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리 사회는 우리가 무엇을 창조해 왔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파괴를 막았는지를 통해 평가될 것이다." (존 C. 소힐,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
지율 스님이 병원으로 긴급 후송된 뒤에도 치료를 거부하고 있다. 수차례 천성산과 스스로를 동일시해 온 지율 스님은 지금 터널로 만신창이가 될 천성산의 미래를 걸고 세상과 '고독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오는 4월이면 새만금 방조제 물막이 공사가 완료될 새만금 갯벌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삶의 터전이었던 갯벌이 죽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지역 주민들은 하념 없이 눈물을 흘리지만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미 '아마겟돈'이 시작됐다**
이런 시점에 읽는 에드워드 윌슨의 〈생명의 미래〉(전방욱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5)는 의미심장하다. 모든 사회 현상을 진화론적 관점으로 설명하려는 사회생물학(sociobiology)의 창시자로 알려진 윌슨이 2002년에 펴낸 이 책은 '생명의 미래'에 대한 그의 걱정으로 가득하다. 〈월든〉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에게 보내는 편지로 시작하고 있는 이 책은 수세대 앞선 선각자의 '지혜'를 잇지 못한 자괴감으로 가득하다.
"거의 열대림의 반이 이미 벌채되었습니다. 세계의 마지막 미개척지는 실제로 사라졌습니다. 동식물 종들은 사람이 등장하기 전보다 100배 이상이나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으며, 21세기 말에는 반 정도가 사라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세 번째 천년기의 벽두에 아마겟돈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주전쟁이나, 성서에서 예언된 인류의 불지옥이 아닙니다. 이것은 번성하고 있으며 영리하다고 자부하는 인류에 의한 지구의 파멸입니다.
(…) 생물계는 죽어 가고 있고 자연의 경제는 우리의 부지런한 발걸음 밑에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행동의 장기적인 결과를 예측하는 데 있어 너무 자만했습니다. 우리의 망상을 털어 버리고 해법을 찾기 위해 빨리 행동하지 않는다면 엄청난 피해를 입을지도 모릅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를 이 병목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제 과학과 기술은 그 병목을 빠져나올 길도 알려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의 가치'는 최소한 세계 총생산의 2배**
지구의 여섯 번째 '대량 멸종 시대'가 진행되는 현장에는 항상 '경제주의자'들이 있다. 이들은 항상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환경 타령'이냐고 지청구를 놓곤 하지만 정작 타인의 먹고 사는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당장 새만금 간척 사업이 계속되면 갯벌에 생계를 의존해 온 지역 주민들의 삶은 더욱더 팍팍해질 테지만, 이것은 새만금에 세계 최고 높이의 '타워'와 540홀 규모의 골프장과 같은 '장밋빛(?) 공약'에 묻혀 부각되지 않는다.
윌슨은 이런 경제주의자들이 '생명의 가치'에 눈을 돌려볼 것을 권유한다. '돈, 돈, 돈' 하는 경제주의자들을 설득해야 하니 '생명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친절함까지 보인다. 1997년 경제학자들과 환경학자들로 이루어진 국제 연구진은 자연계의 생물 환경에서 인류가 공짜로 사용하는 환경 서비스를 달러로 환산했다. 이들은 환경 서비스가 무려 연간 33조 달러 이상이라고 추정했다. 이 액수는 세계의 모든 나라의 국민 총생산, 즉 18조 정도 되는 세계 총생산의 2배에 가깝다.
물론 이런 환경 서비스를 전적으로 인간이 제조한 대체품으로 바꾸려고 노력한다면 전 세계 총생산은 적어도 33조 달러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불가능하다. 환경 서비스를 대체하려고 시도하면 할수록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원시적이면서 상처를 받기 쉬운 자연은 다 큰 자식들의 제멋대로인 입맛을 더 이상 참아낼 수 없다."
예를 들어 수 세대 동안 인근 산맥에서 내려오는 상당히 깨끗한 물을 사용해 온 뉴욕 시는 유역의 삼림이 파괴되면서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뉴욕 시는 결국 60억 내지 80억 달러의 자본 비용과 매년 3억 달러의 운전비용을 투입해 여과 장치를 세우느냐, 그렇지 않으면 10억 달러를 들여 유역의 삼림을 다시 복원하느냐 하는 선택에 직면하게 됐다. 후자를 선택한 뉴욕 시는 깨끗한 물 이외에도 홍수 조절과 같은 보너스까지 얻게 됐다.
***"논쟁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윌슨은 "경제주의자와 환경주의자가 투쟁과 논쟁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경고한다. 지금은 "이 양 측이 의기투합할 때"라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양자에게 '관리인 정신(stewardship)'을 제안한다. "지구의 자연 환경은 우리 소유가 아니다. 우리의 미래 세대와 지구에 함께 사는 모든 생명의 것이다. 인류는 그것을 잠시 관리하고 있을 뿐 그것을 자기 마음대로 수탈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되고 가능한 한 보전해서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윌슨이 보기에 단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경제주의자는 이런 관리인 정신에 관심조차 없는 형편이고, 장기적 이익을 추구하는 환경주의자는 관리인 정신을 대중의 실생활과 결합하는 데 실패했다. 그는 "현 세대의 만행을 끊임없이 반추할 미래 세대"에게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관리인 정신을 바탕으로 한 양 측의 진지한 반성을 촉구한다. 경제주의자는 앞에서 언급한 환경의 '경제적 가치'를 직시해야 하고, 환경주의자는 진화가 사람들에게 남긴 '생명 사랑(biophilia)'의 흔적을 일깨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윌슨은 이 양 측의 고리로 '통찰력과 도덕적 용기가 결합된 과학과 기술'을 강조한다. 책 전체에 걸쳐서 현대 과학기술의 가져온 '재앙'의 결과를 보여줬던 그는 의외로 현대 과학기술의 성과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어 '유전자 조작 작물이 농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경작지를 위해 열대림을 파괴하는 일을 막을 것'이라는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그의 '완고한 과학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나는 이런 대목은 이 책 전체에 걸쳐 가장 주의를 요하며 읽어야 할 부분이다.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윌슨은 (반세계화 운동 세력과 같은) 저항 세력에 찬사를 바치는 것으로 책을 끝내고 있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서 1970년대부터 좌파들의 집중 공격을 받았던 순진한 생물학자가 일흔이 넘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쉰만 넘으면 '원로'가 되는 한국의 지식인들과 비교하면서….
"이들(저항세력)은 얼굴 없는 권력이 운영하는 회의 탁자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며, 자신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비밀 결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는 자본주의 경제에 예속된 정부 지도자들은 거대 기업의 최고 경영자와 이사회를 옹호하고 있다. 이들은 현대 산업사회의 군주들이다. 이들은 적어도 경제의 영역에서는 구시대의 왕자처럼 명령으로 통치할 수 있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를 포함시켜 달라. 그리고 하는 김에 다른 뭇 생명들도 포함시켜 달라.
(…) 이들이 좌익 일색의 이데올로기를 갖는다고 해도 어쩌랴 싶다. 이들의 젊은 에너지는 보수주의자들의 고질적인 냉소주의를 휘저어 놓고, 역류시켜 그들과 우리 모두의 치유에 도움을 줄 것이다. (…) '낡은 행동은 낡은 세대를 위한 것이고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행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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