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물이 어떻게 해서 이리 쉴새없이 흐르는지, 아니?" 아이는 쉽게 답을 못합니다. "어제 비가 왔다면 계곡에 훨씬 많은 물이 흐르겠지?" "예."
"몇날 며칠 비가 안 와도 물은 흘러. 평소에 산이 자기 몸 안에 물을 저축해 두거든. 조금씩 늘 물을 흘려보내는 거야." "아~."
"근데 고속철도 터널이 이 밑으로 지나간단 말이야. 터널공사를 하면 산 안의 물이 터질 위험이 아주 높아. 저축한 물을 잃어버리면, 오랫동안 비가 안 와도 물이 흐르겠니?" "안 흘러요."
"지율 스님이 터널을 반대하는 건 그래서야. 근데 너, 내가 지금 하는 이야기가 어렵니?" "안 어려워요." "그렇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지."
아이는 잠깐 생각하는 눈치를 보입니다. "아저씨, 그러니까 이 산 속에 댐 같은 것이 있는 거네요?" 양산 백동초등학교에서 담임교사를 따라 천성산에 놀러온 하선화 어린이, 6학년이라고 합니다. "그렇지. 천연 댐이지. 너 참 똑똑하구나!"
***아주 작은 생명과 공명하는 아이들**
친구 최지원, 백지혜와 담임교사 김정현님, 동료교사 송호선님과 함께 계곡을 걸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천성산 유량 민간조사단 단원인 이헌수님이 이들을 불렀을 테지요. 부산의 '평상필름' 권용협님과 다른 동료 한 분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습니다. 물소리가 아주 세서 5m만 떨어져도 말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지만 말없이 걷기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안적계곡의 제1계측기에 도착했습니다. 남자들만 계측기로 갔습니다. 계곡을 가로지르기에 발 딛을 돌이 위험해 보여 아이들과 송호선님은 너럭바위에 앉아 기다려야 했지요. 사흘 전, 이틀 내내 비가 왔습니다. 그런 날은 계측이 의미가 없습니다. 기록지를 보니 비가 온 이틀 계측은 생략되어 있고, 그 후 기록된 계측량이 일시에 늘어났다가 또 조금씩 줄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대성계곡 두 번째 계측기는 모두가 가까이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이곳 역시 수치가 정상입니다. 어른들은 바위에 걸터앉아 잠시 쉼을 가졌고, 아이들은 이곳저곳을 뒤지고 돌아다닙니다. 최지원이 저를 불러냅니다.
"이게 뭐예요?" "글쎄, 뭘까?"
어느 바위와 바위 사이 흙이 손바닥 만하게 모여 있고, 꼭 콩나물 같이 생긴, 그러나 키가 작고 줄기가 너무 가녀린 것이 서너 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땅을 버티고 일어서 있지만, 실핏줄처럼 연약하게 서 있는 것이 긴 단식을 하고 나온 지율 스님처럼 위태로워 보입니다. 나는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선화가 뭘 주워 와서 또 제게 묻습니다. 콩알만한 크기의 열매입니다. "염소 똥이라니깐." 옆의 아이가 놀리듯 말하고, "이게 어떻게 똥이니. 열매야. 깨뜨려봐라. 씨가 어떻게 생겼나 보자." 하고 제가 말했습니다. "싫어요!" 합니다. "그럼, 집에 가 심어봐. 뭐가 자라나나 보면 알 수 있잖아." 하선화는 바지 주머니에 열매를 넣습니다.
가사계곡의 제3계측기로 갔습니다. 물 소리가 가장 세차게 들립니다. "선화와 지원이는 내가 사진 찍었거든. 너만 못 찍었어. 너 어떤 포즈 취할래?" 하고 외치다시피 했지만, 백지혜는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방금 백지혜가 작은 바위벼랑 중간에 핀 꽃을 보고 손으로 가리키는 동작을 했는데, 그걸 찍지 못해 다시 그 동작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네 발 밑에 꽃 있다! 보라색이다!" 크게 외치니까 백지혜는 방금 전의 동작으로 자기도 모르게 돌아갑니다. 찰칵, 했습니다.
