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구를 넘어서고자 하는 욕구**
손이 발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손을 놀리고 도구를 사용하는 방법이 급격하게 발달하고, 이에 따라 두뇌도 급격하게 발달했다. 두뇌의 발달은 말=개념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그려 볼 수 있게 하는 인식의 혁명을 가져왔고, 이는 인간이 문명을 발달시킴으로써 자연에 대해 독보적인 존재=만물의 영장이 되게 했다. 인간은 자연에 대해 거의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따라서 자연에 순응하는 존재에서 자연을 자신의 욕구에 맞게 변화시키고 개조하는 존재로 바뀌었다. 이것이 인간과 동물의 중요한 차이이다.
인간으로 진화하기 전에는 자연스러운 욕구에 따라 행동을 했고, 인간으로 진화해서도 문명이 발달하기 전에는 인간도 자연스럽게 생존과 번식의 욕구에 따라 살아갔다. 이러한 과정은 그야말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가공해서 이용을 하는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인간은 자연에서 벗어나 인공의 세계를 건설하게 되고, 이 인공의 세계에서 욕구는 욕심으로 변해 버렸다. 일정한 제약을 갖는 자연적 욕구에서 해방되면서 무한한 욕구로서 욕심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것도 인간과 동물의 중요한 차이이다.
이러한 '능력'과 '욕심'만이 동물과 인간의 차이라면, 인간은 그 '능력'으로 거대한 물질문명을 세워 놓고 드디어는 서로 '욕심'을 부리면서 싸우다가 자멸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 인간은 이런 것만을 특징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 무한히 소유하고 높아지려고 하는 욕심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는 반대로 자가 자신에게서 벗어나 소유하지 않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하려고 하는 이타심도 가지고 있다. 이는 자연이 진화의 과정에서 자기의 자식인 인간에게 준 좋은 선물이다. 지배하려는 자가 있으려면 복종하려는 자가 있어야 되는, 진화의 과정에서 만들어진 생존하기 위해서는 극히 당연한 원리가 바로 인간에게도 적용이 된 것이다. 이기심의 보완물로 이기심과 함께 이타심이 인간의 특징이 된 것이다.
일본 군대가 일본인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조선을 강제로 점령했을 때 우리의 애국지사들은 조국의 광복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싸웠다. 인도의 부자들이 더 많은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이 있을 때 테레사 수녀는 일평생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살았다. 돈을 빼앗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강도도 있는 반면에 일본 도쿄 지하철역에서 자기 몸을 산화시키고 일본인을 살려낸 이수현 씨 같은 사람도 있다. 맹자가 우물가로 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면 누구나 다 구해 줄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하면서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야(仁之端也)라고 했을 때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도 이타심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이타심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포유류로 진화하여 사회를 형성하면서부터 각 종에 따라 형태와 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이타심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욕구로 형성돼 있었다. 가장 기본적인 이타심은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면서 기르는 것이나 자기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영역을 지키는 데 서로 협력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인간은 이를 이어받아 더욱더 고도의 형태로 발전시켰을 뿐이다. 위에서 든 예는 그러한 경우를 말해 주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넘어서려고 하는 또는 초월하려고 하는 욕구도 함께 가지고 있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자신의 욕구를 넘어서려고 하는 욕구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이게 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서양에서는 이것이 영원한 진리 혹은 유일자(唯一者)인 신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났고, 동양에서는 도(道)혹은 깨달음을 얻으려고 수도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신부님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려 가는 생활을 포기하고 하느님과 함께하려고 하는 것이나 스님이 마찬가지로 가정생활을 포기하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나 다 자기 자신이라는 좁은 범위를 넘어 더 넓은 세계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욕구가 형성된 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인간은 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행동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사람들이 많이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생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무조건적으로 반응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통해서 행동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욕구하거나 욕심 부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존재이다. 자기 자신의 욕구와 욕심까지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해 볼 수 있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하잘것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또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하잘것없는 것이나 현상에 지나지 않는 것에서 벗어나 무욕이나 본질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인간은 생각을 통해서 행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욕구를 넘어서는 욕구까지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인간의 문명에 차이가 있었다면,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 궁극적인 것이나 깨침을 추구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각 문명 간에는 본능적 욕구나 사회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에도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여기에서 나게 된다는 것이다. 보통 문명권을 유교, 불교, 이슬람, 힌두, 기독교 하는 식으로 나누어 보는 것은 결국은 궁극적인 것을 추구하는 종교의 차이가 문명의 차이를 가져온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이 방식의 차이에 따라 삶의 방식에도 결정적인 차이가 나기 때문에, 종교 간의 갈등은 인종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또 지금도 일으키고 있다. 한국사회에 이렇게 많은 종교가 큰 싸움 없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외국인의 눈에는 경이로운 일로 보인다고 한다. 결국은 생명, 바로 우리의 몸이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면 사실은 싸울 일도 없을 것이다. 공연히 자기 집을 지어 놓고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고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지구 바깥으로까지 나가서 화성에 기지를 짓느니 마느니 하는 세상이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 이외의 생명은 말할 것도 없이, 그리고 나아가서는 인간이라는 생명까지도 돈을 벌기 위해서 이용해야 할 대상물로 전락시키는 세상이 되어 있다. 자본주의라는 한 생각하는 방식은 인간을 신분제 질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는 해 주고 편리한 생활까지 가져다주었지만, 무한정한 욕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듦음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함께 파괴하고 있다.
