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행된 <황해문화> 2006년 가을호(통권 52호)에서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가 "부끄럽지만 나는 (정부가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고 고백해 눈길을 끈다.
<황해문화>의 편집위원이기도 한 김진방 교수는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권두비평에서 이런 고백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이 올 초 '느닷없이' 추진하기 시작한 한미 FTA에서 경제학자인 본인은 물론이고 한미 FTA로 엄청난 영향을 받을 국민들 모두가 철저히 소외됐다는 사실을 꼬집었다.
김진방 교수는 '미국과 FTA를 맺으면 미국에 비해 열등한 우리의 서비스 산업이 우월해지리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기대는 데이빗 리카도의 비교우위론마저 무시하는 '대담한'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는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이른바 '뉴딜' 정책을 통해 보호해 주려고 하는 재벌 체제가 존속되는 한 한미 FTA로 양적인 경제성장은 일부 가능할지 몰라도 우리 경제의 산업경쟁력이 제고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진방 교수는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 FTA에 대한 신념이나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뉴딜' 행보에 동의하는 국민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국민들도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 후 "국민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이 신념에 따라 결연히 추진하고 국민은 따르는 것이 옳은가? 그러는 것이 민주주의인가?"라고 물었다.
<프레시안>은 김진방 교수의 이 권두비평이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고 있는 한미 FTA와 '뉴딜' 정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대변하고 있다고 판단해 <황해문화>의 양해를 구해 글 전문을 게재한다.
<황해문화>가 이번 호에 게재한 특집 'FTA와 대한민국'에는 김진방 교수의 글 외에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의 '참여 없는 FTA, 이대로 가면 안 된다', 정인교 인하대 경제학부 교수의 '한미 FTA의 제조업 및 농업에 대한 예상영향', 임준 가천대학교 의대 교수의 '의료 산업화를 강제하는 FTA', 박거용 상명대 영어교육과 교수의 '경제 논리의 흥정 대상으로 전락한 교육 개방', 지금종 문화연대 사무총장의 '예고된 몰락, 한미 FTA와 문화' 등 한미 FTA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는 글이 여럿 실려 있다. <편집자>
밝히기 부끄럽지만 나는 몰랐었다. 우리 정부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서둘러 맺으려 한다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경제학을 가르치고 경제를 연구하는 게 직업인 내가 그 사실을 한 동안 몰랐던 것이다. 내가 알게 된 것은 3월 말에 한 인터넷신문에 실린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 비서관과의 인터뷰를 읽고서이다. 작년 언제부터인가 대통령의 의지에 따라 한미 FTA가 추진돼 왔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다.
한미 FTA 추진은 느닷없는 일이다. '느닷없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무엇이 나타남이 전연 뜻밖이고 갑작스럽다'로 풀이돼 있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참여정부의 FTA 추진 계획에서 우선대상국은 일본, 싱가포르, 멕시코, 캐나다, 인도 등이었다. 미국이나 중국과의 FTA는 우호적인 여건을 마련해가면서 점진적으로 추진하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모든 FTA는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진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방침마저도 그 전의 방침에서 크게 달라진 것이다. 여러 나라와 동시에 적극적으로 FTA를 추진한다는 방침이 정해지고 알려진 것은 2003년이다.
역시 한참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대통령이 한미 FTA에 관한 자신의 소신을 밝힌 것은 올해 초이다. 대통령은 결코 짧지 않은 신년연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아주 짧게 밝혔다. 1월 18일의 신년연설을 작은 글자로 인쇄하면 열한 쪽에 이르는데 그 중 열번째 쪽에서 세 문장을 찾을 수 있다. "그동안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해 왔습니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미국과도 자유무역협정을 맺어야 합니다. 지금 대화가 시작됐습니다만 조율이 되는대로 협상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2월 초에 한미 두 나라가 FTA 협상 공식 개시를 선언했고 6월 초에 1차 협상이 워싱턴에서 시작됐다. 7월 초에는 2차 협상이 서울에서 계속됐다. 이런 과정이 적어도 나에게는 전연 뜻밖이고 갑작스럽다.
