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남아공 월드컵 관련 기사는 개막일인 11일을 기준으로 24일 현재까지 대략 5만 건을 넘었다. 특히 한국 대표팀의 경기 전후에는 포털 사이트의 뉴스 화면은 물론 주요 일간지의 1면에서도 월드컵 외의 이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그만큼 독자들의 눈과 귀가 집중된다.
이렇다 보니 월드컵 반짝 특수를 노린 해괴한 기사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실제로 '월드컵'을 표제어로 한 기사들 가운데 경기 자체와 관련된 기사는 비율상 드물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 댓글 침소봉대
기사 아이템을 다양화하는 것은 좋지만 그 내용은 대부분 새로울 것 없이 '바람몰이용'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누리꾼의 과격한 욕설이나 응원에 참여한 여성들의 사진을 내세운 뒤 그것이 바로 '화제'라고 포장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경기 관전평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는 누리꾼의 댓글은 좋은 기사 소재일 수 있다. 그러나 자극적인 발언을 포장시켜 전체 여론을 보여주는 양 호도하는 경우도 있어 "도를 넘었다"라는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북한이 포르투갈에 0:7로 대패하고 난 다음 날인 22일 <세계일보> 인터넷판에는 다양한 누리꾼 관전평을 섞어 담은 기사가 실렸다. 안타깝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천안함 사건과 연결 지어 북한팀이 고소하다는 반응도 있었다는 평범한 기사였음에도 "북한 0:7 대패…'46명 죽인 적들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이 달렸다. 기사 제목을 캡쳐한 사진은 곧 트위터로 옮겨져 누리꾼들의 질타를 받았다.
▲ <세계일보>는 댓글을 다룬 기사에서 자극적인 제목을 뽑아 논란이 됐다. |
■ 'OO녀'의 끝없는 재생산
축구 애호가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스포츠지를 중심으로 여전히 '응원녀'를 노골적으로 띄워주는 행태가 계속되고 있다.
2002년, 2006년 월드컵에서 응원 사진으로 뜬 미나와 '엘프녀' 한장희를 잇고자 하는 '삼성동 쌔끈녀', '그리스 응원녀', '아르헨티나 발자국녀', '월드컵 복근녀', '나이지리아 응원녀' 등이 매 경기마다 5~10명 꼴로 나오고 있지만 대부분 순수하게 화제가 되는 경우는 없다.
그녀들의 직업이 대부분 레이싱걸이나 쇼핑몰 사업가, 가수 지망생으로 밝혀지고 있는 만큼 그녀들도 언론 플레이를 조장한 죄(?)가 있지만, 더 볼썽사나운 것은 "화제를 모았다. 알고 보니 연예인 지망생이었다"고 홀로 박수 치고 홀로 놀라는 언론이다.
해당 언론사와 연예인 기획사 간의 띄워주기 계약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없던 화제나 누군가 지어주지도 않은 이름을 만들어내는 행태에는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월드컵 중계 화면에 잠깐 잡힌 묘령의 여인이나 평범한 유학생마저 '패널티녀', '신주쿠 응원녀'로 언론에 의해 발굴되다시피 하는 형국이다.
반복되는 수법에 피로를 느낀 독자들을 의식한듯 이제는 많은 매체가 역으로 'OO녀'들의 마케팅을 비난하고 나섰음에도 여전히 "OOO, 제2의 미나 되나?"라는 제목이 태연스레 '낚시질'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 외신 맹종과 미확인 취재(?)가 만들어낸 히딩크 오보
무조건적인 외신 베껴 쓰기 관행도 문제가 되고 있다. 최근 있었던 '히딩크 발언 오보 소동'이야말로 확인 없이 받아 쓴 기사가 얼마나 무섭게 확산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18일 언론들은 전날 아르헨티나에 3골 차로 패한데 대한 평가와 분석을 내놨다. 주로 인용되는 것은 외신과 해외 축구 전문가였다. 그 가운데서도 한국인들에게 공신력 1위를 자랑하는 거스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아르헨티나전에 독설과 질타를 퍼부었다는 외신 보도가 20일 전해지자 수많은 매체가 이를 받아썼다.
