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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 함께 읽어 마땅한 사상가가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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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여기 함께 읽어 마땅한 사상가가 있구나"

[화제의 책] <신영복 함께 읽기>

글쓴이가 두 사람 이상인 책이면 '누구 외 지음'으로 저자를 표시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여럿이 함께 씀'으로 표시돼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강준만, 김동춘, 김명인, 김명환, 김문식, 김민, 김승광, 김은정, 김정남, 김창남, 김창진, 김학곤, 김형찬, 김호기, 노회찬, 문행주, 박강리, 박경태, 박문희, 박창기, 박창희, 배기표, 배병삼, 배진, 백원담, 서숙, 손혜원, 신남휴, 신정완, 심실, 심은하, 오한숙희, 유낙준, 유홍준, 윤홍렬, 이구영, 이권우, 이규성, 이근성, 이승우, 이승혁, 이재정, 이해익, 이현재, 임규찬, 장명국, 정풍송, 조병은, 조정래, 조홍범, 조희연, 최영희, 탁현민, 하승창, 한예영, 한홍구, 허문영, 홍윤기, 한돌.

굳이 글쓴이들을 위와 같이 나열한 까닭은 '신영복 선생님의 출판을 귀하게 생각하는 모임(신출귀모)'을 대신해 박경태가 쓴 글에 나와 있듯 '20년 징역살이 동안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철저히 단절되었던 선생께서 어쩌면 이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는지' 새삼 놀랐기 때문이다. 그 인연이 이 책으로까지 결실을 보게 된 첫 걸음은 신영복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문집을 준비하기 위해 작년 가을에 모인 '신출귀모'였다. 교수의 정년 퇴임을 기념하는 데는 기념 논문집이 보통이지만, 신출귀모는 신영복과 논문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다.

가정교사 '영복 오빠'부터 여장남자 신영복까지
▲ ⓒ프레시안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신영복을 읽는다'는 제목 아래 삶과 사유, 글과 예술, 신영복 다시 읽기, 신영복 깊이 읽기 등으로 다시 나누어져 있다. 굳이 말하자면 신영복의 생각과 사상의 세계를 학자나 전문가들이 살펴보는 부분이며, '오늘날 우리는 왜 신영복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들이기도 하다. 2부는 '신영복을 말한다'라는 제목 아래 신영복의 삶의 다양한 시기와 장면에서 맺은 다양한 인연들을 밝히는 일종의 '그때 그 시절 신영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아무래도 '그때 그 시절 신영복'에 먼저 눈길이 간다. 그중에서도 1960년 서울 성북동 어느 가정집에 입주 가정교사로 들어간 대학생 '영복 오빠'가 인상적이다. 당시 그 가정집 식구로 여섯 살이던 심실은 모든 이에게 다정다감했던 영복 오빠를 추억한다. 어린 심실 씨의 소꿉놀이 동무까지 해주었던 영복 오빠는 입주 가정교사를 그만둔 다음에도 한 식구처럼 자주 집을 방문했고, 수배 중에도 그 집에 숨어 살았다. 출소 후에도 심실의 집을 찾아와 담벼락을 더듬으며 기억에 잠겨 눈물을 흘리던 영복 오빠.

대전교도소 경비교도대원으로 군 복무를 했던 문행주(전남 화순군의회 의원)는 신영복이 수감돼 있는 사방이나 서화반 근무를 자청했다. 그곳에서 신영복은 문행주에게 대학 시절 이야기, 육사 생도들을 진정한 민족의 동량으로 만들려 노력했던 이야기, 교수 시절 달동네 아이들과 청구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독서토론도 하고 놀러가기도 했던 이야기 등을 들려주었다. 교도소 시절의 그 인연은 신영복이 문행주의 결혼식 증인이 되는 것으로까지 이어졌다.

신영복의 육사 교관 시절 제자 김학곤은 칸트, 헤겔을 논하며 철학과 경제학을 연관시켜 강의하면서도 세상살이와 연관지어 쉽게 설명해주었던 육군 중위 신영복을 추억한다. 김학곤 생도가 3학년을 보내고 있을 때 터진 통일혁명당 사건은 '순수하고 여린 심성의 선생님이 설마 그럴 리 없다'는 의구심으로 생도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임관하여 서슬 퍼런 보안사에서 대부분의 군 생활을 보낸 김학곤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 펴냄)을 읽으며 '혹시 나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이는 없었을까' 잠 못 이루기도 했다.

그 밖에도 고교 동창 배진은 학업, 예능, 운동까지 여러 방면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던 친구 신영복을 추억하고, 초등 및 중학 동창 정풍송은 응원 단장을 맡아 재미있는 동작과 표정으로 능수능란하게 응원을 주도하고 글짓기 솜씨도 탁월했던 친구 신영복을 돌이켜본다. 그런가 하면 서울대 상대 동창 홍재영은 상대 홍릉제 행사에서 여장을 하고 무대 연기를 했던 신영복을 떠올린다. 당시 여장과 연기가 얼마나 그럴듯했던지 구경 왔던 고려대생 친구가 홀딱 반해 신영복과 데이트 한 번 하려고 따라다녔단다.

삶과 말과 글이 '시대의 중추'를 건드린다

한편, 1부에서 사상가로서의 신영복을 이야기하는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는 신영복 사상을 인간해방적, 문명성찰적 진보주의로 규정한다. 이것은 서구중심주의와 비서구중심주의를 모두 넘어서서 인간해방과 사회해방을 위한 새로운 보편 사상을 모색하려는 치열한 고투이기도 하다. 또한, 고려대 철학과 교수 김형찬은 신영복 사상의 철학적 특징을, 관계를 통해 자아와 타자가 함께 존재하며 서로서로 만들어나가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관계론으로 설명한다. 신영복은 모든 나라, 모든 문화가 공존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관계론이야말로 '진정한 21세기의 정신'이라고 강조한다는 것.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강준만은 개혁과 진보 진영이 투쟁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현실에서 신영복 사상이 갖는 중요한 정치사상적 의미를 지적한다. 정치를 증오를 부추기는 '적 만들기' 게임으로 오해하는 많은 이들에게 신영복은 '정치란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최대한으로 조직해내고 키우는 일'임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정치가 정치인들의 권력 쟁취 게임이 아니라 진정한 사회 발전을 꾀하는 실천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성공회대 사회학과 교수 김동춘은 분단 문제에 대한 시각에서 신영복이 좌파 혹은 진보적 민족주의 입장을 전적으로 따르지는 않는다는 걸 지적한다. 신영복은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민족 정체성을 지킬 수 있을지 몰라도 세계로부터 고립되고 정체될 수밖에 없으며, 개방성에 경도되면 문화의 발전과 성장이 이루어질지는 몰라도 식민지화, 종속화의 위험이 있다고 본다는 것. 때문에 신영복은 북한 체제에 대해서도 그 특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 근현대 출판의 역사를 통틀어 이렇게 많은 필자가 여러 각도에서 살아 있는 인물을 조명한 책이 있었을까? 한 사람의 삶과 말과 글이 한 시대의 중추를 정확히 건드릴 때, 더구나 그것이 일관성을 보여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사상가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신영복은 사상가가 아닐 수 없으며, 그것도 이 책의 제목대로 '함께 읽어야' 마땅한 사상가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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