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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몹쓸 글 짓느라 힘들지 않으신다 하니…"

추사 김정희 유품 2700여점, 일본서 돌아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우선(藕船)에게

언덕배기에 눈이 산처럼 쌓여 안부 전해오는 일도 없는데 어찌 사람이 찾아오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뜻밖에 편지를 받으니 옛날 배공(裵公)이 섣달에 받은 그 편지입니다. 초췌하고 적막한 이곳에서 어찌 화들짝 기쁘지 않겠습니까.

더구나 품격 높은 문장은 대단히 곱씹을 만할 뿐더러 차가운 부엌에 온기가 돌게 합니다. 그리고 자유롭게 지내며 애써 몹쓸 글 짓느라 힘들지 않으신다 하니 얼마나 반가운 일입니까.

저는 추위에 대한 고통이 북청에 있을 때보다도 더합니다. 밤이면 한호충(寒號蟲: 주야로 울어댄다고 하는 새의 이름)이 밤새 울어대다가 아침이 돼서야 날아갑니다. 저무는 해에 온갖 감회가 오장을 온통 휘감고 돌아 지낼 수가 없습니다.

보내주신 물품은 모두 잘 받았습니다. 석노시(石노〈奴 아래 石〉詩)=숙신석노)는 정말 훌륭합니다. 영재(유득공) 노인도 다시 뒤를 돌아보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상쾌한 기분으로 서너 번을 되읽으며 남은 해를 그냥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새해를 맞아 만복을 빕니다.

섣달 27일 노완(老阮)."

이는 최근 일본에서 한국으로 기증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유품 중 하나로, 1852년 추사가 북청 유배지에서 풀려나 과천에 머물던 시절에 제자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보낸 친필 편지다. 당시 사제 간의 정과 추사의 외로운 심정이 진하게 담겨 있어 눈길을 끈다.

이 친필편지를 우리말로 옮긴 추사연구회 김규선 사무국장은 "'석노시'는 추사가 북청에서 발견된 돌화살촉을 고증하며 지은 장편의 시인데 이 시를 보고 이상적이 '숙신석노'(肅愼石노〈奴아래石〉)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 추사에게 보낸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한 내용은 스승과 제자로서 두 사람이 나누는 교감의 깊이를 가늠하게 한다"고 평가했다.

***일본인 수집가 후손이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

이 친필 편지를 포함해 추사 관련 자료 2700여 점이 최근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 자료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추사 연구를 개척한 일본학자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가 평생 수집하고 그의 집안에서 소장해 온 것들이다. 과천은 추사가 제주도와 북청에서의 유배생활을 끝내고 만년에 거처했던 곳이다.

후지즈카의 아들인 후지즈카 아키나오(藤塚明直, 1912~ )가 추사의 사거 150주년을 맞아 이들 자료를 최근 경기도 과천시에 기증했다고 과천시가 2일 밝혔다. 과천시는 이날 오전 시청 청사에서 관계 전문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자회견을 갖고, 이번 기증품의 대략적인 내역과 그 가치 등을 설명했다.

정밀분석이 진행 중인 이들 기증품 중에는 특히 추사의 친필 자료가 다수 포함돼 있고, 추사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되는 간찰(편지)이나 서책류도 다수 들어있다. 추사의 친필 자료로는 위에 소개한 편지 외에 그가 40대 초반이었던 1827~28년에 두 동생 명희와 상희에게 보낸 '두 아우에게'(奇兩第帖)' 등 간찰 13통의 간찰첩도 포함돼 있다.

