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지난 24일 삼성 영빈관인 승지원에서 제임스 호튼 미국 코닝사 회장 일행과 만나는 등 오랜만에 활동을 재개했다. 지난해 9월 안기부 X파일과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배정 등으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쫓기듯 미국으로 건너간 지 거의 반년만이다.
이건희 회장은 연초에 "삼성그룹이 비대하고 느슨해졌다"며 삼성에 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듯한 태도를 보여주는가 싶더니 엉뚱하게도 "아무런 조건도 없다"면서 8000억 원을 사회에 기부했다. 이제 삼성도 적극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겠다는 것인가?
이런 삼성의 행보를 보면서 2003년 이건희 회장이 스웨덴 최대의 기업인 인베스터를 방문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인베스터의 오너 일가인 발렌베리家가 '가족소유 경영'과 '사회책임 경영'을 잘 조화시킨 경영사례로 전세계적인 칭송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이 어떤 목적에서든 8000억 원이라는 거금을 내놓고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국민들은 '삼성이 이제 발렌베리와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려는 것인가'라는 희망을 잠시나마 가져보았을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오랫동안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탐구해 온 경제주간지 〈이코노미21〉의 장승규 기자가 발렌베리家의 역사와 발렌베리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 및 경영원칙을 소개하고, 이로부터 삼성 개혁의 단초를 이끌어내기 위한 책 〈존경받는 기업 발렌바리家의 신화〉(새로운 제안 펴냄)을 펴내 눈길을 끈다.
장승규 기자는 이 책 서문에서 "서구 근대문명의 가장 뛰어난 발명품이자 우리에게는 가장 혹독한 시련을 안겨준 '기업' 제도, 특히 주식회사 제도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이 비로소 시작돼야 한다"며 발렌베리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삼성과 한국경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평등국가 스웨덴의 아이러니 '발렌베리 왕국'**
대표적인 평등국가로 꼽히는 스웨덴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발렌베리家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발렌베리가 보유한 14개 핵심 계열사들이 스웨덴 스톡홀름 증권거래소 시가 총액의 절반 이상,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고 있다. 이 기업들 가운데 통신장비업체 에릭슨, 발전설비업체 ABB, 가전업체 일렉트로룩스, 제지업체 스토라엔소, 베어링업체 SKF 등 무려 5개 기업이 각각 해당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뿐 아니라 정치·사회 부문에서도 발렌베리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발렌베리家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 외무장관을 배출한 바 있고, 스웨덴 정부가 강대국들과 무역협상을 벌일 때 배후지원을 해 왔다. 또 스웨덴의 왕가, 집권당인 사회민주당, 주요 노조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스웨덴 최대 기업집단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해 왔다.
이렇게 발렌베리라는 하나의 가문에 스웨덴의 정치·사회·경제적 영향력이 집중되는 과정에서 생긴 어두운 그늘도 많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발렌베리가 히틀러에 협력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던 '보쉬 스캔들'은 전세계적인 비난을 일으켰고, 좌파의 물결이 전 유럽을 휩쓸던 1960년대 말에는 발렌베리가 군 고위층에 뇌물을 제공했던 사실이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발렌베리의 3대 계승자인 야콥과 마쿠스 형제가 경영권 다툼을 벌였고, 1971년에는 가문의 4대 후계자인 마르크 발렌베리가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하기도 했다.
***발렌베리는 어떻게 '이익창출'과 '사회기여'의 조화를 이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베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가족경영의 대표적인 성공사례'로 전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는 발렌베리 기업집단이 투명한 소유지배구조, 전문경영인 제도, 노사협력 등을 바탕으로 많은 수익을 창출하고, 그 수익을 발렌베리재단이라는 공익재단에 맡기기 때문이다. 발렌베리재단은 수익의 대부분을 스웨덴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자금으로 헌납함으로써 발렌베리 기업집단의 경영성과가 자연스럽게 스웨덴 사회 전체로 환원되는 '선순환'을 창출해내는 고리 역할을 해 왔다.
실제로 발렌베리 기업들은 모두 발렌베리家가 아닌 발렌베리재단이 소유하고 있다. 발렌베리의 산업지주회사인 인베스터의 피터 발렌베리 명예회장과 야콥 발렌베리 회장의 자산은 각각 227억5320만 원, 62억8460만 원에 불과하다. 발렌베리의 금융지주회사인 SEB의 마쿠스 발렌베리 회장의 자산도 104억1180만 원밖에 되지 않는다.
이는 1조 원대를 넘나드는 우리나라 재벌 오너들의 자산 규모와 비교된다. 또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기업인 가구업체 이케아(IKEA)의 캄프라드家나 음료용기인 테트라 팩을 생산하는 테트라 라발(Tetra Laval)의 라우싱家가 자국의 높은 세금을 피해 해외로 달아난 것과도 대비된다.
