영하는 반달 모임에 나가 32.195km 부문에서 여자 1등을 할 정도로 실력이 회복되었다.
"철인, 경제력보다 열정이 더 중요"
![]() |
흔히 '철인 경기를 하려면 시간과 돈이 받쳐줘야 한다'고 말한다. 세 가지 운동에 대한 훈련 시간을 내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닐뿐더러 장비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운동 분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철인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녀의 경우 수영은 자유수영 시간대에 혼자 연습하고, 사이클도 클럽 회원들과 하는 장거리 훈련 외에는 혼자서 연습한다. 경비도 문제지만, 시간을 많이 낼 수 없는 주부라는 특성 때문이다.
또 일주일에 두 번, 가톨릭마라톤동호회 등에서 실시하는 훈련을 빼고는 혼자서 뛴다. 여러 종목을 혼자 연습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도 '독종'이라고 생각한단다.
"시간이 많다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건 아니에요. 비용 부담이 큰 수영 수트나 자전거도 처음에는 중고로 살 수 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열정만 있다면 얼마든지 저렴한 비용으로 운동할 수 있습니다. 저도 운동복은 기록을 위해 욕심을 내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옷 사는 돈이 제일 아까워요. 평상복은 잘 사지도 않지만, 꼭 사야 할 일이 있으면 '누워 있는 옷'만 삽니다." '누워 있는 옷'은 백화점이나 할인점의 진열대에 놓여 있는 옷을 말한다.
마라톤 한 가지만 해도 운동할 시간을 내기 힘든 필자의 입장에서 그녀의 시간표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든다. 화∼금요일은 아침에 수영을 하고, 오후에는 사이클 연습을 한다. 화∼수요일에는 가톨릭마라톤동호회 등에서 달리기 훈련을 한다. 나머지 시간은 여유가 날 때마다 짬짬이 달리고, 금요일 오전에는 2시간 정도 서울 고덕동의 사회복지시설인 우성원에서 정신지체 장애인들을 상대로 달리기를 지도한다. 작년 6월, 양평 마라톤대회에서는 그녀가 지도한 장애인이 4시간28분에 풀코스 완주해 그동안의 봉사에 대한 보람을 만끽하였다.
"성격이 이상한지 과격한 운동을 좋아해요. 힘든 과정을 통해 희열을 느끼고, 운동을 하고 나면 삶의 스트레스가 다 풀려 버리죠. 또 어렵게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는 만큼 그 시간을 충분히 활용하고 싶어요."
그녀의 올해 1차 목표는 제주 아이언맨 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완주하는 것이고, '싱글'이라고 하는 3시간 초반대의 마라톤 기록을 갖는 것이다. 내년쯤에는 서브3에도 도전하고 싶다. 철인3종 경기 중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종목은 사이클, 가장 힘든 종목은 달리기란다.
"사이클을 타고 야외에서 속도를 내서 달리면 날아갈 듯한 자유를 느껴요. 안 해본 사람은 모르죠. 너무 행복하거든요."
운동보다 가정 우선시하는 주부
![]() |
힘든 운동을 하는 그녀에 대한 가족들의 시선은 어떨까? 남편은 지나친 운동으로 그녀가 무리를 할까 걱정하는 편이다. 과묵한 성격 탓에 드러내놓고 칭찬하진 않지만 주위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운동 실력을 상당히 자랑스러워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활기찬 생활을 무척 좋아하고 응원한다. 그런 응원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새벽 훈련과 대회가 있는 날에도 새벽 4시에 일어나 모든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놓고 나온다. 강원도 춘천에서 근무 중인 남편도 작년에 10km를 완주하였다. 넉넉한 몸매의 소유자인 남편과 함께 풀코스를 완주하는 것도 그녀의 또 한 가지 꿈이다.
그녀는 달리기를 하는 사람들은 트라이애슬론을 할 수 있는 여건을 이미 갖췄다고 말한다.
"철인 하는 사람들은 시즌이 끝나면 운동을 게을리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마라토너들은 언제나 존경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훈련합니다. 하지만 한 분야에만 편중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달리기 외에 사이클과 수영,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대체 훈련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운동을 섞어서 하면 훈련 효과도 높아지고 부상 예방도 되거든요."
운동하면서 성격도 많이 바뀌어 이제는 솔직하고 거침없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가 되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면서 그녀의 운동에 관한 뜨거운 에너지가 요즘 자꾸만 식고 있는 내 달리기 열정을 다시 지펴주기를 바랐다. 오늘 저녁에는 좀 열심히 뛰어봐야겠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