한미 FTA 추진은 우리 국민 모두에게 엄청난 일이다. 미국이 우리나라의 최대 교역국이며 농업과 서비스 산업에서 우리나라보다 훨씬 우월하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미국의 요구가 시장 개방이나 관세 철폐에 그치지 않고 제도와 체제의 변화를 포함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소위 포괄적 FTA 혹은 높은 수준의 FTA를 맺자는 것인데 그래야 미국이 우리의 서비스 시장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미국의 시장 개방이나 관세 철폐보다는 우리의 제도와 체제 개혁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듯하다. 미국의 힘을 빌려 우리의 제도와 체제를 개혁하자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의 문화와 교육 그리고 의료를 포함한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노 대통령의 한미FTA 추진 근거, '비교우위론'마저 무시하는 대담한 발상
자유무역이 경제성장을 촉진한다는 주장은 230년 전에 영국의 아담 스미스에 의해 전개되면서 경제학의 정설이 되었고, 20여년 뒤에는 데이빗 리카도의 비교우위론으로 확립됐다. 비교우위론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모든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산업을 갖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비교우위'의 정의에 의해서 옳을 수밖에 없는 명제다. 다른 나라에 비해 절대적으로는 모든 산업이 열등하더라도 그 중에서 덜 열등한 산업이 있을 터이고 덜 열등하다는 것을 달리 말하면 상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게 된다. 그래서 모든 나라는 반드시 다른 나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산업을 가진다.
비교우위론의 다른 부분은 각 나라가 열등한 산업을 포기하고 우월한 산업에 집중하면서 서로 무역을 확대한다면 모든 나라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각 나라가 한정된 자원으로 더 많이 생산해서 서로 교환하면 모든 나라가 더 많이 소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반론이 있다. 그 중에서는 열등한 산업에서 우월한 산업으로 자원을 재배치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이 든다는 지적도 있고, 지금 열등한 산업이라고 포기해버리는 것이 경제발전을 위한 전략으로는 좋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노무현 대통령은 전혀 다른 기대를 하고 있는 듯하다. 경제학의 정설로 자리 잡은 비교우위론뿐만 아니라 그에 대해 제기된 여러 반론을 모두 무시하면서 새로운 주장을 펼친다. 미국과 FTA를 맺으면 미국에 비해 열등한 우리의 서비스산업이 우월해지리라는 것이다. 우리의 제도와 체제를 미국식으로 바꾸고 미국 기업의 도전을 받아들이면 우리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이 미국처럼 높아진다는 것이다. 대통령의 기대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비스 산업의 생산성 향상으로 경제가 성장할 뿐만 아니라 양극화도 해소되리라고 말한다. 참으로 대담한 발상이다.
서비스산업 중 근래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시스템통합(SI)과 광고를 포함한 기업 관련 서비스이다. 그런데 재벌 체제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업무가 대부분 계열회사에 맡겨진다. 예를 들어 SI의 경우 삼성그룹에서는 삼성SDS가 도맡고 LG그룹에서는 LG-CNS가 도맡고 SK그룹에서는 SKC&C가 도맡고 있다. 그리고 이런 회사들은 대부분 총수의 자녀들이 주식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그룹은 총수의 아들이 물류회사(글로비스)와 광고회사(이노션)의 대주주이다. 이런 체제에서는 기업 관련 서비스 산업이 계열사 사이의 내부거래에 의존해서 성장은 하더라도 경쟁력을 갖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정부가 재벌체제는 그대로 둔 채 어떤 제도를 어떻게 바꿔서 기업 관련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을 높이겠다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한다. 개방을 통한 개혁의 구체적 내용도 결정하거나 검토하지 않은 채 막연한 기대만을 가지고서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지는 않은가 의심스럽다.