발렌베리는 '기업이 기업활동의 목표인 수익창출에 충실하면서도 사회 및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근대의 발명품인 기업이 어떻게 더 개량될 수 있는지를 시사해준다.
***비슷한 것 같지만 너무나 다른 삼성과 발렌베리**
〈존경받는 기업 발렌베리家의 신화〉의 저자 장승규는 이런 점에서 발렌베리가 '재벌의 꿈' 또는 '삼성의 미래'라고 불린다고 말하고 있다. 장승규는 발렌베리와 삼성을 다양한 각도에서 비교한다.
발렌베리가 삼성과 가장 다른 점은 바로 기업의 소유지배구조다. 발렌베리의 14개 계열사들 가운데 에릭슨 등 11개의 기업이 지주회사인 인베스터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이 인베스트의 대주주가 바로 지분 21.4%(의결권 46.1%)를 보유한 발렌베리재단이다. 소토라엔소 등 나머지 3개 기업은 발렌베리재단이 직접 지배하고 있다. 인베스터를 포함해 발렌베리의 모든 기업들은 주식시장에 상장된 공개기업이며 각각 독립적인 이사회를 운영하고 있다.
즉 발렌베리 기업집단은 하나의 지주회사가 자회사들로부터 수익을 거둬들인 후 그 수익을 대주주인 공익재단에 넘겨주는 '피라미드식' 소유지배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삼성그룹이 사실상 삼성의 지주회사라고 할 수 있는 삼성에버랜드를 중심으로 삼섬생명, 삼성전자, 삼성카드의 지분이 돌고 도는 '순환출자식' 소유지배구조를 가진 것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게다가 지주회사인 인베스터의 야콥 발렌베리 회장은 자회사의 독립경영을 철저히 보장해주는 대신 자회사의 이사로 활약하며 경영 전반에 대해 적극적인 조언하고 감시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59개 계열사의 모든 경영 사안에 일일이 간섭하는 '황제경영'을 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른 모습이다.
***삼성 개혁의 3가지 가능성…"삼성전자를 국민기업으로"**
장승규는 발렌베리의 모습에서 삼성을 개혁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성을 찾아낸다. 첫째는 삼성그룹이 현재의 복잡한 순환출자식 소유지배구조를 버리고 산업지주회사나 금융지주회사로 거듭나는 것이고, 둘째는 삼성이건희장학재단으로 하여금 이 지주회사의 대주주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삼성전자를 국민의 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삼성을 지주회사로 전환하자는 구상은 장승규 기자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제안해 온 삼성 개혁 방안이지만, 이를 실현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삼성이 현재의 복잡한 지분구조를 정리하려면 몇 조 원대의 엄청난 자금을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삼성의 소유지배구조를 '발렌베리재단-인베스터-계열사들'과 같은 피라미드식 구조로 바꾸는 데 2002년 설립된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이 활용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즉 삼성이건희장학재단으로 하여금 '삼성 지주회사'의 대주주 역할을 하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가 지적했듯이 삼성이 8000억 원의 사회 헌납금 가운데 삼성이건희장학재단의 출연금을 포함시킴으로써 이 재단은 사실상 삼성의 손을 떠났다.
저자의 마지막 제안은 국내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23%, GDP의 17%를 차지할 만큼 국내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삼성그룹, 특히 삼성전자를 아예 국민의 기업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는 국민이 주주인 국민연금이 삼성전자의 지분을 매입하면 간단히 달성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삼성은 재벌, 발렌베리는 대기업…재벌과 대기업은 다르다!**
〈존경받는 기업 발렌베리家의 신화〉는 스웨덴의 모범기업 발렌베리에 비춰 삼성의 현재 모습을 보여주면서, 휴대폰과 반도체를 팔아 국민경제에 크게 이바지하는 삼성이 왜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지, 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를 제시하는 일종의 '삼성 개혁'의 입문서 또는 제안서로서 손색이 없다.
다만 재벌과 대기업을 구별하지 않는, 저자 장승규의 안목은 굉장히 아쉽다. 저자는 발렌베리를 '스웨덴의 재벌'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발렌베리는 엄밀한 의미에서 재벌이라고 할 수 없다. 발렌베리 기업집단은 경영자가 많은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각 계열사의 독립경영을 보장하는 '투자자'의 역할만 한다는 점에서 '재벌'이 아니라 '대기업'이다.
반면 삼성그룹은 겨우 2% 내외의 지분밖에 소유하지 않은 이건희 일가가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 전체에 대해 100%의 지배권을 행사하며 사실상 수많은 주주들의 부를 가로채고 있다는 점에서 '재벌'에 해당한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이 재벌의 개혁인가, 아니면 재벌의 해체와 소유지배구조가 투명하고 건강한 대기업의 육성인가? 재벌과 대기업,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삼성' 문제를 바라보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이 책에 대해 아쉬운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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