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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랄라는 아랍 최고의 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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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나스랄라는 아랍 최고의 우상"

"그는 레바논인을 이란에 팔아먹고 있다" 혹평도

세계 최강의 전투력을 지녔다는 이스라엘군을 상대로 레바논 무장단체 헤즈볼라가 한달 가까이 싸우고도 끄떡없이 버텨내자, 서방세계가 그 지도자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을 노골적으로 지원해온 미국의 주류 언론도 헤즈볼라의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에게 찬사를 보내는 기사를 실을 정도다.
  
  <뉴욕타임스(NYT)>는 7일 '아랍세계의 우상으로 떠오른 헤즈볼라 지도자(Arab World Finds Icon in Leader of Hezbolla)'라는 기사에서 "아랍세계는 새로운 우상을 갖게 됐다"고 전했다.
  
  "나세르도 가고… 후세인도 가고…"
  
  <NYT>는 이 기사의 서두를 이렇게 풀어갔다.
  
  "레바논에 휴전이 성립될지 여부는 한 인물의 의견에 좌우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레바논의 시아파 무장단체) 헤즈볼라의 사무총장 셰이크 하산 나스랄라다. 그는 거의 4주간을 이스라엘군과 싸우면서 자신과 그가 이끄는 집단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
  
  이어 <NYT>는 과거 아랍의 영웅으로 떠오른 인물들을 격하시킴으로써 나스랄라를 아랍 역사상 최고의 영웅 반열에 올려 놓았다.
  
  NYT에 따르면 1952년 군사혁명을 통해 아랍만족주의의 선봉이 됐던 가말 아브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지난 1967년 아랍-이스라엘의 6일 전쟁 중 이스라엘이 예루살렘과 골란고원, 그리고 시나이 반도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있는데도, 라디오 공식 연설에서 "유대인들을 바다에 쓸어넣어 버리겠다"는 공허한 위협이나 한 인물이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역시 "이스라엘의 절반을 불태워버리겠다"는 헛소리나 한 대통령이었다. 후세인은 당시 요란한 소리를 내는 스커드 미사일 몇 발을 이스라엘에 쏘아댔을 뿐이다.
  
  팔레스타인의 야시르 아라파트도 예루살렘을 되찾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말뿐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NYT>는 올해 46살의 나스랄라에 대해서는 "성직자로서 충실한 교리와 아랍-이스라엘 영토 분쟁의 양상을 완전히 바꿔버리는 장군의 강철같은 결단력을 겸비했다"고 찬사를 바쳤다.
  
  <NYT>는 한 아랍 국가의 부총리의 '오프 더 레코드' 발언까지 동원했다. 그는 "나스랄라는 중동에서 가장 막강한 인물"이라면서 "자신이 말한 것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유일한 아랍의 지도자"라고 탄식조로 말했다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나스랄라의 전사들'
  
  나스랄라는 1992년 이스라엘의 로켓 공격으로 살해된 압바스 무사위의 뒤를 이어 32세의 나이로 헤즈볼라의 지도자로 선출됐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나스랄라의 천재성은 학교 교사, 푸주한, 트럭 운전사 등 일반사람들 수백명을 전사로 길러내는 데서 돋보인다. 나스랄라는 천국에 보장된 자리가 있다고 약속하면서 종교적인 감화를 통해 이들이 죽을 때까지 싸우도록 고취한다.
  
  나스랄라는 친자식들도 전선에 내보냈다. 아랍인 아버지들은 자식을 낳으면 맏아들의 이름으로 '누구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만큼 맏아들은 가문을 대표하는 자식이다. 나스랄라 역시 '아부 하디'로 불리는데, '하디의 아버지'란 뜻이다.
  
  그런 맏아들 하디는 1997년 9월 18살의 나이로 이스라엘군과 싸우다가 사망했다.
  
  이 때문에 '하디'라는 이름은 곧바로 나스랄라에 대한 신뢰와 대 이스라엘 전투에서의 나스랄라 가문의 헌신을 추종자들에게 떠올리게 한다는 것.
  