어쨌든 이렇게 인간은 생명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본능적(1차적) 욕구에 사회적(2차적) 욕구를 가진 상태(포유류)에서 더욱더 진화해 드디어 욕구까지 넘어서고자 하는 초월적 혹은 종교적(3차적) 욕구까지 가진 존재가 되었다. 한 측면에서 보면 모든 것에서 초월하고자 하는 욕구는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회귀의 욕구일지도 모른다.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스스로 파멸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파멸을 막으려고 진화의 과정에서 스스로에게 해 놓은 장치일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산물이고 자연 자체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욕구라고 할 때 결국 인간의 욕구라는 것은 진화의 과정에서 형성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자연 속에서 사람을 보고, 또 사람 속에서 자연을 볼 수 있게 된다. 개 속에서 사람을 보고 사람 속에서 개를 볼 수 있게 된다. 나 속에서 사회를 보고 사회 속에서 나를 볼 수 있게 된다. 저 사람 속에서 나를 보고 나 속에서 저 사람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냥 똑같이 평등한 존재가 된다.
그냥 살아가기 위해서 욕구도 있는 것이고, 그냥 살아가기 위해서 사회라는 것도 만들어진 것이다.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냥 즐겁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어느 유행가 가사에서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고 했듯이 그냥 그렇게 즐겁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 생명 자체가 환희인 것이다. 자연의 생명이 욕심 부리지 않고 그냥 즐겁게 살다가 가듯이, 사람도 그렇게 그냥 즐겁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다. 다 똑같은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니, '나'가 따로 있다는 아집에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 똑같은 생명끼리 서로 나누고 배려하고 하면서 즐겁게 살다가 가면 되는 것이다.
내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리면 삶 자체가 환희가 되지 못한다. 그 욕심 자체가 인생의 목표가 돼 버린다. 욕심을 부리면 자연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취해야 할 자연스러운 직립의 자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몸에 힘이 들어가고 웅크리게 된다. 욕심이라는 게 원래 끝이 없는 것이라 끊임없이 욕심을 추구하다가 죽을 때에도 욕심의 끈을 놓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죽는 사람은 죽을 때에도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하기 때문에 이를 악 다물고 아등바등하면서 죽게 된다. 욕심 없이 살다가 가는 사람은 죽을 때에도 얼굴에 평화로운 기운이 돈다. 욕심이 없었으니 살면서도 자연 상태에서 살다가, 원래 왔던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므로 안온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서 욕구라는 화두를 중심으로 알아보았다. 몸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마음도 진화를 했음을 보았다. 결국 마음이라는 것은 인지 능력을 가지고 있는 욕구 또는 욕심의 덩어리일 뿐이다. 욕구라는 것은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그런 형태로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마음이란 자연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자연으로 되돌아갈 준비도 갖추고 있는, 몸의 표현 형태이기도 하지만 몸의 행동의 방향을 판단하는 일종의 주체도 되는 셈이다.
결국 어떤 마음을 먹느냐가 그 사람의 행동을 많이 좌우하게 된다. 의지가 박약한 사람은 마음을 먹어도 힘이 들면 한 방향으로 행동을 하지 못하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이란 대개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을 보고 행동을 하게 된다. 마음을 잘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마음을 가져도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행동은 몸이 하는 것이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행동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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