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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길에서 만난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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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길에서 만난 분열

[먼슬리 리뷰] 중국 노동계급의 상황 (1)

올해는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덩샤오핑이 권좌에 올라 개혁개방 정책을 본격화한지 꼭 30년이 되는 해다. 그동안 중국은 사회주의를 국가의 기본 이념으로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 요소들을 적극 받아들이고 국제 시장경제 체제에 편입했고, 그 효과로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 왔다. 이에 따라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본 경제규모에서 중국은 이미 미국, 일본, 독일에 이어 세계 4위에 올랐고, 앞으로 30여 년 뒤에는 미국도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대국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런 고속성장의 이면에서는 도시와 농촌 간, 부자와 빈자 간, 자본가와 노동자 간의 물질적 격차가 확대돼왔고, 이제는 이런 격차가 사회적 불만의 확산으로 이어져 성장의 발목을 잡는 결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이를테면 점→선→면의 발전경로에서 해안 산업도시들을 중심으로 점은 여러 개 찍었으나 그 점들을 서로 연결하는 선을 이리저리 긋고 면으로 경제성장을 확산시켜야 할 단계에 이르러서는, 그동안 중국 지도부가 채택해온 '자본주의의 길'이 만만치 않은 장애물을 만난 것이다.

이에 따라 오늘날의 중국은 1970년대 말 이후 우리가 알고 있었던 중국과는 많이 다르다고 중국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제 중국은 더 이상 저렴한 노동력이 도시 산업지대에 무한정 공급되는 나라도 아니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자본주의 선진국들의 문화를 동경하기만 하는 나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는 중국 지도부도 오랫동안 제쳐놓았던 평등이라는 가치를 다시 강조하고 나서고 있고, 개혁개방 이전에 사회적 통합의 근간이었던 사회주의 이념을 새롭게 복원시키는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중국은 과연 지난 30년 동안 달려온 '자본주의의 길'을 앞으로도 계속 질주해 갈 수 있을까? 아니면 그동안의 고속성장의 후유증을 추스르고 사회양극화에 따른 내적 분열을 봉합하면서 경제와 이념의 구조조정을 거치는 기간을 불가피하게 갖게 될까? 아울러 중국의 정치와 사회는 그동안의 개혁개방에 따라 중국 국민들 사이에 확산된 민주화 요구를 원만하게 수용해갈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푸는 데 도움이 되는 글이 마침 미국의 잡지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최근호에 실려(☞ Conditions of the Working Classes in China), 그 전문을 번역해 4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필자인 로버트 웨일(Robert Weil)은 인권, 노동, 반전, 환경 분야에서 오랜 세월 시민운동을 해 온 미국의 활동가이자 사회학자이며 중국 전문가이기도 하다. <편집자>

이 글은 내가 2004년 여름에 중국 문제를 연구하는 알렉스 데이 등 2명의 학생과 함께 중국의 노동자, 농민, 조직가, 좌파 활동가 등과 가진 일련의 면담에 근거해 씌어진 것이다. 이 글은 오클랜드 연구소의 특별 보고서로 출간될 보다 긴 논문의 일부이기도 하다. 중국에서의 면담은 주로 베이징의 시내와 그 주변 지역, 북동쪽의 지린 성, 중국 중앙부에 있는 허난 성의 도시 정저우와 카이펑 등지에서 이루어졌다.

갈수록 양극화되는 중국 사회

그 과정에서 우리가 듣게 된 것들은 마오쩌둥이 죽은 뒤 30년간 일어난 거대한 변화가 초래한 결과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그 변화로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실행됐던 혁명적 사회주의 정책들이 폐지되고 중국이 '자본주의의 길'로 복귀함에 따라 노동계급의 지위가 점점 더 취약해졌다.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 중 하나였던 이 나라에서 지금은 양극화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최상층에는 부가 축적되고 있지만, 밑바닥에서는 점점 더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하루하루 더 악화되는 삶의 여건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현상을 예증해주듯 <포천>의 2006년도 억만장자(10억 달러 이상의 재산 소유자-옮긴이) 명단에 중국 본토에서 7명, 홍콩에서 1명이 포함됐다. 미국 등 다른 나라의 억만장자들에 비하면 재산규모가 작긴 하지만, 이들은 중국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등장을 대변한다. 당과 국가의 당국 및 기존의 기업 간부들을 새로이 생겨나는 민간 기업인들과 연결시켜주는 부패의 만연이 막 발흥하고 있는 자본가계급을 더욱 더 부유하게 만들어주는 동맹의 거미줄 망을 만들어내고 있다. 반면에 노동계급은 지난 반세기 넘게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착취당하고 있다.