  나스랄라는 하디가 숨진 바로 그날,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폐허가 된 남부 베이루트 마을 하레트 흐레이크에서 예정됐던 연설을 강행했다.
  
  그는 아들의 사망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다가 군중들이 '순교자들'에 대해 말해줄 것을 소리 높여 촉구하자 하디의 죽음을 '위대한 승리의 일부'라고 말해 추종자들의 열광을 이끌어 냈다.
  
  그는 나중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적들에게 공개석상에서 우는 모습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았다"면서 "남 몰래 애도했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현재 딸 한 명과 '살아 남은' 아들 2명이 있다. 올해 26세인 차남 자와드 역시 레바논 남부 전투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나스랄라는 검소하게 살고 헤즈볼라의 지도부 이외의 사람들과 친교를 맺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보안을 이유로 전화를 사용하지 않지만, 수천명에 이르는 구성원들을 만나고, 그들의 경조사가 있을 때 사람들을 시켜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잊지 않는다.
  
  그는 또 뛰어난 웅변가이기도 하다. 정통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면서도, 레바논 방언들도 적절히 섞어쓰며 자신의 연설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대중에게 쉽게 각인되는 수많은 표현들도 창안해 냈는데, 예를 들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거미집보다 허약한'이라는 문구를 즐겨쓴다.
  
  나스랄라, 이란의 이슬람 혁명 노선에 심취
  
  1960년 베이루트에서 태어난 나스랄라는 동부 베이루트 카란티나 지방에서 자랐다. 이 곳은 가난한 기독교 아르메니안인들, 팔레스타인 출신, 드루즈파, 시아파 주민들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나스랄라의 아버지는 조그만 야채가게로 생계를 꾸려갔으나, 1975년 내전으로 나스랄라 가족은 고향을 등졌다.
  
  9명의 자식 중 장남인 나스랄라는 한 때 이라크 나자프의 유명한 신학교에 들어갔다가,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의 비밀 경찰에 검거되기 직전 레바논으로 탈출해 1978년 당시 신흥 시아파 무장조직인 아말에 가담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베카 밸리'의 사령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79년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란의 이슬람혁명이야말로 만년 2등급 취급을 받았던 시아파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판단하고, 1980년 초 헤즈볼라로 옮겼다.
  
  그는 1989년 이란의 쿰에 있는 신학교에서 잠깐 몸담기도 했다. 이같은 전력 때문에 그의 진정한 모습은 레바논의 이해관계보다는 이란의 혁명정신을 실천하는 데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NYT>는 미국의 주류 언론답게 나슬랄라와 같은 레바논 사람이면서도 나스랄라에게 비판적인 한 사회학자를 동원해 나스랄라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기도 했다.
  
  레바논 사회학자이자 시아파 성직자 후손인 와다 샤라라에 따르면 우선 나스랄라가 쓰는 검은 터번은 예언자 모하메트의 정통 후계자가 될 수 있는 성직자라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또 그의 연설은 마술사, 또는 '디즈니 방식'이라고 할 만큼 청중을 사로잡는다.
  
  그의 연설을 이런 식이다."나는 당신의 목소리이며, 당신의 뜻이며, 당신의 양심이고, 당신의 저항입니다."
  
  샤라라는 "나스랄라는 자신을 낮추면서도 그같은 소명을 부여받는 자임을 느끼게 한다"면서 "손에서 토끼를 꺼내면서, 자기를 지켜보는 관중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마술사와 같다"고 덧붙였다.
  
  나아가 샤라라는 "나스랄라는 레바논 주민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또 그들을 다치게 하고 삶의 터전을 파괴당하는 일을 벌이지 않겠다는 확신을 주면서 그들을 팔아먹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는 "또한 나스랄라는 그 자신을 공포스러운 존재로 부각시켰다"면서 "그는 대중들이 쉽게 믿고, 꾀임에 잘 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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