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국민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을 쳐다본다.
60년째 재위 중인 푸미폰 국왕은 태국이 소란스런 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을 때마다 국가통합에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이번 쿠데타를 주도한 육군 총사령관 손티 분야랏글린 중장도 탁신 치나왓 총리 정부를 몰아내기 위해 쿠데타를 감행했다고 선언한 직후 국민의 존경을 받는 푸미폰 국왕을 알현했다.
군부 지도자들은 TV에 출연, 국민들에게 고귀한 의도로 쿠데타를 했다고 설명할 때도 국왕의 사진을 내보냈다.
푸미폰 국왕은 법적인 권한은 거의 없지만 그를 거의 신처럼 존경하는 태국 국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유럽 왕실을 선정적으로 다루는 데 익숙한 외부 사람들에게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올해 78세인 푸미폰 국왕은 종교와 충성이 뒤얽혀 있는 태국에서 지난 60년간 정치, 사회적 격변기마다 위기관리자 역할을 해 왔다.
출라롱콘 대학 정치학 교수 티티난 퐁수드히라크는 지난 6월 푸미폰 국왕 즉위 60주년 행사 당시 "태국이 난관에 봉착하거나 위기를 만날 때마다 국민들은 국왕이 탈출로를 찾아내 우리를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그를 바라본다"고 AFP에 말했다.
1927년 12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난 푸미폰 국왕은 능숙한 요트맨이자 화가이며 작가 겸 음악가이기도 하다.
푸미폰 국왕의 부친인 마히돌 왕자는 하버드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차남으로 태어난 그가 왕이 될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부친은 그가 유아일때 사망했다. 그의 모친은 조국 시암 왕국이 입헌군주국가 타이로 변해가는 정치적 소요로부터 가족을 지키려는 일념으로 그의 청년기를 미국과 유럽에서 보냈다.
푸미폰 국왕의 형은 즉위후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 사건의 전말은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푸미폰 국왕은 형의 사망 당일인 1946년 6월9일 왕으로 선포됐다.
즉위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4년 후인 1950년 공식 즉위하면서 제9대 라마라는 공식 왕명을 받았다. 그의 풀 네임은 "땅의 힘-비할 바 없는 능력"이라는 뜻이다.
태국에서는 택시와 사무실, 상점 등 어디에서든 그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영화관에서도 관객들은 화면에 비쳐지는 국왕의 사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기립한다. TV와 라디오에서 하루 2차례씩 연주되는 국가가 나올 때면 시민들은 출.퇴근시간 지하철 승강장에서도 기립하거나 멈춰 서 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확고한 지위로 총리 20명이 바뀌고 헌법이 15차례 개정되는 수많은 쿠데타를 지켜봤다.
그의 지위는 엄격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으로 돼 있지만 그의 개입은 극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그는 1973년 방콕대학에서 소요가 발생하자 당시 총리와 핵심 추종자들에게 태국을 떠나라고 요청했고 그들은 명령을 따랐다.
1992년에는 당시 총리이던 수친다 크라프라윤 장군을 왕궁으로 불러 군를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라고 명령해 수모를 안겨줬다. 수친다 총리는 사임했다.
가장 최근의 일로는 지난 4월 25일 대법원 판사들을 혹평하면서 말썽 많은 선거와 수개월간의 시위에 따른 정치적 교착상태 타개책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푸미폰 국왕은 판사들에게 들릴까 말까 한 목소리로 "그걸 못하겠으면 사임하라. 당신들은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판사들은 선거무효를 선언하고 재선거를 실시하라고 명령했다.
푸미폰 국왕은 급속히 성장하는 소비문화 시대에도 자족(自足)과 중용이라는 고대 불교의 가치를 계속 옹호함으로써 태국 국민의 사랑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수리연구를 토대로 전국 각지의 수천개 개발사업을 지원하고 있으며 특히 방콕의 홍수를 막는 데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환경단체에서 일하는 촘마패트 소드사이(50)는 "30년전 방콕에 대홍수가 났을 때 민정을 살피기 위해 국왕이 소형 보트를 타고 나타났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왕은 아무런 발표도 없이 왕궁을 떠나 그냥 피해상황을 보러 왔다"면서 "그게 우리 국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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