아이들은 산에서도 아이다운 특성이 있습니다. 한없이 큰 산 속에 온갖 생명들과 물상들이 있지만, 아주 작은 것들을 발견해 냅니다. '콩나물'도 그렇고, 열매도 그렇고, 숨은 듯한 꽃 한 포기도 그랬습니다. 계측지와 계곡 곳곳에서 도롱뇽 알을 잘도 찾아냈고, 근데 왠지 제3계측기 주위에는 알이 없는 듯 보이는데, 최지원은 도롱뇽 알을 찾아내 손으로 집어 올려 보입니다.
가사계곡에서 내려와 산 중턱의 평지에 잠깐 모였습니다. 이헌수 씨가 카메라 앞에 서서 인터뷰를 합니다. 아이들과 저는 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아까 선생님한테 배웠지? 너희들 공부 잘했나 확인해보자. 도롱뇽 알과 개구리 알은 어떻게 구별해?" "도롱뇽 알은 길쭉하고, 안에 이상한 액체가 있고요, 개구리 알은 동글동글하게 뭉쳐 있어요. 만져보면 도롱뇽 알은 뭘로 싼 듯한 느낌이 있고, 개구리 알은 말랑말랑해요." "근데 도롱뇽 알, 안 징그러워?" "징그러워요. 안에서 자기 혼자 움직여요." "왜 도롱뇽 알이 징그럽게 생겼을까?" "누가 잡아먹는 거 피하기 위해서?" "아니지. 너희 같은 말괄량이들이 손 대지 말라고." "에이~." "소중한 아기집인데, 너희가 손 대고 이리저리 옮기면 안 되잖니." "그건 그래요." "근데 도롱뇽 알을 좋아하고 먹어버리는 동물도 있겠지? 걔들은 알이 안 징그럽겠지? 밥이잖아. 반가워 할 거 아냐." "지원이가 징그러워했지, 난 안 징그러웠는데요?" 우리는 계속 어쩌고저쩌고 했습니다. 아이들은 산에 와서 내내 발랄합니다.
***유량 변화 포착 못 하는 유량 계측기**
우리는 안적암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안적계곡 제1계측기를 지나 5분 정도 올라갔을 때입니다. 요상한 물체를 발견했습니다. 계곡 위 풀섶에 라면박스만한 금속상자가 하나 있고, 아무리 살펴봐도 상자에 문자 표시가 없습니다. 상자에서 호스가 나와 계곡으로 내려가 있고, 호스의 끝에 쇠로 된 막대기가 달려 있습니다. 같은 간격으로 작은 구멍이 송송송 뚫려 있는 막대기입니다. 막대기는 물 속에 꽂혀 있습니다. 이게 서재호님이 말한, 공단 측에서 설치한 계측기입니다.
서재호님의 말이 맞았습니다. 쇠로 된 막대기가 바위 벽에 고정돼 있는데, 계단의 층계참처럼, 계곡물이 한번 머무는 곳 중간쯤, 유속이 거의 없는 구석 자리입니다. 물이 머물렀다가 아래로 쏟아지는 끝의 물목도, 'V'가 아니고 물의 수위와 거의 같은 'ㅡ'모양입니다. 지금 이 순간 물이 끊긴다 해도, 이곳 웅덩이는 물이 정체되고, 막대기가 계측하는 수위는 (가뭄으로 완전히 마르기 전까지) 어느 정도 유지가 될 것입니다. 계곡 물의 극적인 변화에도 별다른 수치를 내놓지 않을, '유량' 계측기가 아닌 단순한 '수위' 계측기를 왜 설치해 놓았을까요. 지금 천성산 계곡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보다 유량 변화입니다.
왜 지표수의 유량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의문을 품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지하수 층을 직접 조사할 때는 '수위'에 관심을 가지는 게 의미가 있습니다(지표수에 비해 유속이 아주 느리고 외부 강수량의 영향이 바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흐르지 않는 지표수의 수위를 측정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흐리지 않는 물의 양은 강수량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변화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하수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는 흐르는 물의 양 즉 유량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흐르지 않는 물의 양 100㎜는 흐르는 물의 양 100㎜와 수치상으로는 같지만, 생태적으로 건강한 산이 24시간 계곡으로 흘려보내는 물의 변화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주지 않습니다. 특히 천성산의 경우는 파쇄대가 발달해 내부 균열이 많아서 계곡수와 지하수가 긴밀하게 연결돼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때문에 계곡수의 유량의 장기적인 변화를 관찰하면 지하수의 변화상에 대한 시사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지표수의 수량이 아닌 유량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입니다. (이번 주에는 이런 내용을 훨씬 자세히 아는 전문가를 찾아가 얘기도 들어볼 생각입니다.)
