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국장은 '꿀꿀이'의 입을 빌려 실제로 돼지의 인생이 어떤지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한편, '황금 돼지의 해'는 자본의 상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편집자>
나는 꿀꿀이다. 지구 전체를 거대한 동물농장으로 만들어 놓고 주인 노릇을 하는 인간들이 2007년 새해가 밝았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단잠을 깨고 말았다.
음력으로 아직 섣달(12월) 열나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정해년(丁亥年) 새해를 맞이했다는 둥, 새해는 황금 돼지의 해라는 둥, 오만가지 돼지 멱 따는 소리 보다 못한 말을 쏟아내는 인간들 때문에 오줌보가 터져라 실컷 웃었다.
어차피 시간과 달력이야 인간들이 자신들의 잣대로 세상을 마음대로 측정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 나 같은 꿀꿀이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현대화된 공장식 농장(factory farm)에서 사육되고 있는 돼지의 입장에서는 시간보다는 몸무게가 수명을 결정한다.
자, 나와 동족의 진짜 삶을 들어보렴.
1만 년 전 '가축'이 돼…음식 찌꺼기로 연명
멧돼지의 피를 물려받은 '꿀꿀이'의 먼 조상은 약 1만 년 전 사람들에게 붙잡혀 '가축'이 되었다. 유목민들의 가축은 '양'이고, 농경민들의 가축은 '돼지'라는 말처럼 돼지의 가축화는 정착생활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오랜 세월동안 꿀꿀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 찌꺼기로 구차한 삶을 연명해 왔다. 혹시나 사람들이 변덕을 부려 자신들을 내쫓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가끔은 사람들 꿈에 나타나 온갖 아양을 떨기도 했다. 어수룩한 사람들은 돼지꿈을 꾸면 '대박'이 터진다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꿀꿀이의 조상을 돼지·돝·도야지, 저(猪)·시(豕)·돈(豚)·해(亥), pig·hog·Schwein이라고 쓰고 불렀다. 세계의 경찰 노릇하느라 불량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에 여념이 없는 미국에서는 새끼 돼지를 pig, 성장한 돼지를 hog, 수퇘지는 boar, 암퇘지는 sow라고 부른다.
꼬리, 송곳니도 모자라 거세까지 당하는 신세
3개월 3주 3일(평균 114일~116일)을 어미 뱃속에서 편안한 삶을 살다가 세상으로 나온 꿀꿀이는 태어나자마자 몇 대의 주사를 연달아 맞았다. 그리곤 느닷없이 송곳니가 잘렸다. 너무 갑자기 당한 일이라 경황이 없는데 이번에는 다시 귀에 칼자국을 내 표식이 새겨졌고, 마취제도 놓지 않고 꼬리까지 싹둑 잘렸다.
이런 의식을 치르고 나서야 꿀꿀이는 어미 곁으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젖을 빨아먹을 수 있었다. 한 달 남짓 어미 품에서 젖을 먹는 동안은 육중한 어미에 깔려 죽지만 않는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꿀꿀이는 젖을 떼기가 무섭게 마취제도 없이 거세 수술을 당했다. 듣기로는 거세를 당하면 내시가 되어 궁궐로 들어가 평생 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다고 했다. 세상살이 한 달 만에 온갖 수모를 다 겪은 꿀꿀이는 지금까지 당한 고통을 보상받을 일만 남았다고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엄청난 법이라 했던가. 궁궐이라고 생각했던 보육우리는 비좁기 만 했다! 꿀꿀이는 "정말 짜증 제대로다!"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오줌 냄새, 똥 냄새, 사료 냄새, 항생제 냄새로 우리 안에서는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똥, 오줌과 함께 몸무게만 불리는 신세
보육우리에서 몸무게가 25kg 가량으로 불어나자 꿀꿀이는 육성돈사로 옮겨졌다. 육성돈사로 불리는 우리는 콘크리트 바닥으로 되어 있는데 짚이 없어 보금자리를 꾸밀 수도 없었다. 콘크리트 대신 철망이나 쇠파이프가 깔려 똥, 오줌이 밑으로 빠지는 현대식 우리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곳도 결코 돼지들이 살 곳은 못 된다는 얘기를 듣기도 했다.
사람들은 돼지가 공동의 보금자리를 꾸미며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다. 돼지는 숲을 돌아다니며 땅을 파헤치며 먹이를 찾고 산보를 하는 낙으로 세상을 산다. 지능이 높기 때문에 보금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응가'할 자리를 마련해 놓고 화장실로 삼는다.
하지만 이 공장식 양돈장에는 이런 배려가 전혀 없다. 먹고 자고 똥 싸고 오줌 누는 일 외에 다른 소일거리가 전혀 없다. 예전에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다른 녀석들의 꼬리를 물어 뜯기도 했는데, 지금은 어렸을 때 싹둑 잘린 이빨과 꼬리 때문에 이런 장난마저도 할 수 없다.