우리가 면담한 노동자들은 중국경제의 기둥이었던 국유기업에서 일하다가 쫓겨난 수천만 명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실직과 동시에 국유기업 직장의 구성요소였던 주거, 교육, 보건, 연금을 비롯한 사회적 보장을 사실상 모두 상실했다. 그들이 다니던 국유기업들은 사적 투자자에게 아예 매각되거나 기존의 관리자 또는 국가나 당의 당국에 의해 부분적으로 민영화됨으로써 이윤추구 기업으로 전환됐고, 그 과정에서 부패가 일상화됐다.

우리가 만난 농민들은 농촌 공동체의 해체가 강요되고 각 가정이 마을과의 계약에 따라 받은 농지를 경작해 생계를 해결하는 방식의 농가단위 책임제가 도입된 것이 초래한 장기적 파급영향에 대응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이런 중국의 농촌정책은 나라가 세계시장에 개방되고, 지방 관리들이 농촌 주민들에게 적절한 보상도 해주지 않으면서 토지를 개발업자들에게 매각하고, 농촌 지역의 환경이 마구 파괴되는 변화와 결합되면서 수억 명의 농민들로부터 그동안 그들이 누려온 집단적인 사회적 지원을 박탈했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계를 유지해나갈 방법을 찾아 나서도록 했다. 이런 농민들 가운데 1억 명 이상이 도시로 대대적으로 이주했고, 도시에 가서는 건설공사장 또는 새로 생겨난 수출품 제조공장에 취직하거나 가장 기본적인 인권조차 무시되는 매우 더럽고 위험한 공장들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이런 이주노동자들(민궁(民工)으로 불리는 농촌 출신의 도시 떠돌이 노동자들을 지칭-옮긴이) 가운데 다수는 도시 지역에 반영구적으로 정착하게 됐고, 그러는 과정에서 나이가 들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삶의 여건이 급속하게 악화됐다.

중국의 노동계급은 삶의 여건이 악화되는 동시에 과거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에 해당하는 수십 년간의 투쟁과 희생으로 획득했던 권리들이 상실되는 상황에 직면해 수동적인 태도만 취하지는 않았다. 계급갈등과 사회적 동요가 지난 수십 년간 볼 수 없었던 정도로 증대됐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노동자, 농민, 이주노동자들이 세계의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큰 규모의 시위에 나서고 있으며, 그 규모가 종종 수만 명에 이르고 격렬한 충돌이 빚어지기도 한다. 정부의 공안부장도 '대중적 사건, 즉 시위와 소요'의 발생건수가 10년 전에는 1만 건이었는데 2003년에 5만8천 건, 2004년에는 7만4천 건으로 증가했다는 통계수치를 발표한 바 있다(<뉴욕타임스> 2005년 8월 24일). 사회적 불안 증대의 위협은 당과 국가의 최고위 지도자들에게 심각한 도전이 되고 있으며, 그들이 더 큰 동요를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이미 정책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전문직과 관리자들로 구성된 이른바 신중산계급과 빠른 속도로 늘어난 대학졸업자들 가운데 다수가 지난 수십 년간 이어진 경제호황의 기간에 번영을 누렸지만, 이제는 이들마저도 분열되고 있다. 마오쩌둥의 시절에는 대학원까지 사실상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던 교육도 점점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받을 수 있게 됐고, 이제는 그 비용이 노동계급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 최근에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사는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도 시장의 압박에 의해 타격을 입고 있다.