이 중 제자 이상적에게 보낸 간찰은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 실물이 매우 드물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며, 간찰첩은 40대 초반 추사의 가족사를 연구하는 데 요긴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나아가 이 간찰첩은 이른바 추사체가 확립되기 전 추사 글씨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서예사적으로도 연구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과천시, 고증 및 조사 진행…학문적 가치 높아**

과천시는 이들 자료 외의 다른 추사 친필 실물은 추후 상세한 고증과 조사를 거쳐 그 결과를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 기증품들 중에서는 이 외에도 추사와 청대 학자들 사이에 가교 역할을 수행한 제자 이상적, 추사의 아우로서 청대(청나라) 학계와 교류가 깊었던 동생 산천(山泉) 김명희(金命喜), 그리고 추사가 스승으로 모신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와 영재 유득공(柳得恭) 등이 청대 학자들에게서 받은 글과 그림 등 서화류도 60~70점 확인됐다.

또 청대 학술, 특히 경학에 관한 주요 자료로 평가되는 '황청경해(전 680책)'를 필두로 고서적 2500여 책이 기증품에 포함됐다. 이들 자료는 추사를 비롯한 조선후기 지식인 사회가 어떻게 청대의 학술문화계와 교류했는지를 밝히는 데 활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기증품은 원래 수집가인 후지즈카 치카시가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고미술 거리)과 한국의 인사동 등지를 돌며 구입한 것들로, 그 중에는 원래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서예가이자 추사 연구가인 소전 손재형(孫在馨)이 후지즈카를 설득해 직접 찾아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박스-1〉

***옹방강의 '해동금석영기'**

과천시에 기증된 추사 관련 자료 중에는 매우 이채로운 가치를 지닌 자료가 포함돼 있다. '해동금석영기(海東金石零記)'가 바로 그것이다.

한 권으로 된 '해동금석영기'는 우선 조선 혹은 한반도를 지칭하는 '해동'(海東)이라는 말이 제목에 들어가 있다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선 금석문에 대한 기록을 정리한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추사 연구를 개척한 일본학자 후지즈카 치카시가 중국 베이징의 유명한 고서점 거리인 유리창 혹은 한국에서 입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책은 저자가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다.

옹방강은 자(字)를 정삼(正三)이라 하고 충서(忠敍)라고도 했다. 호(號)는 담계(覃溪)라 하다가 만년에는 소재(蘇齋)라는 다른 호를 쓰기도 했다. 지금의 베이징인 순천(順天) 대흥(大興) 태생인 그는 건륭(乾隆) 17년(1752)에 과거에 합격해 진사(進士)가 된 이후 서적편찬 일을 하든가 교육 전문관료로 활동했다.

옹방강은 그 당시까지 모든 문헌을 망라하다시피 한 지식총서인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는 고증학(考證學)이 일세를 풍미하던 시대였다. 이런 추세에 그는 금석학(金石學)으로 부응했다. 옹방강의 이런 연구성과는 '양한금석기(兩漢金石記)'를 필두로 하는 일련의 전문 연구서적으로 빛을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청대(淸代) 제1의 금석학자로 꼽힌다. 한데 뜻밖에도 그의 친필로 된 '해동금석영기'가 이번 기증본 뭉치에서 발견된 것이다.

옹방강이 직접 붓으로 쓴 원고 뭉치이기 때문에 자연 이 자료는 "세계 유일본일 수 밖에 없다"고 추사연구회 김영복 위원은 지적하고 있다.

이 자료는 중국에서도 끝내 활자화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문집 중 어디에도 이 자료에 대한 언급이 없다고 추사연구회 김규선 위원은 덧붙였다.

따라서 이 '해동금석영기'는 옹방강 저술로 이번에 새롭게 존재가 드러난 자료가 되는 셈이다. '해동금석영기'는 제목이 시사하듯 조선 금석문에 대한 옹방강의 전문 연구 성과물이다.