GMO, 육골분 사료 '범벅'…먹는 즐거움도 없다
그렇다면 먹는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요즘 사료는 온통 '유전자 변형 작물(GMO)'과 항생제 범벅이라 도통 입맛도 당기지 않는다. 소의 시체를 갈아 만든 육골분 사료와 GM 옥수수, 감자, 콩 따위와 항생제를 버무린 배합사료에는 발암성 독극물인 포르말린 가루까지 뒤섞여 있다. 물맛은 또 어떻고. 다이옥신, 대장균, 중금속으로 오염된 물은 돼지가 먹어도 구역질이 절로 난다.
그 나마 꿀꿀이가 이렇게 투덜거리며 농장주가 꼬박꼬박 챙겨주는 사료와 물을 먹을 수 있는 날도 반년이 채 못 된다. 왜냐하면 돼지고기용 품종은 몸무게가 90~100kg, 베이컨용 돼지는 몸무게가 100~110kg에 이르면 도살장으로 끌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돼지의 시간과 달력은 바로 태어나서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가지 빼꼭한 스케줄로 채워져 있는데, 대략 그 기간은 6개월~10개월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면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옛말이 확실히 맞기는 맞는 것 같다.
한국의 고기용 돼지들은 일반적으로 몸무게가 110kg 정도에 달하면 일생을 마치게 되는데, 태어난 지 약 160일~170일에 해당한다. 현대 공장형 양돈업은 그 이상 돼지를 기르는 것은 사료값, 약값, 난방비, 인건비 등을 고려할 때 경제적인 낭비로 간주하고 있다.
1년도 못 돼 도살…정신 든 채로 온 몸 찢겨
현대 양돈장에서 9~15년에 이르는 자연 수명을 다 누리는 팔자 좋은 돼지는 씨가 마른 지 오래다. 물론 일부 씨받이용 돼지들은 사형집행이 좀 더 미루어져 무기수로 살아갈 수도 있지만, 끊임없이 배란촉진을 위해 호르몬 주사를 맞아야 한다. 새끼를 낳은 지 1주일 만에 '후분만 배란' 촉진을 위해 호르몬 주사를 맞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나 할까. 씨받이용 수퇘지들은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시켜준 조건으로 인공수정을 위해 시도 때도 없이 강제적으로 정자 채취를 당해야 한다.
꿀꿀이에게는 도살장에서 맞이하는 최후가 일생에서 최고로 끔찍한 순간이다. '인도적 도살에 관한 법'에는 도살장의 쇠고리에 거꾸로 매달려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기 전에 전기충격기로 돼지를 기절시켜야 한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한꺼번에 많은 돼지들을 전기충격기로 정신없이 기절시키다 보니 맨 정신으로 마지막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쇠고리에 매달려 목을 찔러 피를 빼는 그 순간을 맨 정신으로 맞이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런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는 인간들이 돼지들을 '황금 돼지', '복덩이', '대박 꿈' 같은 수사를 붙여 자기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황금 돼지', 그런 건 없다
사실 '황금 돼지의 해'라는 말도 순전히 엉터리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징은 오행설(五行說)과 십이지(十二支)의 결합에 의해 만들어졌다. 오행설에 따르면, 갑(甲)과 을(乙)은 푸른 색, 병(丙)과 정(丁)은 붉은 색, 무(戊)와 기(己)는 노란 색, 경(庚)과 신(辛)은 흰색, 임(壬), 계(癸)는 검정색에 해당한다. 그리고 십이지에서 해(亥)는 돼지다. 굳이 따지자면 정해년(丁亥年)은 '붉은 돼지 해' 정도가 적합한 말이 되겠다. 그러므로 600년 만의 황금 돼지 해라는 말은 지나가는 기니피그가 들어도 속 터질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오행설은 공자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 처음 등장하고, 십이지를 동물과 직접 연결한 것은 2세기경 후한(後漢)의 왕충(王充)이 지은 <논형(論衡)>에서 처음 나타난다. 따라서 1년 마다 오행설과 십이지를 결합시킨 '백말 띠' 따위의 용어들이 생겨난 것도 2세기 이후의 일이 될 것이다.
아무튼 2007년이 황금 돼지 해라는 말은 양복에 고무신을 신은 것처럼 불협화음을 이루고 있다. 60년을 주기로 순환론적 시간관을 가진 중국식 시간관과 서기 원년에서 출발하여 인류의 종말까지 직선적인 시간관을 가진 서양식 시간관을 결합시킨 장삿속을 퓨전이라고 우겨도 하는 수 없겠다. 시간과 달력은 권력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지금의 권력은 '돈(자본)'이니 이런 우격다짐을 별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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