***"산을 500번 다녀도 아직 모르는 게 많습니다"**
안적암에 도착하였습니다. 아이들이 선방에 있는 지율스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방에 잠깐 들렀습니다. 스님이 말하십니다.
"애기들, 힘들지 않았어요? 어땠어요? 지금 꽃들은 많이 졌죠? 한두 달에 한번이나, 최소한 사계, 봄 여름 가을 겨울, 시간을 두고 와서 한곳을 꾸준히 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거예요. 제가 이 일을 하면서 천성산 일대를 500번 정도 다녔어요. 처음에는 갈피를 못 잡다가, 고속철도가 지나가면 2만5000볼트에서 나오는 전자파와 진동으로 짐승이나 벌레들이 겨울잠을 못 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환경부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거의 모든 생명들이 겨울잠을 자요. 개구리, 두더지, 도롱뇽, 뱀, 너구리 외 작은 벌레들도 겨울잠을 자거든요. 그런데 진동은, 공기 진동보다 땅속 진동이 더 심해요. 터널 반경 700m, 단면으로 지름 총 1.4㎞ 가량, 14㎞ 터널을 따라 그만큼 생태계가 훼손되는 거예요. 지금은 지하수다, 단층이다, 늪이다, 말들 하지만, 제가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어요.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애기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경청을 하고 있습니다. 스님의 말은 계속됩니다.
"늪과 계곡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참 중요해요. 산 정상부의 늪이 있으면, 늪을 중심으로 곤충들이 굉장히 많고, 삵이라든지 작은 짐승들이 물을 먹으러 내려오거든요. 늪 주위는 생태계가 잘 발달되어 있어요. 사람의 문화도 강을 따라 발달해 있죠. 산의 생명들도 늪이나 계곡을 따라 많이 모여 살아요. 천성산은 늪이 28개 정도가 있어요. 산에 샘이 있으면 사람들도 올라가서 물을 먹잖아요? 물이 끊이지 않고 흐르기만 하면, 100명이든 1000명이든 다 먹고 내려오거든요. 천성산의 아주 작은 늪은 이 방 크기만 하지만, 주위 1㎞의 많은 생명들을 기르고 있는 거거든요. 수천, 수만 년 그렇게 먹여 살려 온 거예요. 그런데 늪이 파괴되고 작은 생명들이 없어지면 어찌 되겠어요. 주위의 꽃들도 피지를 못해요. 벌레들과 같이 없어져요. 솔잎혹파리 공중방제를 하면, 3년 동안 꽃이 3분의 1밖에 피지 못하기도 해요. 지리산 한번 종주했다고 지리산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고, 시골사람 서울 갔다 와도 그렇다고 하지만, 근데 저는 산을 500번 다녀도 산을 모른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예요. 더 알기 위해 더 다니게 돼요.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항상 모르는 것, 새로운 것을 만나고, 새로운 새, 새로운 꽃, 아직 못 본 게 너무 많아요. 사람이 살면서 여러 곳을 많이 다니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는 한곳에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속 관찰하는 게 공부에 도움이 많이 돼요."
깊은 밤, 천성산 계곡과 늪 곳곳에서 물에 입을 대는 작은 산짐승들이 눈에 선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지율 스님의 말은, '애기들, 다음에 또 와요'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은 더없이 유려하게 하지만, 이제 몸무게도 제법 나가는데 근육이 붙지 않아 발꿈치가 헛돌고 수시로 벽을 짚고 걸음을 떼야 하니, 스님의 몸 상태가 큰일은 큰일입니다. 한의사가 온전한 회복에 3년은 각오하시라고 했다는데, 3개월여 만에 이 정도의 회복은 경탄할 일인지 모릅니다. 의사들은 뇌손상이 없었던 것만 해도 기적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지요. 그럼에도 끙끙거리는 스님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 * *
천성산 지하수를 7년 넘게 식수와 생활수로 사용해 온 양산 웅상읍 대동아파트의 물탱크가 고갈된 것은 지난 겨울의 일입니다. 공단은 갈수기 운운했지만, 그 후 비가 꽤 왔는데 여전히 물탱크는 바닥을 드러내고 있답니다. 대동아파트는 터널의 입출구에서 가깝습니다. 양산시와 공단, 그리고 주민대책위에서 지금도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 회 '천성산 유량조사단 통신'은 그곳 주민들의 이야기를 전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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