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불사하겠다는 태세다.
재계, 경제연구소들, 일부 언론들도 "미 행정부에 부여된 무역촉진권한(TPA)의 소멸 시점이 2007년 6월로 다가와 협상시한이 1년도 남지 않았다', '꾸물거리다가는 한미 FTA보다 미주자유무역지역(FTAA)이 먼저 출범해 거대한 미국시장을 남미에 빼앗길지도 모른다', '미국과 FTA를 체결하는 순서에서 중국이나 일본에 밀릴지도 모른다'는 등의 경고를 내면서 정부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경고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미 FTA를 서둘러 체결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강조되고 있을 뿐 실제로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되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안들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지, 그런 사안들에 대해 이해당사자들과 일반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식으로 국민여론을 수렴해 사안별 협상을 진행해갈지에 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전국농민회총연맹, 민주노총, 한국노총, 영화인대책위원회 등 10개 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이 공동으로 마련한 '통상협정 체결절차 등에 관한 법률(통상절차법)'이 2일에야 겨우 국회에 발의될 예정이라는 것은 그동안 대외 통상협상과 관련 정책들이 얼마나 정부의 일방적인 주도로 이루어져왔는지를 보여준다. 각각의 통상 사안에 대해 국민여론을 수렴하고 이를 협상과정에 반영하는 데 필요한 법률적 장치가 아예 부재했던 셈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부의 기습적인 스크린쿼터 축소 결정으로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영화산업 종사자들의 처지가 '특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한미 FTA 협상 개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지금, 각 분야별 쟁점을 미리 짚어보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크다.
***미국, 예외 없는 관세철폐 원칙…한국 "쌀만은 빼달라"**
실제로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되면 가격경쟁력을 비롯한 시장경쟁력에서 미국이 비교우위에 있는 것으로 분석되는 농축산업, 서비스업에서는 물론 의약품과 기계를 비롯한 일부 제조업에서 한미 양국 간에 첨예한 갈등을 야기할 사안들이 집중적으로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도 한미 FTA가 체결되면 가장 큰 타격을 입을 것으로 보이는 농업 부문에서는 한미 양국이 농산물 하나하나를 놓고 관세율 인하의 수준과 민감품목 양허 등의 문제에서 불꽃 튀는 대결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농산물 시장의 완전 개방을 요구하는 미국과 협상해 우리의 쌀 시장을 지켜낼 수 있느냐의 문제가 한미 FTA의 성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한미 FTA 협상이 개시되기도 전에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 재개로 한바탕 수난을 당한 축산업계는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그동안 고관세의 보호를 받아온 주요 축산품들의 관세율을 얼마만큼 낮춰야 하는지를 놓고 미국 측의 시장개방 확대 요구에 맞서 한바탕 혈전을 치러야 할 것 같다. 우유 등 낙농제품의 관세율 인하 수준을 놓고도 한미 간에 첨예한 대립이 예상된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현재(2004년) 대미 수입 민감품목으로 지정돼있는 농수산품 및 식품은 쇠고기, 돼지고기, 양파, 조제 감자, 포도주스 등 총 46종이다.
***서비스 시장에 대한 협상도 마찰 예고**
농수산물 시장뿐 아니라 서비스 시장도 한미 FTA 협상의 거센 파고에 취약한 분야다. 교육과 의료 등 공공성 문제로 시장개방 여부에 대한 논란이 계속돼온 분야뿐 아니라 통신, 영화 등 상대적으로 우리가 경쟁력을 갖췄다고 여겨지는 분야에서도 한미 양국 간 갈등을 피해갈 수 없다.
먼저 서비스 분야 중 통신 부문에서는 기간통신사업자의 외국인 지분제한 기준(현행 49%)을 올리거나 없애라는 미국 측의 압력이 이미 거센 상태여서 이 문제가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주무부처인 정보통신부는 현행 기준인 49%도 다른 선진국에 비해서는 높은 수준이라고 지적하는 동시에 통신산업의 안보적 중요성을 감안해서라도 더 이상 물러서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자국의 통신시장 개방 수준이 한국보다 훨씬 높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까다로운 규제 등을 감안한 실질적인 개방 수준에서는 미국이 우리보다 그렇게 높다고 말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편 금융과 보험 분야에서는 우리의 송금제한 규정을 철폐하라는 미국의 주장에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 주목된다.
법률 분야에서는 국내 법률회사의 미국인 변호사의 고용, 국내 법률회사와 미국 법률회사 사이의 동업 및 합작, 미국 법률회사의 국내법인 개설 및 국내 변호사 고용 등이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미 지난해 3월 이해찬 총리 주재로 열린 '서비스 산업 관계장관회의'에서 2007년부터 단계적으로 법률시장을 개방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 구체적인 일정이나 관련 규정들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회계 분야에서는 미국 회계법인의 국내영업 여부가 쟁점이다. 정부는 이미 지난해 12월 열린 '금융허브추진위원회'에서 회계 서비스 시장의 개방을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당장 2007년부터 외국 회계법인의 국내사무소 설치가 가능해질 전망이다.
의료 분야에서는 외국인을 포함한 영리법인의 병원 설립 허용 여부가 그동안에도 한미 간에 논란이 돼왔지만, 이번에도 이 문제가 다시 부각될 전망이다.
교육 분야에서는 미국인이 국내에 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허가해야 하느냐를 놓고 한미 양국은 물론 국내에서도 이해당사자들 사이에 갈등이 증폭될 전망이다. 정부는 이미 일정한 조건 아래 외국 자본이 국내에 학교건물 등을 건설하거나 일정 기간 건물을 임차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제를 풀겠다고 밝힌 바 있다.
***1년 내 미국과의 FTA 체결?…너무 성급하다**
제조업 분야는 업체별로 상황이 다르다. 한미 FTA 체결로 수출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되거나 아예 그 영향이 미미할 것으로 여겨지는 자동차, 전자제품, 신발, 섬유의류 등 일부 제조업 부문의 기업들은 느긋하게 협상 개시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화장품, 의약품, 군수, 화학, 종이, 기계 등의 분야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미국산 제품의 수입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이들 분야에서는 한미 간에 상당한 마찰이 예상된다.
특히 의약품 분야에서는 의약품에 대한 보험급여 지급요건과 외국계 오리지널 제품의 약가 산정 문제가 주목된다. 미국은 미국계 다국적 제약기업들의 오리지널 의약품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지키면서 약가를 높게 유지할 수 있는 방향으로 FTA를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제네릭 의약품(생산된 약품의 특허기간이 끝난 뒤 다른 제약사가 공개된 기술과 원료 등을 이용해 만든, 같은 약효와 품질의 제품)' 생산을 위주로 하는 국내 군소업체들의 반발이 예상된다.
이밖에도 반덤핑 등 미국의 무역 구제조치 수준의 약화, 9.11 테러 후 까다로워진 미국의 통관절차 개선, 국내 자동차 배출가스의 허용기준 문제, 한국 기업인에 대한 비자 특혜의 조기도입 등 다양한 사안들이 뜨거운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들은 이런 각각의 세부 사안들이 국민경제와 국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관한 기본적인 정보조차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 모든 사안별 쟁점에서 한국과 미국 정부가 서로 입장을 비교하고 원만한 협상을 하려면 '양국 국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은 상태에서 정부를 이해하고 동의'해줄 수 있어야 한다. 게다가 국내외 관련 실정에 대한 점검, 한미 양국 정부의 입장 조율, 통상관련 법률의 개정 등의 작업이 협상 타결 전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필요하다.
이런 모든 일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런데도 1년 안에 한미 FTA 체결을 완료하자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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