조선 사람도 아닌 청나라 사람이 왜 조선 금석문에 집착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청대 고증학 열풍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에게는 우문(愚問)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궁금함을 푼다는 자세로 돌진한 학문 풍조가 고증학이었으며, 그 대상목록에서 조선 금석문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청대 학자 유희해(劉喜海)가 편찬한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 전 4권 4책)'은 지금도 한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제1의 참고문헌이 된다는 사실에서도 청대 고증학의 조선 금석문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읽어낼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 땅은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옹방강은 과연 어떤 통로를 통해 조선의 금석문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을까? 같은 관심 분야의 연구에 종사하는 조선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금석문 연구에서는 탁본 입수가 필수적이다. 옹방강이 직접 조선 금석문의 탁본을 제작할 수는 없었던 노릇이었으니, 이와 관련되는 정보를 옹방강은 대체로 조선의 지인들을 통해서 입수하고 연구했으며, 나아가 그런 연구성과를 조선 지식인들과 공유했던 것이다.

다행히 이번 '해동금석영기'에는 옹방강이 조선 금석문을 접촉한 정보통로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 친필 원고본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자세하지는 않으나, 전문가들이 대략 이를 검토한 결과 역시나 추사 김정희가 지대한 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이 원고 한 대목에서 옹방강은 관련 자료를 추사를 통해 입수했으며, 더구나 그 자료에 대해 추사는 이러이러한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는 내용까지 기록하고 있다.

추사 외에도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7) 또한 많은 조선 금석문 정보를 옹방강에게 제공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옹방강과 추사가 활약한 18~19세기 조선과 청나라 지식인 간 학술정보 교류는 어쩌면 지금의 한중 간 학술교류보다 더 활발했을 수 있다. 일본에서 기증된 이번 기증품 목록에서 추사의 친필 뿐만 아니라 여타 자료 또한 왜 주목해야 하는지를 세계 유일본 '해동금석영기'가 웅변하고 있다.

〈박스-2〉

***수집자는 추사 연구에 평생 바친 일본의 동양철학자**

이번에 과천시에 추사 관련 자료를 기증한 후지즈카 아키나오의 부친으로 기증된 자료를 수집한 후지즈카 치카시(藤塚隣, 1879~1948)는 '논어총설' 등과 같은 저서를 남긴 당대 일본의 대표적 동양철학자이며, 특히 청대 경학과 고증학에 정통했다.

후지즈카 치카시는 1926년 경성제대 중국철학 교수로 임명된 이후 서울의 인사동 고서점가를 뒤지며 고증학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면서 자연스레 김정희의 학문세계에 빠져들었다. 추사의 대표작 세한도(歲寒圖, 국보 180호) 역시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에 서예가이자 추사 연구가인 소전 손재형(孫在馨)이 후지즈카를 설득해 찾아온 것이다.

추사가 금석학이나 예술에만 국한하지 않고 청대의 학술, 특히 경학에 정통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한 사람도 바로 후지즈카 치카시다.

1932년 10월 서울 미쓰코시(三越) 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갤러리에서 '완당 김정희 선생 유묵ㆍ유품 전람회'라는 추사 사후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가 열렸는데, 당시 후지즈카는 자신이 수집한 16점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1936년에 나온 그의 도쿄 제국대학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조선조에서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었다. 그는 본래 근대적 방법론을 바탕으로 청나라 경학을 연구하며 학문활동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추사 연구에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추사를 "청조학 연구의 제1인자"로 평가한 후지즈카는 지금까지도 추사 연구의 1인자로 꼽히며, 아직까지 한국의 추사 연구는 후지즈카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많다.

이와 관련해 김영복 추사연구회 연구위원은 "추사를 현대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학자가 후지즈카 치카시"라면서 "그의 추사 연구는 후에 간송 전형필을 거쳐 완당평전의 저자인 유홍준 현 문화재청장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자료를 기증한 아들 후지즈카 아키나오는 "이들 자료가 앞으로 추사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어 한일 간의 학술ㆍ문화 교류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과천문화원 측은 밝혔다. 또한 그는 추사 관련 자료의 기증과 더불어 추사 연구에 써달라며 200만 엔(약 2천만 원)을 쾌척했다고 과천문화원 측은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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