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콰지모도, 그 중증 장애인의 절규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콰지모도, 그 중증 장애인의 절규

김민웅의 세상읽기 〈226〉

대학로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빨래〉는 서울의 어느 골목 가난하고 어렵게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무대입니다.

3000회를 넘긴 록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이 1970년대의 상황을 재구성하면서 지하의 인간상을 보여준 작품이었다면, 뮤지컬 〈빨래〉는 지상의 세계에서 여전히 60년대식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민초들의 눈물과 희망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특히 눈에 뜨이는 것은, 〈지하철 1호선〉의 조선족 처녀 선녀 대신, 몽골 출신의 이주노동자가 등장하고 무대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소리만 들리는 중증 장애인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강원도 시골에서 올라온 책방점원 서나영이 있습니다.

각박한 서울에서 미래의 희망을 일구어내기 위해 온갖 모욕과 천대를 견뎌내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 이들에게는 서로에 대한 인정과 사랑이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여러 가지 아픔과 고뇌를 빨래하듯 깨끗하게 빨아버리고, 또 바람에 말리면 다시 새 옷처럼 깨끗해지듯이 새로운 기운으로 살아가자는 요지가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고뇌가 행복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이 다소 단순하고 갈등이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점이 작품이 좀더 진화했으면 하는 아쉬움으로 남지만 요즈음과 갈은 시절에 70년대 달동네 이야기 같은 소재로 관객을 모았다는 점은 주목됩니다.

그만큼 우리의 현실은 아직도 힘겹고 혼자서 버텨내기에는 결코 간단치 않은 좌절과 절망이 존재합니다.

이주노동자라고 갖가지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몽골 청년 솔롱고, 그리고 삼십년이 다 되도록 중증 장애자 딸을 돌보는 주인집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 시대가 어떤 온도의 인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잘나고 가진 것 많은 이들만 세상에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 이 사회에서 이들 골목길 동네의 민초들이 끼어들 틈은 없습니다.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도는 오늘날로 치면 중증 장애자입니다.

그의 등은 굽었고 눈은 한쪽이 멀었으며 이는 삐져나오고 귀는 들리지 않습니다. 15세기 프랑스 사회의 온갖 모순의 중압에 시달린 인간의 대표적 상징입니다. 중세의 질서를 알리기 위한 종을 치느라고 그의 귀는 멀었고, 그는 〈바보제〉에서 가장 못생긴 존재로 뽑혀 조롱의 대상이 되기까지 합니다.

한편, 〈노트르담의 꼽추〉 첫 장면에는 "정의의 궁전"이라는 이름의 광장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펼쳐진 연극에는 귀족, 성직자, 자본가, 노동자 네 개의 계급을 상징하는 인물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콰지모도는 이 네 계급의 가장 밑바닥인 노동자에도 들지 못합니다. 그가 사랑하게 되는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도 마찬가지이고 그들과 함께 하는 민초들 모두가 다 노동자 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철저한 국외자의 존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국외자 가운데 국외자인 콰지모도는 사랑을 위해, 자신의 귀를 멀게 했던 노트르담의 종을 새로운 시간의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로 바꾸는데 성공합니다. 그를 장애자로 머물러 있게 하면서 모멸과 천시의 고통을 주어왔던 시대의 성채를 뒤흔든 것이었습니다.

그로써 콰지모도는 세상의 양심을 일깨웠고, 혁명의 시대를 예고했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한 권리와 자유가 그에게도 있음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무수한 장애인들이 자신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요구하면서 삭발까지 했습니다.

그들의 눈에 떨어지는 눈물은 우리의 양심에 떨어지는 폭포수입니다. 그들의 머리에서 잘려 나간 한 올 한 올의 머리카락은 우리의 폐부를 찌르는 이 시대의 고발입니다. 그들이 외치는 절규는 새로운 시간이 오기를 갈망하는 종소리입니다.

노동자도 되지 못하는 힘이 없는 이들이 골목길 가난한 동네에서 시내 중심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중세 노트르담의 질서.

이걸 깨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리 빨아도 깨끗해지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고 말 겁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은 그 누구도 자신의 외모와 신체적 조건으로 차별과 멸시를 받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존엄합니다.

*이 글은 〈프레시안〉의 편집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에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