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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가꾸는 자'들이 벌이는 '피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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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가꾸는 자'들이 벌이는 '피의 향연'

[화제의 책] <머튼의 평화론>과 한국, 그리고 미국

전 세계적으로 신·구교를 막론하고 교회의 세가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유독 곳곳에서 십자가가 늘어나는 두 나라가 있다. 한 나라는 말할 것도 없이 한국이다. 서울 남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많은 십자가는 진풍경이다. 그렇다면 다른 한 나라는? 바로 문을 닫은 공장 대신 교회가 들어서는 미국이다.

이 두 나라의 공통점은 늘어나는 십자가뿐만이 아니다. 이 두나라는 정당한 이유라고는 찾을 수 없는 이라크의 살육전에 같이 몸을 담고 있다. 또 냉전이 끝난 후, 핵전쟁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들 중의 하나라는 한반도의 중요한 당사국이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은 레바논, 소말리아에서 또 다른 살육전을 진행하거나 배후에 개입했다. 이같은 십자가의 잔치와 피의 향연의 부조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정당한 전쟁은 없다
▲ <머튼의 평화론>(토머스 머튼 지음, 조효제 옮김, 분도출판사, 2007). ⓒ프레시안

1968년 세상을 뜬 토머스 머튼은 미국이 낳은 가장 탁월한 성직자였다. 그는 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20대 후반 종교에 귀의한 후, 20여 년간 대중에게 사랑받는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교황도 자문을 구하는 탁월한 영성을 갖춘 종교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냉전에 관한 비판을 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런 그의 이력을 염두에 두면 1962년 초고가 작성된 후, 40여 년 만에 공개된 <머튼의 평화론>(조효제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은 호기심을 끈다. 특히 이 책이 교단의 반대로 출판이 허락되지 않아, 교황을 포함한 소수의 가톨릭계 인사들 사이에서만 읽혔다는 점을 듣고 나면 더욱 그렇다.

<머튼의 평화론>은 '포스트 그리스도교 시대의 평화(Peace In The Post-christian Era)'라는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적 이상과 태도를 추구하는 사람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는" 시대에 평화의 조건을 어떻게 마련할지를 탐색한 책이다. 특히 머튼은 이 책에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확산된 이른바 '정당한 전쟁'이라는 관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 정당한 전쟁 이론은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런 아우구스티누스의 주장은 라인홀드 니버와 같은 현대의 신학자가 "전쟁은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이라고 옹호하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이런 선의에 의한 정당한 전쟁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머튼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결함은 인간의 가장 추악한 모습이 드러나게 마련인, 폭력적 수단을 써서 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유치할 정도로 지나치게 맹신한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머튼이 인용하는, 제1차 세계대전에 영국군으로 참전했던 한 군인의 글을 읽어보자.

"내가 방어 전쟁이라 생각하고 참전했던 이 전쟁은 이제 침략 전쟁이자 정복 전쟁으로 변질했습니다. 나는 나와 내 동료 병사들이 원래 품었던 참전 목적을 처음부터 분명히 밝혀서 나중에 그것이 변질되지 않도록 했어야만 했다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했더라면 우리가 달성하고자 했던 목표를 지금쯤 협상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가꾸는 사람들?

머튼의 정당한 전쟁에 대한 이론은 오늘날 적실하다. 이미 20세기의 수많은 전쟁이 보여주듯이 현대의 전쟁은 한 국가의 모든 것을 거는 전면전의 양상을 보인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교전자와 민간인의 구분은 의미가 없어진다. 세계 최고의 정밀 폭격 기술을 자랑하는 미국이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민간인을 살해해 온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뿐만이 아니다. 현대의 전쟁에서 전투원은 전쟁에 대한 실감을 가지지 못한 채 살육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금 전투원은 피가 튀기는 전장의 한복판에 있을 필요가 없다. 대신 디스플레이 장치를 통해 보이는 좌표를 겨냥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한다. 죄의식 없는 대량 살상이 가능해진 것이다.

머튼이 이미 1960년에 심각하게 인식한 더 큰 문제도 있다. 핵전쟁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전쟁은 교전국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를 절멸로 몰고갈 위험성을 안고 있다. 1960년대 최고에 달했던 핵전쟁 위기는 냉전이 끝난 후 잠시 잦아들다가 21세기 들어서 더욱 고조되고 있다. 그 중심에 한반도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튼이 무조건적인 비폭력 평화주의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머튼은 지극히 현실적인, 대화를 통한 적대 세력 간의 신뢰 구축과 평화 체제 수립을 강조하고 있다. <머튼의 평화론>에서 머튼은 이것을 지향할 특별한 윤리적 책무가 그리스도인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머튼은 특별히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한다.

"(당장 평화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평화를 생각하는 것이 진실로 가능하다는 점을 다시금 일깨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과제가 되었다. (…) 테르툴리아누스는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칼을 거두라고 하셨을 때(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잡는 자는 모두 칼로 망한다), '예수께서는 모든 병사의 무장해제를 명하신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주장했다."

머튼은 더 나아가 종교인이 깨어 있을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종교인이) 아무 것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전반적 쇄신은 위험에 처할 것이요 완전히 불모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당부했던 머튼이 만약 피로 얼룩진 지금의 세상을 본다면 어떤 생각을 가질까?

천박한 선악 이분법…뱀의 유혹에 빠지는 것

머튼은 선악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해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단순명료하고 이상적인 해결책이야말로 생명과 문명에 관한 그리스도교적 해석을 왜곡한다고 보았다.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지 못하고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스스로의 판단을 절대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너희가 (…)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며 선악과를 따 먹을 것을 종용했던 뱀의 유혹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이랬던 머튼이 천박한 이분법을 통해 십자가를 내세우며 피의 향연에 힘을 보태는 한국, 미국의 그리스도인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까? 아마도 하느님을 들먹이며 자기 잇속만 차렸던 바리새인을 향해 예수가 했던 다음과 같은 말을 상기했을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마태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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