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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준비 없는 협상'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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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FTA, '준비 없는 협상'은 안 된다

[기고] 행정부가 뚝딱 일을 처리하게 해선 안돼

올해 신년연설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한미 FTA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대개 어떤 '선언'을 할 때는 그 '선언'의 실현을 위한 준비가 있게 마련이다. 노 대통령은 준비에 대한 언급 없이 선언의 실현이 가져올 효과에 대한 자신의 기대만 밝혔다.

그러나 '준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2005년 6월 로버트 포트먼 미 무역대표부 대표가 한미 FTA 협상의 네 가지 선결조건을 제시했고, 정부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 약값 재평가제도 중단, 배출가스 수입차 적용 유예, 쇠고기 금수조치 해제, 스크린쿼터 완화 등 차례차례 미국의 주장을 수용했다.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협상상대국 미국의 입장을 고려한 '준비'를 한 것이다. 이렇게 '준비'를 마친 정부는 2월에 협상개시에 합의했고, 6월 5일 본격적인 협상을 시작한다.

많은 사람이 우리 정부의 준비 없음을 질타하고 있는데, 그러면 실제로 협상상대국 미국에 '대한'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협상의 실무책임자 중의 한 사람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도무지 서로 이야기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인식차이가 컸다. 그는 도대체 무슨 준비를 더 하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준비되어 있음이란 결국 'IMF 이후 우리는 이미 제도적으로 많이 선진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을 이야기 말미에 가서야 알 수 있었다.

한미 FTA 협상의 결과 미국식 제도와 규율이 우리 사회에 도입될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협상을 강력히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 미국식 제도가 '선진'적 제도이며 우리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로 인해 우리 사회가 겪어야 할 고통은 선진화되기 위해 견뎌야 할 성장통 정도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준비'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다르게 하고 있다.

상식적으로 협상개시 선언을 뒷받침할 준비라면 협상에 따른 사회경제적 변화, 아니 최소한 산업적 변화에 대한 정량적 분석이 일정하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경제에서 미래의 변화에 대한 분석이 반드시 정확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야 누구나 알 수 있지만, 그 분석의 결과에 따른 경우의 수에 대한 대비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선언을 실현할 주체들은 그 준비를 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유무역이라는 구호 아래 미국식 제도를 좀더 광범하게 도입하는 것, 그 제도가 선진적이라 우리 사회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확신하는 관료들의 생각은, 제도의 도입으로 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조금 지원해주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책임져라, 그것이 자유주의의 기본원리다, 어떻게 국가가 일일이 다 해주냐는 것이다. 그러니 '준비'가 별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지사일지도 모른다.

아니 좀더 나아가서, 준비를 해보려고 했는데 그러면 개혁이 안 된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노 대통령은 우리 제도를 미국 수준으로 높이려고 하지만 기존 제도에서 이득을 누리는 완고한 기득권층 - 그것도 재벌, 관료 같은 집단이 아니고 노동자, 교사 같은 사람 - 때문에 개혁이 안 되니 한미 FTA 같은 쇼크요법을 사용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겪은 IMF 외환위기야말로 준비 없는 외적인 충격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야말로 어느날 느닷없이 외환위기가 닥쳐왔다. 갑자기 돈이 사라졌다. 그래서 돈을 빌려와야 했고 빌려온 댓가를 치러야 했다. 잘못이야 누가 했든 우선 살고 보자며 허리띠 졸라매고 구조조정을 했고, 기업에 국민의 혈세로 거둔 100조가 넘는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구조조정된 사람들은 어제까지 멀쩡히 일하던 직장에서 쫓겨나야 했지만 하소연할 데도 없고 그 억울함을 속으로 삭혀야 했다. 실직을 해도 실업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시절, 그러면서도 국민들은 금을 모았다. 조금이라도 나라빚을 줄여 한시바삐 국가파산 상태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서. 그럼에도 그 결과는 실업과 가계부채로 인한 고통, 비정규직의 양산, 심화된 양극화였다.

날벼락이 따로 있을 수 있나? 한미 FTA 협상의 결과가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이런 날벼락이 어떤 산업분야에서 어떻게 떨어질지 우리 같은 민초들이 알 수 없지 않은가?

지금으로서는 협상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미국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우리는 정부의 협상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더구나 '준비'는 없어도 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협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최소한 협상과정이 투명하게 보고되고 논의될 수 있는 절차가 만들어져야 한다. 통상교섭본부를 중심으로 한 행정부가 단독으로 뚝딱 일을 처리하게 하면 안 된다. 지금 당장 협상을 연기하고서라도 국회에서 통상절차에 관한 법 등 관련법을 제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편으로는 행정부의 일방적 협상추진에 대한 통제와 견제가 가능할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FTA 반대부터 찬성까지 의견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우리 현실에서, 필수적인 사회적 논의를 위한 민주적이고 합법적인 과정과 절차가 마련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통령과 관료들은 그렇게 되면 사회적 논의에 발목이 잡혀서 '개혁'도 안 되고 협상도 안 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협상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피폐해질 것이 분명한 공동체 구성원들의 요구와 이해의 상충을 조정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어찌 정상적인 국가라 하겠는가? 그럴 능력과 의지가 없다면 국가로서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로, 이런 준비 없는 협상은 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http://weekly.changbi.com/)' 5월 16일자에 실린 것으로 창비 측의 양해를 얻어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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