이처럼 엄청나고 대담하면서도 막연한 일이 느닷없이 추진되고 있다. 대통령의 신념과 결단으로만 가능한 일이다. 대체 그 신념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어떤 책이나 보고서를 읽고 갖게 된 신념일까? 대체 그 결단은 어떻게 내려졌을까? 어떤 과정을 거치고 누구와 논의해서 내린 결단일까? 과연 국민은 대통령의 신념에 동의하고 그의 결단을 따르겠는가? 과연 국민은 그러한 신념과 결단을 예견하고서 대통령 선거에서 표를 찍었을까? 국민이 예견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은 신념에 따라 결연히 추진하고 국민은 따르는 것이 옳은가? 그러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김근태의 '뉴딜'론…"본래 거래란 그런 것이 아닌가?"
나의 궁금증은 그칠 줄 모른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도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그의 결단은 미국이 아니라 재벌을 향한 것이다. 그런데 재벌 체제를 개혁해서 효율을 높이고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것이 아니고 재벌 체제를 보호해서 투자와 고용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공정거래법과 상법을 바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총수의 기업 지배권을 강화할 제도를 도입하고, 그 대가로 재벌 기업은 투자를 늘리는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대통령의 선거공약을 찾아보았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서는 찾지 못해서 당시의 신문에서 찾았다. 분명 대통령의 선거 공약은 열린우리당 의장의 제안과 달랐다. 노무현 대통령 후보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강화하고, 재벌그룹에서 금융보험회사를 분리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하거나 제정하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이 당선된 후에는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대통령의 선거 공약은 열린우리당의 약속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더 많은 예외를 인정하면서 누더기가 되었고, 금융보험회사 분리는 도입하려는 시도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제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 총수의 기업지배권을 강화하는 장치를 도입하려 한다. 재벌 개혁에서 재벌 강화로 돌아선 것이다.
선거공약은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정당의 정책은 바뀔 수 있다. 상황이 달라지고 판단이 수정되면 새로운 정책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 의장은 어떤 판단에서 그런 제안을 했을까? 만약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재벌 기업의 투자를 막는다고 판단했다면 그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는 대신 일방적으로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하고서는 투자 확대를 기다렸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열린우리당 의장이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와 투자 확대를 맞바꾸는 거래를 제안한 것은 출자총액제한제도가 투자를 저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며 재벌기업이나 재벌총수에게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는 이익이 되고 투자 확대는 손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본래 거래란 그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열린우리당 의장은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가 재벌기업이나 재벌총수에게 어떤 이익을 준다고 판단했을까? 국민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그리고 열린우리당 의장은 재벌 기업의 투자 확대가 재벌 기업이나 재벌 총수에게 어떤 손해를 준다고 판단했을까? 그러한 손해에도 불구하고 이뤄지는 투자가 국민경제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했을까? 아니 도대체 판단은 한 것일까?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
한미 FTA 선전하는 정부와 관변 홍보물 봇물
노무현 대통령의 신념에 동의하거나 그의 결단을 따르려는 국민도 많을 것이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의 판단을 이해하는 국민들도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처럼 그렇지 않은 국민들도 있을 것이다. 대통령과 의장은 결단을 내리기 전에 그들에게도 알리고 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요즈음 부쩍 청와대나 국정홍보처에서 보내온 책자와 전자우편이 많아졌다. 대부분 한미 FTA에 관한 것인데 선전과 설득만 가득하다. 한미 FTA와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정부 부처와 연구기관에서도 한미 FTA에 관한 전자우편이 많이 오는데 별로 다르지 않다. 내가 스스로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자료는 별로 없다. 없어서 보내지 못하는 것일까? 있는데도 보내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전자일 것이다. 한미 FTA가 느닷없기는 대부분의 정부기관도 마찬가지일 테고 갑작스레 그런 자료를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설혹 그런 자료가 있더라도 보내지 않을 듯하다. 이미 대통령의 신념이 굳어지고 결단이 내려져서 추진되고 있으니 정부기관으로서는 검토하고 토론할 일이 아니다. 그저 국민을 설득하려 할 뿐이다.
토론 공화국은 세워지기도 전에 허물어졌고, 예견되는 것은 한미 FTA와 재벌 체제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다. 과연 어떻게 진행되고 수습될까? 대체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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