계급갈등의 첨예화

경제개발이 가져다주었던 이득, 그 중에서도 특히 소비재와 식품의 공급 확대 및 사회적 신분이동의 기회와 직업상의 기회 증대도 그동안 계급분화가 확산되고 삶의 불안정성이 높아짐에 따라 훼손되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은 쉽게 해소될 수 없는 계급갈등과 정치적 불확실성이 첨예화하는 시기에 접어들고 있다. 노동계급이 나아가는 앞길은 매우 험난할 것이고, 좌파의 부활은 대단히 유의미한 현상이긴 하지만 아직은 아주 초기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이 글은 중국의 이런 복잡한 상황과 앞으로 가능한 변화의 전망을 탐구해보기 위한 것이다. 나는 이 글에서 대개의 경우 특정한 개인이나 조직의 이름은 밝히지 않으려 하는데, 이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지금 도시노동자, 떠돌이 이주노동자, 농민뿐 아니라 다수의 신중산계급까지도 삶의 여건이 서로 비슷해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삶의 여건이 이렇게 수렴되는 현상은 자본주의 시장을 지향하는 개혁과 세계 경제세력들에 대한 나라의 개방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들을 착취하는 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이 폭넓게 통합되는 데 토대가 되어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다른 곳들의 유사한 상황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노동계급의 단합이 실현되기란 이론적으로 생각되는 만큼 쉽지가 않다. 오래된 편견들, 특히 중국 도시인들 중 다수가 농민들을 낮추어보게 하는 편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런 편견은 농촌 지역으로부터 도시로의 대대적인 이주가 불러일으킨 새로운 형태의 경쟁에 의해, 그리고 각각의 집단이 다른 집단들과 맞서도록 하는 분할통치의 입증된 수법을 구사하는 권력자들의 조작에 의해 증폭돼왔다.

한 예로 "베이징의 노동자들은 이주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느끼고 있느냐"는 질문에 한 활동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 특히 해고된 노동자들 사이에 그렇게 느끼는 이들이 많다." 베이징의 노동자들 가운데 다수는 농촌 출신 이주노동자들을 멸시한다. 태풍이 지나간 뒤 거리청소를 하던 도시 노동자들은 "이런 일은 민궁들에게나 시켜야 할 일이야. 그들은 고향에서는 돈 구경도 못했을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주노동자들이 지닌 이런 이미지를 확인해주려는 듯 <뉴욕타임스>(2006년 4월 3일)는 상하이 시의 쓰레기 하치장에서 넝마주이 일을 하는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보도했다. 그들 가운데 한 명은 큰 딸의 중학교 등록금 1만 위안(1250달러)과 작은 딸의 초등학교 교육비 1000위안(125달러)을 벌기 위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베이징의 노동자들이 이주노동자들에 대해 갖는 감정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상호적인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은 그들대로 "이런 일은 해고당한 노동자들에게나 걸맞다"라는 식으로 비슷한 말을 한다.

이주노동자인지 여부 외에 어느 인종과 민족에 속하느냐도 문제가 되는 미국에서는 너무도 익숙한 현상이지만, 이주노동자들이 체불임금을 지급받고 그들에게 합당한 권리를 인정받도록 도와주려는 정부의 시도가 다른 노동자들의 눈에 특혜적 지원으로 보이기도 한다. 대중매체는 "도시 무산계급은 외자계 기업에만 취직하려 한다"거나 "이주노동자들은 아주 적은 임금만 받고도 얼마든지 일하려고 함으로써 해고된 노동자들도 자기들처럼 행동하도록 압박해 그들을 화나게 한다"거나 하는 기사를 내보내는 것을 통해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을 자극하고 촉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조작을 부추기는 근본 원인은 도시와 농촌 간 소득격차의 확대다. 중국의 도농 간 소득격차는 현재 3.3 대 1로 "세계에서 도농 간 소득격차가 가장 큰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미국보다도 격차가 더 크다"고 <뉴욕타임스>( 2006년 4월 12일)는 보도했다.

