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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간인을 학살하는가…제주와 레바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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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민간인을 학살하는가…제주와 레바논"

[화제의 책] 제주 4ㆍ3에 주목한 <기억의 정치>

권귀숙의 <기억의 정치>(문학과지성사 펴냄)는 한 집단 또는 사회가 기억을 통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 연구한 이론서다. 권귀숙은 1990년대 초부터 제주도에 거주하며 지역 주민들의 일상과 역사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 왔다.

그는 이 책에서 최근 사회학에서 주목받고 있는 '기억이론'에 바탕을 두고 '제주 4·3 사건'을 분석했다. 제주 4·3 사건은 기억이 아닌 공식 역사 속에서는 1948년 4월 3일 발발해 1954년 9월 21일에 끝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대량학살 사건이다.

기억은 정치적, 문화적 산물…제주 4·3의 기억

기억은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그러나 권기숙에 따르면 기억은 정치적, 문화적 산물이기도 하다. 기억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경험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할 만한 것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공유하면서 한 사회의 전통이 된다.
▲ <기억의 정치>(문학과지성사 펴냄). ⓒ프레시안

저자는 기억을 객관적 자료나 텍스트로 바라보기보다는 기억이 형성·전수·재현되는 사회적 과정에 관심을 두고 기억을 억압하거나 통제하는 정치권력과의 관계나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분석한다. 또 저자는 한 사회의 문화적 가치, 집단적 특성 등 사회문화적 맥락도 살핀다.

이러한 '기억의 정치학'에 관한 연구는 국내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을 다양한 사회 관계망을 통해 추적함으로써 현재의 필요에 의해 과거가 재창조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특히 대량학살과 같은 비극적 체험은 대다수 사회 구성원들의 기억 속에 남아 후대에도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기억이 억압되고 통제되면서 형성되는 과정과 다시 전수되는 과정을 잘 드러낸다. 이 책이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선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주 4·3 사건은 40여 년간 공개 토론이 금지되어 왔으므로 진상 규명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였다. 따라서 기존 연구들이 여기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저자는 이와 달리 지금까지 다루어지지 않았던 체험자들의 사회적 기억을 중심으로 그들이 어떻게 4·3 사건을 바라보며, 어떤 기억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있다.

즉 생존자의 기억을 통하여 4·3 사건의 진상을 재조명하거나, 4·3 사건을 재해석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는 4·3 사건을 이해해 보려는 것이다. 또 이러한 기억들이 4·3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수되고 받아들여지는지 분석하여, 우리 사회에서 역사적 사실에 관한 기억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해지고 영향력을 미치는지 짐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불어 국가 권력에 의해 억압되었던 기억들이 영상 다큐멘터리로 만들어지는 과정과 영상에 드러나는 남녀의 이미지를 분석함으로써 문화적 재현물이 어떻게 우리의 기억에 개입하는지에 이르기까지 연구의 폭을 넓히고 있다.

왜 민간인을 학살하는가?

특히 최근 민간인 대량학살이 빚어지는 레바논 사태와 관련해 이 책의 제3장 '왜 민간인을 학살하는가'는 더욱더 눈길을 끈다.

저자에 따르면 제주 4·3 사건의 희생자 수만 해도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인 3만여 명 정도로 추정될 뿐만 아니라 희생자의 다수가 비무장 민간이었다. 생존자들은 갓난아기나 노약자까지 포함한 무차별 학살 또는 집단학살을 말하면서 가해자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이외에는 그 학살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왜 위험이 전혀 없는 비무장 민간인마저 학살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당시 인구의 10%나 되는, 그것도 같은 동포를 이 작은 섬에서 학살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우리'와 '적'을 구별하는 배제 과정을 첫 단계로 본다. 이 단계에서는 비인간화, 권위화, 일상화 과정이 부수적으로 동반된다.

비인간화 작업은 '그들' 집단의 원래 성격과 상관없이 공격 대상으로서의 새로운 이미지가 구축되는 과정이다. 가해자 정권과 수행 집단은 공격 대상을 실제 '그들'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인간 아닌 존재로 비하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공격을 정당화한다.

권위화란 적에 대한 공격을 정당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누구라도 조직 체계 내에서 명령을 받으면 개인이 아니라 조직의 한 대리인으로 느끼게 된다. 따라서 명령에 복종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의 최고 권위자가 내린 명령을 실행하는 것이므로 수행자는 학살 행위가 정당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끊임없는 각종 작전들은 명령에의 복종 심리를 더욱 강화한다.

일상화 과정은 적에 대한 공격을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의 일로 전환하는 것이다. 조직 내의 업무를 반복 수행하는 동안 수행자는 도덕적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주어진 일에 주력하게 된다.

특히 조직적으로 세분화된 업무를 수행할 때 규칙적인 형식에 더욱 얽매일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수행자는 개인적인 책임감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업적이나 성과에 관심을 쏟는다.

재보복의 공포가 부르는 '폭력의 악순환'

여기에 더해 누가 '그들'이며, '우리'와 '그들'을 어떻게 구별하며, 또 '그들'을 어떻게 비하하고 처벌할 것인지 그 방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문화다. 저자는 다른 외국의 대량학살 사건과 제주 4·3 사건을 구별 짓는 문화적 특성을 우리나라 폭력 문화의 한 요소로 죄인에 대한 처벌과 보복 심리를 꼽았다.

'빨갱이'란 용어가 처벌의 정당성을 용인하는 용어로 내면화되기 이전에 제주 4·3 사건 중에 주로 사용되었던 용어는 '죄인'이다. 증언에서 '폭도'나 '빨갱이'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연스럽게 사용되었던 용어가 바로 이 '죄인'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죄의 개념은 무엇이며, 죄인에 대한 처벌을 어떻게 실행되어 왔을까? 권력 관계에서 죄는 거스를 수 없는 존재인 나라에 대한 반역을 의미해 왔다. 따라서 반역 죄인은 용서받기보다 처벌받아야 마땅하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해 왔다. 죄를 규정짓고 처벌을 집행하는 집단이 지배자 집단이므로 죄인이 처벌받아야만 나라의 지배자 집단의 우월성이나 정당성이 입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처벌의 범위는 죄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도 해당되었다. 이러한 연좌제 형태의 처벌은 정당성이 확고하지 못한 신흥 정치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 반대 세력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행해졌다.

또한 적과의 관계에서 보복 심리가 발생하는 것은 어느 전쟁이나 대량학살 사건에서도 유사하나 문화권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있다. 한국사회에서의 보복이란 부정적인 반응보다 정당한 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특히 혈연 중심의 가족 공동체 문화권이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이 외부에 상처를 받았다고 느낄 때 보복하는 것이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보복에 정당성이 부여될 때 '그들'에 대한 행위가 보복으로 다시 되돌아올 것이라는 두려움이 동반되기 마련이다. 이 보복에의 공포가 재보복을 근절하려는 강도 높은 행위를 유발한다. 예를 들면 반역 죄인의 3족까지 멸하는 것은 '국가나 전제권력'의 도전에 대한 보복인 동시에 재보복을 근절하려는 행위다.

그러므로 보복에 긍정적인 가치가 부여되는 문화권에서는 재보복의 공포 때문에 또 다른 폭력 문화를 동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저자의 분석은 이스라엘의 레바논 민간인 학살에도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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