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년 간 제품 품질 개선과 판매 확대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온 현대자동차그룹이 돌연 '비상경영'을 선언해 그 배경을 놓고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고 있다.
현대차는 26일 '비상경영 체제'로의 전환을 선포하고, 체제 전환의 일환으로 '경영전략추진실'을 신설하는 한편 이전갑 감사실 담당 사장을 부회장으로 승진시켜 경영전략추진실, 기획총괄본부, 감사실을 총괄하도록 했다. 현대차는 경영전략추진실을 중심으로 대내외 경영환경을 분석해 앞으로 예상되는 환경변화에 대응하는 대책을 마련하는 동시에 그룹의 중장기 사업계획과 미래비전 달성을 위한 전략도 수립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 업계에서 '환율 비상경영 상시조직'의 첫 사례**
현대차는 원/달러 환율의 하락, 원자재 가격의 상승, 유가의 상승 등으로 인해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수익구조가 악화된 것이 이번에 조직을 개편하기로 한 직접적인 계기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의 2005년 매출액은 전년 대비 0.3% 감소한 27조3837억 원에 그쳤다. 매출이 전년보다 줄어든 것은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8년 이후 처음이다. 영업이익의 감소폭은 더 두드러진다. 지난해 현대차의 영업이익은 1조3841억 원으로 전년 대비 30%나 감소했다. 현대차는 이런 부진한 영업실적은 원/달러, 원/유로 환율의 하락과 철강재 등 원자재 가격의 상승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지난해 순이익은 처음으로 2조 원 이상을 기록했지만, 이는 현대캐피탈을 비롯한 국내 금융계열사의 흑자전환 등으로 영업외 이익이 크게 늘어나 영업이익의 부진을 상쇄한 덕분이다. 순이익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주력 사업분야의 영업이익은 크게 줄어든 것이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 현대차 쪽의 자체 설명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수출 비중이 76%를 차지하는 현대차로서는 환율, 유가, 원자재 등 세계경제 변화에 민감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비상관리 역량을 갖추고 내실경영을 이끌어갈 효율적인 조직을 필요로 한다"고 이번 조직개편의 배경을 지적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현대차의 해외수출 비중은 66.5%, 해외공장 판매분까지 합치면 75.6%다. 전문가들은 원/달러 환율이 10원 하락할 때 현대차의 매출과 순이익은 각각 2000억 원과 700억 원 가량 줄어든다고 보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앞으로 예상되는 추가적인 원화 환율 절상 등을 고려해 비상경영 체제의 가동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재계 3위인 현대자동차의 이같은 경영전략은 원/달러 환율, 유가, 원자재 가격 등 세계경제의 주요 가격변수들의 변동위험에 대한 대비책을 경영에 체계적으로 반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상시조직을 국내 대기업 중에서 처음으로 꾸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내부의 위기의식도 한몫**
현대자동차그룹의 조직 개편에는 이런 대외경영환경의 변화 외에도 기업 내의 절박한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올해 10조 원이 넘는 자금이 필요한 대규모 투자 사업들을 진행할 계획이다.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은 연초 신년사에서 현대차 체코 공장 및 기아차 미국 공장 착공, 현대차 중국 상용차 공장 건립, 현대차 인도 2공장 착공, 일관제철소 건립, (주)만도 인수 등의 사업계획을 발표하며 "이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투자"라고 밝혔다.
이렇게 현대차가 한꺼번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기로 한 것이 기업 경영에 부담으로 작용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현대차의 공격경영 속도가 지나치게 빠른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직원 단속용', '노조 압박용', '지자제 앞두고 연막작전'**
한편 현대자동차그룹이 비상경영체제 선언을 통해 지난해 경영 여건 호조로 세계 언론으로부터 호평을 받으면서 들뜬 기업 내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이미 지난주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환율 비상경영 체제 강화' 지침을 보내, 매일 원가 절감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가능한 골프장 출입을 자제하고. 매일 오전 8시 업무 시작 전 10분간 비상경영체제 돌입에 따른 정신 교육을 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자린고비 경영'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대차는 지난 2004년에도 계열사별로 '환율급락 단계별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등 비상경영체제에 돌입했던 적이 있다. 지난해에도 정몽구 회장은 틈이 날 때마다 '비상경영'을 강조해 "대기업들이 호황을 누리고 있는데도 비상경영을 선언하며 위기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청와대의 비판을 받아왔다.
경영전략추진실을 맡아 사실상 현대차를 전두지휘하는 역할을 하게 된 이전갑 부회장도 이런 '짠돌이 경영'에 적합한 인물이라는 것이 주위의 평이다. 이 부회장은 현대그룹에서 뼈가 굵은 대표적인 기획통으로 술, 담배는 물론 골프도 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편 일각에서는 노동조합과의 임금 협상을 앞두고 18일에 새로 출범한 현대차 노조 12대 지도부가 "임금협상에서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거듭 강조하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이자 현대차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수를 쓰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즉 현대차가 '회사 사정이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해야 할 만큼 어렵다'고 호소하는 작전으로 노조 지도부에 맞선다는 것이다.
또 5월 지방자체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정치자금과 관련해 현대차가 정계에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우는 소리'를 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한편 22일에는 현대차 사장 출신인 이계안 열린우리당 의원이 서울시 시장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삼성의 구조본 재현…경영권 승계 차원?**
현대차그룹의 경영전략추진실은 대내외적 경영환경을 분석해 대응책을 마련하고 그 진행사항까지 점검하고 미래 비전을 세워 이를 달성하기 위한 중장기적 사업 계획을 수립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삼성의 구조조정본부와 비슷하다.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26개의 계열사가 돌고 도는 순환출자구조인 현대차그룹의 기업지배구조는 삼성의 지배구조와 유사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현대차의 계열사 수가 삼성보다 적다는 것, 총수의 스타일이 정반대라는 점뿐 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이전갑 부회장은 경영전략실은 물론 기능이 강화된 기획총괄본부와 감사실까지 총괄하게 돼 삼성 구조본을 이끌고 있는 이학수 부회장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최근 몇 년 동안 주식 시장이 안정되고 다양한 경영진 감시 장치가 나오면서 LG, SK 등이 잇달아 구조본을 폐지하는 추세인 가운데 현대차가 삼성의 구조본과 같은 위상의 경영전략추진실을 신설한 데는 경영적 측면 말고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가능하다.
즉 삼성이 구조본을 통해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로의 경영권 승계에 박차를 가하고 있듯, 현대차도 기업 안팎을 단속하는 경영추진전략실을 마련해 정몽구 회장의 장남인 정의선 기아자동차 사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을 총괄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정의선 사장은 최근 현대모비스의 최대주주인 기아자동차의 지분을 추가로 사들이는 등 경영권 계승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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