"내가 지금 자네를 물어뜯지 않으면…"

2001년에 큰 충돌이 일어난 정저우 지역의 송전장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겪은 일은 바로 이런 노동자들 사이의 분열이 어느 정도로 심한지를 잘 보여준다. 이 공장을 운영하던 기업이 매각되고 해체되는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시위를 벌이는 노동자들을 밤에 체포해갔을 뿐 아니라 도둑처럼 공장에 들어와 기계장비들을 뜯어내어 갖고 가기도 했다. 게다가 경찰은 기계장비를 운반하기 위해 일당 50위안에 농민들을 고용해 투입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어난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됐다. 공장의 기계장비를 뜯어서 들어내는 일에도 농민들이 고용됐다. 이렇게 농민들이 투입된 것은 부분적으로는 시 당국에서 구린 일을 하는 데 경찰을 동원하면 대중이 공공연히 반발하기 때문에 그런 상황을 피하기 위한 목적도 있는 조치였다. 고용된 농민들은 철모를 쓰고 기계장비를 들어내는 일을 했고, 지급받은 무기로 노동자들을 두들겨 패기도 했다. 농민 용역깡패 500여 명이 30대의 트럭에 나뉘어 타고 공장에 투입됐다. 이는 정저우 시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의 한 사례에 불과했다.

공장 안에 있던 노동자들이 누군가가 울린 벨 소리를 듣고 모두 쏟아져 나왔고, 농민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4시간이나 싸움이 계속됐다고 한 활동가가 말해주었다. 2001년 7월 24일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날 싸움에서는 노동자들이 이겼다. 다른 여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이 공장 노동자들을 돕기 위해 달려온 덕분이었다. 이렇게 집결한 노동자들의 수는 모두 4만 명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8명의 노동자가 체포되고 재물손괴 혐의로 기소됐지만 다행히 법률의 도움을 받게 되어 이번에도 자본가들이 졌다. 한 노동자가 우리에게 개혁 이전의 시대에 노동자들이 보장받았던 권리들을 설명해주면서 말한 "우리의 법, 마오의 법"이 적용됐던 것이다. 이 노동자는 "너무나 많은 노동자들이 모였기 때문에 정부가 두려웠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인민의 행동이 보여준 규모가 당국으로 하여금 잠시 머뭇거리게 했지만, 자본가들의 압력에 따라 당국은 다시 노동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법원을 우회하기 위해서인 듯 일반경찰이 아닌 공안경찰이 나서서 노동자들을 체포해 갔다. 그러는 동안에도 노동자들과 농민들 사이의 싸움이 열흘 간 계속됐다. 당국은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몰아내는 데 농민들을 동원했고, 공장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을 곧바로 팔아치웠으며, 5600명의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그런 다음 당국은 노동자들의 집을 포함해 모든 건물을 파괴했고, 공장 터는 사적인 토지개발업자에게 넘겨주어 그곳에 상점과 고급주택을 짓도록 했다. 이제 일자리도 집도 없어진 탓에 노동자들 모두 싸움을 계속하기를 두려워했다. 때때로 경찰이 경찰복을 벗고 스스로 폭력배가 되어 소유자계급, 즉 자본가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고, 그 과정에서 칼을 휘두르기도 했다. 한 도기공장에서는 한 무리의 폭력배가 노동자들의 지도자 한 명을 때려 죽였다. 당국은 그들의 행동을 수수방관했고, 그 뒤에 이어진 항의도 묵살했다.

이런 식으로 경찰은 물론 그 밖의 다른 정부기관들도 국유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직접 공격하거나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여러 부분들로 하여금 서로 적대하도록 만들기도 했다. 단합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험들로 인해 기존의 편견과 분열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전기장비 회사에서 일한다는 한 노동자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와 농민은 한 가족이 돼야 한다. 우리는 저들과는 싸워야 하지만, 우리끼리는 같이 일해야 한다." 노동자, 농민과 반대편에 서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단기적인 이익에 따라 행동한다. 공장 현장에 투입된 경찰의 책임자는 자기가 한 행동을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도록 압력을 받아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한 노동자가 그에게 "당신은 개와 같다"고 말하자 그는 "그렇다. 하지만 내가 자네를 지금 물어뜯지 않으면 저들이 내 가죽을 벗길 것"이라고 대답했다.

