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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생협력회의'가 '쌍쌍파티'로 보이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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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상생협력회의'가 '쌍쌍파티'로 보이는 이유

[상생이 헛구호가 아니려면(4)] 재벌횡포 근절이 먼저다

전기밥솥과 옥탑방
  
  지금처럼 압력밥솥이 보편화되기 전에 전기밥솥이라는 주방용품이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가정이 대부분 냄비나 솥으로 취사를 하던 시절에 전기밥솥의 등장은 '주방의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었지요. 당시 전기밥솥의 명품은 단연 대원 전기밥솥이었습니다. 국내 최초로 개발되고 시판된 전기밥솥이었습니다. 뜸이 들고 밥이 다 되면 취사 스위치가 딸깍 소리와 함께 올라갔지요. 지금도 대부분의 중년들 기억 속에는 온 가족이 둘러앉아 전기밥솥으로 지은 밥에 벌건 김치를 척 걸쳐 된장국과 함께 볼따귀가 터져라 먹던 시절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대·중소기업 상생협회'가 출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할머니가 협회 사무실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여느 가난한 할머니들처럼 누추한 차림에 백발이 성성한 분이셨지요. 하지만 나는 할머니와 대화를 하면서 가슴 뭉클한 옛 기억을 되살리게 됐습니다. 바로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당신이 살아 온 삶을 이야기하시는 할머니가 대원전기밥솥을 만드는 사장님이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는 과거 1970~80년대에 한국경제의 밑불 노릇을 했던 구로공단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하던 기업을 경영했던 분입니다. 그 할머니가 요즘 국내 굴지의 재벌인 현대차그룹의 정몽구 회장을 상대로 끝을 알 수 없는 일인시위를 벌이다가 하루 짬을 내어 협회의 문을 두드리신 것입니다.
  
  전형적인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횡포 때문에 운영하던 기업의 문을 닫고 육체마저 망가진 할머니는 이제 매일 같이 일인시위를 끝내고 나면 당신의 한 몸을 뉘일 자그마한 옥탑방을 향해 계단을 힘겹게 오르십니다. 과거에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밥을 맛있게 지을 수 있는 전기밥솥을 만들어 공급하던 중소기업인이 이제는 저녁마다 허름한 옥탑방에서 업보처럼 당신에게 남겨진 어린 손주와 함께 식은 밥 한 덩이를 물에 말아 삼키시고, 다시 날이 밝으면 저 골리앗과 같은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기 위해 굽은 몸을 눕히고 계십니다.
  
  이 땅에서 중소기업을 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국가기관과 재벌기업들에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던 모 중소기업의 전직 경영자는 지금 피시방을 사무실로 삼고 있습니다. 그는 그동안 무려 네 번이나 대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당하면서도 어렵게 회사를 유지했지만, 세계 최고의 LCD 단지를 조성한다는 재벌기업에 의해 마지막 후려치기를 당하고 나서는 피땀이 배어 있던 회사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재기를 위한 공간인 피시방으로 출퇴근하며 친환경적 소비재를 중심으로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봉건적인 기업환경 속에서 정직하고 투명하게 2, 3차 중소 도급업체를 성공적으로 경영한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과거에 기업을 운영할 때 그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에 평등하고 공정한 룰이 지켜질 것이라는 기대는 물론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시장질서는 지켜질 것이라는 미련은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우수한 기술을 갖고 있었음에도 재벌기업의 불공정거래에 휘둘려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재벌기업이 행정당국과 검찰, 심지어 법원까지 쥐락펴락하는 현실을 뼈저리게 체험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의 손에는 L재벌이 거대 법무법인을 앞세워 무단으로 탈취하려 했던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특허등록증만 초라하게 남아 있습니다.
  
  도둑은 도둑이라고 불러야
  
  위의 사례들은 어쩌면 사회 구성원 각자가 생활하는 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강 건너 불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중소기업 현장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일어나고 부딪치게 되는 문제입니다. 어쩌면 대기업에 의해 자행되는 불공정거래는 우리 사회에 일상화되고 구조화되어 있지만 재벌 중심주의적 경제관에 사로잡힌 언론과 국가권력이 무시하고 방임하는 탓에 사회적 이슈의 주변부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인 <꽃>에는 존재의 의미가 잘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허허로운 들판에 홀로 피어 있는 그 무엇을 우리가 '꽃'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 그것은 새로운 의미를 가진 존재로 거듭난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습니다.
  
  대기업의 횡포를 흔히 불공정거래라고 부르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형법에도 나오는 온갖 악질적인 범죄행위들이나 다름없습니다. 유망한 중소기업에 구매계약을 해주는 대가로 기술정보의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절도행위이고, 해당 중소기업의 기술을 가로채는 것은 날강도 짓입니다. 또한 대기업이 자신의 요구에 따른 설계변경 때문에 발생하는 추가비용을 지급하지 않는 것은 부도덕한 편취 행위이고, 추가발주를 미끼로 던지면서 납품단가의 인하를 요구해 관철한 뒤 추가발주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기죄에 해당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만연된 불법행위인 이면계약 작성, 계약서의 사후 작성, 계약조건 변경 요구 등은 조직폭력배의 더러운 구역관리 행위와 하등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들을 '불공정거래'라는 몰가치적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도둑놈을 도둑놈으로 부르지 못하고 양상군자(梁上君子)라고 표현한다고 도둑질이 정당한 행위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재벌기업들 대부분이 태연스럽게 사기꾼, 강도, 양아치의 짓거리를 서슴지 않으면서도 시장경제 운운하는 것을 경제학의 원조 애덤 스미스가 본다면 미치고 폴짝 뛸 노릇일 겁니다.
  
  '상생협력' 이전에 '재벌기업의 반칙과 범죄 타파'를
  
  지금은 비록 빛 바랜 구호로 전락할 지경에 처했지만, 참여정부 출범 초기의 정책 아젠다를 함축한 말이 바로 "원칙과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대·중소기업상생협회'가 여러 차례 지적해왔듯이 중소기업 관련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관련 법률에 의해 설치된 사단법인인 '대·중소기업협력재단'의 중소기업 문제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참담하기 그지 없는 수준입니다. 게다가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행위를 감시하고 시장질서를 지켜야 할 공정거래위원회와 검찰, 법원은 대기업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솜방망이 처벌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을 통한 국가경쟁력 강화'는 실현되기만 한다면 한국경제의 질을 높이는 첩경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시장과 국가기관을 장악한 채 무소불위의 횡포를 부리고 있는 재벌기업들의 반칙과 불공정 범죄행위를 뿌리뽑는 것이 선결과제입니다. 이를 위한 사회적 담론의 형성과 공감대의 확산이 시급히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정부가 대기업과 손잡고 추진하는 '상생협력' 정책이라는 것은 사실은 재벌기업들과 준(準)대기업인 소수의 1차 협력업체들이 '쌍쌍파티'를 벌이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 쌍쌍파티의 휘황한 조명이 가 닿지 않는 그늘에는 수많은 2, 3차 협력업체들의 눈물과 한숨이 가득차 있습니다.
  
  첫 단추를 잘 꿰지 않고서는 어떠한 정부정책도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장의 룰이 모든 기업에 의해 준수되는 체제가 정착돼야 비로소 본격적인 기술경쟁력 싸움이 가능합니다. 청와대에서 열린다는 '5.24 상생협력 회의'를 앞두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이런 말을 들려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중소기업의 불공정 행위로 인해 망한 대기업은 단 하나도 없는 반면, 대기업의 불공정행위로 인해 망하거나 경쟁력을 훼손당한 중소기업은 부지기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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