▲ 거스 히딩크 전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뉴시스 |
히딩크라는 이름값과 발언의 만만치 않은 수위로 인해 이내 화제가 됐지만 몇 시간 뒤 최초 보도가 오보였던 것으로 판명났다.
네덜란드에는 <풋발 인터내셔널>이라는 잡지가 있을 뿐 <풋볼 인터네셔녈은>은 없다. <풋발>조차 히딩크와 최근 인터뷰한 사실이 없다. 한 누리꾼이 축구 게시판에 쓴 조작 기사를 한 인터넷 매체의 기자가 별다른 확인을 받아 쓴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최초 보도한 기자의 잘못만은 아니라는 게 미디어 비평지와 누리꾼들의 지적이다. 잘못은 받아쓰기 관행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외신 보도라면 확인 없이 최초 보도의 내용과 구성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한국 언론의 오래된 습성이기 때문이다.
■ 북한 보도로 본 외신의 '속살'?
이번 월드컵 기간 동안엔 한국 언론의 외신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까발려지는 한편, 외신의 의제 설정 수준이나 공신력도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북한에 대한 왜곡된 편향과 과도한 추측만으로 구성되는 '카더라' 식 기사들 때문이다.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이후 44년 만에 월드컵 무대를 밟은 북한 대표팀에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 게다가 폐쇄된 체제로 인해 선수들의 외부 접촉이 적다보니 더욱 신비감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다른 팀에 대한 기사에서는 나올 수 없는 해괴한 소재부터 접근하는 균형 잃은 태도와 확인되지 않은 소문을 기정사실화하는 행태는 씁쓸함을 자아내고 있다.
외국 언론들이 도가 지나쳤음은 외국 선수들의 반응을 통해 드러났다. 북한과의 경기에서 크게 이긴 포르투갈 대표팀의 미드필더 티아구(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24일 <AFP>에 북한 선수들이 월드컵이 끝나고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국가로 되돌아갔을 때 불이익이 닥칠까봐 걱정했다고 전했다.
국내 누리꾼들 사이에서 "북한팀 패배하면 아오지 탄광행"이라는 조롱으로 압축되고 있는 괴소문이 이미 타국 선수들의 내면에 사실로 각인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김정훈 북한 국가대표팀 감독 ⓒ뉴시스 |
이 같은 질문에는 북한팀에 대한 기사는 타국팀에 대한 기사와 별도로 이미 '해외 토픽' 류로 분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겉으로는 세계인의 축제를 말하면서 유독 북한에만 '벌'을 강조하는 것은 이중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이런 질문에 대해 김정훈 감독은 "(16강에 오르지 못한다 할지라도) 다른 일은 없을 것"이라고만 답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확인된 바 없는 "김정훈 감독이 김정일 위원장이 개발한 '스텔스 전화기'로 경기 지시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 선수들의 연봉은 10만원대 수준이다", "북한 선수들이 콜라 한 캔을 나눠마셨다" 등의 소문이 미국과 중국 언론을 통해 나왔고, 다시 한국에서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보도를 바탕으로 세계 주요 스포츠 경기에 북한이 참가하지 못하도록 보이콧해야 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미국 저널리스트로 남아공에 거주하고 있는 이브 페어뱅크스는 최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기고한 글에서 "북한 축구팀의 목적은 김정일 지도자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북한팀 대변인의 말을 남아공 기자들을 통해 들었다면서 이 같이 주장했다.
이처럼 '카더라'는 그대로 주장이 되고 그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되며 이어 한층 더 강해진 '카더라'를 재생산하게 한다. 이 사이클이 국제적 규모로 돌아가는 월드컵 무대에서 일찍이 해괴한 존재로 낙인 찍힌 북한은 좋은 먹잇감이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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