국유기업의 공장들이 사유화된 개발단지로 변하는 추세가 이런 분열을 갈수록 증폭시키고 있다. 사유화된 개발단지에 새로운 공장이 들어서기도 하지만 그런 공장은 대부분 필요한 인력을 농촌에서 구하고 있고, 그렇게 고용한 노동자들에게 주거시설이나 기타 편익을 전혀 제공하지 않고 있으며, 임금도 매우 낮은 수준으로만 지급하고 있다. 게다가 한 노동자가 말했듯이 미국에서와 달리 중국에서는 국유기업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은 서비스 직종의 일자리도 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일자리에는 더 적은 임금만 줘도 되고 통제하기도 쉬운 농민들이 고용되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으로 인해 노동계급의 여러 부분들이 서로 같이 일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어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서로에 대해 분노하고 적대할 수밖에 없다.

이같은 분열과 갈등에도 불구하고, 여러 부류의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 보다 폭넓고 더 높은 수준의 단합을 도모하고, 더 나아가 농촌에 남아있는 농민이든 도시로 이주한 농민이든 모든 농민과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 보다 긴밀한 연대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확산되고 있다. 정저우 시의 종이 공장, 직물 공장, 송전장비 공장 주위에서 일어난 시위들과 1997년에 이 도시에서 1만3천 명의 택시운전사들이 벌인 파업은 많은 기업과 부문들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역사회 주민들과 더불어 사유화, 직장에서 누리던 편익의 상실과 실직, 세금과 공과금의 인상에 반대하거나 항의하는 대열에 가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국 전역에 걸쳐 이보다 더 보편적인 양상은 각각의 개별 공장 단위에서 노동자들이 고용주인 관리자들이나 그들과 결탁한 정부관리들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대치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철길에 드러눕고, 고속도로의 차량통행을 막고, 관청을 에워싸거나 점거하고, 시민들을 위해 일상적으로 해야 하는 업무를 중단하는 등의 행동에 나서고 있고, 그 결말은 흔히 노동자들에게 소액의 돈이 더 지급되는 것으로 이어지곤 한다. 이렇게 지급되는 돈은 노동자들이 생계유지를 계속해 나가는 데 충분한 정도는 결코 아니지만, 노동자들이 절박한 생활고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들을 구할 수 있게 해주는 정도는 된다.

상대적으로 고립된 형태인 이런 투쟁은 사유화, 실업, 그리고 그동안 누렸던 사회적 서비스와 생활보장의 상실을 비롯한 전반적인 여건 악화를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따라서 이런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정저우 안에 있는 여러 기업들의 노동자가 서로 연대하기 시작했다. 국유기업들 대부분이 문을 닫으면서 10만 명의 실업자가 생긴 카이펑에서도 노동자들이 성공적인 투쟁을 위해 더욱 폭넓은 연대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카이펑에서 이미 실직한 다수와 아직 해고되지 않은 소수를 포함해 여러 공장의 노동자들이 기업별 대표자 모임을 갖고 공동으로 시위를 조직하는 등 실제로 단합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우리와 대화를 나눈 카이펑의 활동가들은 올해 후반기에 시 전역의 모든 공장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일 준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시 행동에 나서는 중국 노동자들

그러나 그러한 단합된 행동이 실현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도시 무산계급 내부에는 아직도 경제적 분열과 세대 간 분열, 심지어는 정치적 분열도 아직 많이 남아있다. 이 때문에 도시 무산계급 중 일부는 '개혁정책'과 정부에 대해 좀더 지지하는 입장인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의 관점을 고수하는 이들도 있다. 우리가 가본 정저우 시내의 노동계급 거주지역 한가운데 있는 공원조차도 좌파의 구역과 우파의 구역으로 물리적인 구분이 돼있었다. 이 공원 중 일부 구역은 특히 낮 시간대에 우파인 노동자나 퇴직자들에 의해 장악돼있지만, 그밖의 다른 구역에서는 특히 밤 시간대에 좌파인 노동자나 퇴직자들을 압도적으로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매일 이 공원에 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몇몇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경험했던 바와 같이, 이곳의 토론은 얼마든지 가열될 수 있고, 심지어는 은근히 위협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한다. 이주노동자들이 일종의 중간자적인 역할을 하는 가운데 노동자와 농민이 단합하게 될 것인가를 예상해보는 경우에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다. 노동자와 농민이 서로 단합하고자 하는 뜻은 있지만, 삶의 여건과 정부의 처우에서 노동자와 농민 사이에 격차가 있다는 현실이 그러한 높은 수준의 단합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개혁정책의 영향으로 부의 역전이 부분적으로 일어나기도 했다. 도시에서든 농촌에서든 우리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오늘날 중국에서 일부 농민들은 대다수 도시 노동자들보다 실제로 더 잘 살며, 이는 마오쩌둥이 지도하던 사회주의 시기의 상황과는 극명하게 대조되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여전히 가난하고 생존을 위해 애써야 한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빈곤한 농촌의 가정들이 가장 가난하다. 하지만 그들은 적어도 식량을 재배할 한 뙈기의 땅은 갖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가난한 떠돌이 노동자들도 도시에서 더 살아나가기가 너무 힘들어지면 고향 마을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비숙련 도시 노동자들은, 특히 그 중에서도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진정으로 더 잃을 게 없다. 그들은 고전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처지로 전락해 생산수단에 접근할 길을 모두 차단당하고 외부로부터 그 어떤 종류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채 말 그대로 굶주림에 방치돼있다. 그들 중에 행여 병든 부모라도 있거나 등록금을 내고 학교에 보내야 할 아이라도 있는 경우에는 상황이 아주 절박할 수 있다. 도시 노동자들 중에서는 남들이 갖지 못한 기술을 갖고 있거나 어떤 종류이든 조그만 사업이라도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자기 땅을 갖고 있는 농민들과 어느 정도 비슷한 여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결과 노동자와 농민이라는 두 계급이 실제로 단합된 행동을 하기가 어렵다. 종종 도시와 주변 농촌에서 거의 동시에 항의의 행동과 시위가 일어나곤 한다. 우리가 정저우와 카이펑을 방문했던 짧은 기간에도 이 두 도시의 내부와 외곽에서 그러한 시위가 동시에 벌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 카이펑의 한 공장에서 20명의 노동자들이 체포됐는데, 바로 그날 인접한 농촌 지역의 농민들은 땅이 도로용지로 수용당하는 과정에서 기만을 당했다는 이유로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이런 농민들의 행동에 대해 한 노동자는 "그들이 봉기해서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민들은 항의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관청 건물을 훼손했고, 고속도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은 서로 아무런 연관관계도 갖고 있지 않았고, 노동자와 농민들이 한 자리에서 공동으로 항의시위를 벌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두 계급의 시위에 대한 국가의 대응에도 차이가 있다. 도시 노동자들은 지역 당국에 의해 특별히 강력한 탄압을 당한다.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은 대중의 눈에 더 잘 뜨이는데다가 도시에 있는 권력의 소재지를 뒤흔들 수 있고, 따라서 기업의 사유화와 새로운 자본가계급의 형성을 내용으로 하는 개혁정책의 심장부에 직접적인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한 노동자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은 매우 분노하고 있다면서 "서로 단합해서 '항거'에 나서야 할 필요가 있지만, 중국은 미국과 달라서 자기가 처한 상황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돼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렇지만 자기와 같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기 때문에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서 "그렇기에 투쟁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대규모 행동이 늘어나고 있다. 이런 행동은 때로는 지역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하지만,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투옥되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농촌의 삶의 여건을 개선한다는 것이 현재 중국 정부의 공식 정책이다. 하지만 농민들이 벌이는 시위는 대체로 대중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2005년 12월에 발전소 부지로 수용된 땅에 대한 보상을 충분히 받지 못한 데 대해 항의하고 나섰다가 20여 명의 마을사람들이 사망한 광둥 성 둥저우 지역의 농민시위와 같이 대중의 시선을 끌 만큼 대규모로 일어나지 않는 한 농민들의 시위가 노동자들의 시위보다 오히려 더 잔혹한 탄압을 당할 수도 있다.

이런 분열과 장벽에도 불구하고 도시와 농촌의 노동계급이 서로 연대할 방법을 곧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왜냐하면 농민들의 분노가 점점 더 커지고 있고, 삶의 여건이라는 측면에서 농민들도 도시 노동자들과 비슷해지고 있으며, 이주노동자들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생활형편이 악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급의 전체적인 조직화를 돕고 있는 활동가들이 노동자와 농민을 단합시키기 위한 운동을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운동은 이제 겨우 노동계급의 각 부분 사이의 골을 메우기 시작했을 뿐이며, 앞으로 길고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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